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내한한 윌리엄 페리(유태계) 전 美국방장관이 북한 3차 핵실험에 따른 위기의 해법으로 빌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한 ‘페리 프로세스’(미국판 對北포용정책)의 복원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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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94년 1월 국방장관 취임과 함께 북한 핵 의혹 위기를 부추기며 美·日 신(新) 가이드라인 성립을 위한 군사적 긴장을 조장했고, 1997년 1월 장관 퇴임 후 1999년까지 북한 핵 의혹 문제를 둘러싼 정책조정관으로서 한·중·일·북(韓中日北)을 정력적으로 오갔다.
 
그는 가이드라인 성립 뒤에 “북한은 혐의가 없었다”며 무책임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히로세 다카시著, 《アメリカの経済支配者たち》, 1999년) 또 군수 기업인 ‘GTE 실베니아’ 임원을 맡은 뒤 스스로 ESL이라는 군수 기업을 창업해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와 함께 그는 1967년부터 국방부 기술 자문을 10년간 수행해 1977년부터 親北 성향의 카터 정권에서 국방 차관이 됐다. 카터가 대통령에서 퇴임한 뒤에도 페리가 북한 문제와 관련된 외교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재벌이 배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페리 자신은 레이더 파를 흡수하는 스텔스 전폭기를 만든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스탠퍼드 대학교 국제안전보장군비관리센터(CISAC)의 소장을 맡아, 표면상의 직함은 고리타분한 수학자였다. 그러나 이면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투자 은행인 함브레히트 & 퀴스트(Hambrecht & Quist)의 경영자로서, 또 군수 기업인 ‘기술전략연합사’(Technical Strategies & Alliances)회장으로서 거대한 사재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페리 前 장관은 노무현 정권시절 左派정권 ‘대북 퍼주기’의 실체인 개성공단을 방문해 “개성공단 사업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한반도의 미래를 보여주는 사업”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또 부천공업(주), 신원(주) 등 개성공단 입주기업을 둘러본 뒤, 북한 관계자들에게 “당신들은 미래의 개척자”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