신촌로를 사이에 둔 두 洞은 마포구 阿峴洞(아현동)과 서대문구 北阿峴洞(북아현동)이다.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행정구에 있어 의아하다. 현재의 충정로, 북아현동, 아현동을 지나는 구릉 전체를 조선시대에는 ‘애오개’라고 통칭했었다. 조선 한성부 때는 이 지역이 ‘서부 반송방 아현계’에 속하였었다. 1911년 4월1일에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북아현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서대문구에 위치한 북아현동은 마포구의 아현동과 漢字名(한자명), 由來(유래)가 같다. 북아현동의 洞名(동명)은 ‘애오개’와 관련 있다. ‘애오개’는 유래에 여러 說(설)이 있다.
가장 재미있는 說은 옛날 사람들이 높은 고갯마루를 ‘아이고’하며 오르내려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단지 여러 說 中 하나지만 감탄사인 ‘아이고’가 그 옛날 이동수단 없이 고개를 오르내린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두 번째 說은 조선시대 都城(도성) 안에서 어린 아이가 죽으면, 그 시체가 西小門(서소문)을 통해 나가 묻혀 “아이 시체가 넘는 고개[아이고개]”로 불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아현동 주변에는 兒冢(아총)이 많이 남아 있다. 북아현동의 現 중앙여고 자리에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懿昭世孫(의소세손)의 묘소 懿寧園(의령원)이 있었다. 지금은 고양시 西三陵(서삼릉)으로 이전되었다.
‘애오개’란 地名(지명)이 만든 文化(문화)도 있었다. 다섯 개의 本山臺(본산대) 중의 하나인 애오개 산대놀이 탈춤이다. 日帝 때 없어졌으나 別山臺(별산대)인 송파산대놀이가 애오개 산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一說(일설)에는 서소문을 지나는 죽은 아이와 그 부모를 위로하기 위해 광대들이 산대놀이 탈춤을 하면서 굿을 했다고 전해진다.
세 번째 說은 남쪽의 萬里峴(만리현)과 서북쪽의 大峴(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에 있는 작은 고개이므로 ‘아이고개’라 불렸다는 것이다. 阿峴[언덕 아, 고개 현]이라는 漢字(한자)를 보면 언덕이 많은 주변 지형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북아현동’하면 떠오르는 곳이 달동네[높은 곳에 위치해 달이 가까운 동네]다. 언덕에 제각각의 모양을 한 집이 통로 계단을 따라 있었다. 2009년 4월10일 한국일보 기사 ‘사라지는 풍경들 기록만은 남겨야죠’에는 당시 한 거주자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원래 산이었던 이곳에 한국전쟁 이후 사람들이 모여들어 천막을 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어요. 계획에 의해서 지은 집들이 아니라 살면서 필요에 따라 보수하고 덧지어나간 형태들이죠. 특별한 양식도 없고 그저 비바람을 막고 채광과 환기를 위한 기본적인 공간이에요. 삶이 그대로 묻어난다는 점에서 한국의 실제 문화는 이곳에 있는 것 같아요.>
6.25 직후 형성되어 약 60년 동안 서민의 동네로 명맥을 이어오던 이 달동네는 지금 새로운 아파트단지 건설과 거리조성으로 분주하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북아현 뉴타운 사업 지구로 지정된 뒤 개발 중이기 때문이다.
달동네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고급주택지도 유명하다. 산 위에 위치하여 한적하고 깨끗해 좋은 주택입지이다. 북아현동에 거주했던 유명인물들이 많다. 박태준 前 국무총리, 이기택, 강창성, 권익현 前 국회의원 등이 이 지역에 거주했었다.
추계예술대학도 있다. 여성운동 지도자 秋溪(추계) 黃信德(황신덕)이 설립한 이 학교는 중앙여자고등학교와 함께 북아현동을 상징하는 교육기관이다.
북아현동 주변에는 鞍山(안산)이 있다. 鞍山의 지명은 그 능선이 안장처럼 편하게 생겼다 해서 붙여졌다. 무악산, 금화산, 모악산, 길마재, 모래재, 추모련 등 다른 명칭으로도 불린다. 鞍山은 역사적 전투의 현장이었다. 300m을 넘지 않는 작은 鞍山이 왜 전략적 要地(요지)로 쓰였는지 이유가 있다.
鞍山은 주변지형으로 통하는 길이 여러 개이면서 한양의 관문을 끼고 있었다. 무악재는 한양의 북서쪽 경계였고, 황해도•평안도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교통•군사의 요충지였다. 또한 산 높이는 낮지만 곳곳에 샘터가 있고 물맛도 좋았다고 한다.
1624년(인조2년) 李适(이괄)의 난 때 반란군이 궁궐을 점령하자, 張晩(장만)의 군사가 안산에서 진을 치고 대치했다. 당시 이 전투를 구경하려는 백성들로 맞은편 인왕산이 온통 무명옷의 하얀색으로 뒤덮였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패하고 있었던 장만의 군대가 역방향의 모래바람 덕분에 역전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 고개를 ‘沙峴(사현)’, 안산 아래쪽 봉우리를 ‘勝戰峰(승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鞍山은 6.25전쟁 때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탈환을 도모할 당시 격전지였다. 이곳에서 104고지전투와 延禧(연희)고지전투가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에 한국 해병 제1대대, 제2대대는 1950년 9월21~23일까지 美 해병대와 함께 안산 일대의 북한군과 싸웠다. 이 전투는 공산군의 서부방어선 돌파와 서울탈환의 계기가 되었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의 훈련장이어서 요새의 형태였다고 한다. 높지는 않았지만 경사가 급한 反斜面(반사면)에 적군이 진지를 구축해 공격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178명의 아군이 죽고 공산군 1750명이 사살됐다.
서대문구의 소식통 웹사이트 Tong에는 104고지 전투 상황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국제연합군 美 제10군단은 예하에 美 제1해병 사단으로 하여금 서울수복의 주력부대로 삼고, 그 예하에 美 제5해병연대와 한국 제1해병대대는 중앙 진출로 안산에서 노고산에 이르는 적의 主저항선을 돌파하게 되었다. 敵도 이곳에 우수한 장비를 갖춘 25여단이란 특수부대 2500명을 배치시켰다…(중략)
제5해병대는 1950년 9월21일 오전 7시 기동공격을 감행하였다. 앞쪽에서는 적이 각종 화기를 20m마다 배치해서 기다리는 것을 예상 못하고 美 제5해병연대 예하 美 제1대대는 노고산(105m), 美 제3대대는 안산(296m), 한국 해병 제1대대는 중앙의 와우산(105m)을 탈환하게 명령했다. 한국 제1해병연대는 와우산 진출 도중 연희동 104고지와 연희고지에서 격전을 치러야 했다.
21일 오후 2시부터 104고지를 공격하여 2시간의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점령했다 [注: 북한군이 104고지를 요새화해 대치중이었다]. 200m 떨어진 연희고지 공격은 이튿날 오전 7시에 시작했는데 악전고투가 전개되어 종일 100m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美 제1해병대대와 제3해병대대는 全화력 집중으로 노고산과 안산을 점령했지만, 연희고지는 24일까지 2일간의 공격에도 300명의 병력손실만 있을 뿐 진전이 없었다. 美 제5해병연대장 머레이(Murray) 중령은 한국 제1해병대대와 예비대대인 美 제2해병대대를 투입시켜 공격에 가담시켰지만 고전을 거듭했다. F중대의 1개 소대는 총원이 7명으로 격감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23일 종일 공격이 헛된 것이 되자 美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Almond) 소장은 미 제1해병사단장 스미스(Smith)소장에게, 정면공격 계획을 피하고 서울 동남쪽으로 우회 포위하는 작전을 권유, 사단장은 작전계획 수정을 반대하여 의견충돌까지 있게 되었다.…(중략)
안개가 고지 일대를 뒤덮어 시야를 가리는데다가 적은 포격과 항공지원을 예상하여 쉴 새 없이 연막탄을 터뜨리며 은폐시키고 있었다. 적이 위치한 연희고지는 높지는 않았으나 경사가 급한 반사면에 구축된 관계로, 준비사격이나 공중지원도 별로 효과가 없는 채 美 제2해병대대와 제3해병대대가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적이 가까운 거리에서 쏘아대는 십자포화로 접근 시도가 좌절될 수밖에 없을 때, 美 제2해병대대 D중대가 오전에 정상으로 돌격해서 207명중 178명을 잃고 드디어 이곳 연희고지를 점령했다.(하략)>
연희동 99번지에는 104고지 전투를 기념하는 전적비가 있다. 現 성산회관 뒷길로 50m쯤 올라가면 ‘海兵隊一O四高地戰蹟碑(해병대104고지전적비)’가 있다.
현재 북아현동에는 5109세대 1만1527명이 거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