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나온 '장준하 타살說'

국가가 최초 수사까지 포함해 네 번이나 조사했지만 ‘타살’ 증거 못 찾아

1975년 포천 약사봉에서 ‘실족사’한 張俊河(장준하) 씨가 他殺(타살)되었다는 주장이 또 다시 제기됐다.


머리뼈(두개골) 함몰을 외부 加擊에 의한 것으로 단정

26일 장준하선생사인진상조사공동위원회(이하 위원회)는 “2012년 12월부터 컴퓨터단층촬영(CT), 3차원(3D) 재현 등 張 선생 유골에 대한 감식을 통해 ‘타살 후 추락’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再감식을 맡았던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장준하 선생의 머리뼈 함몰은 외부 加擊(가격)에 의한 것”이라며 “加擊을 당해 즉사한 이후 추락해 엉덩이뼈가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밝혔다.

李 교수는 “張 선생이 추락에 의해 머리뼈가 함몰됐다면 반대 방향으로 충격이 전해져 왼쪽 眼窩(안와, 안구 주위 뼈)가 함께 손상돼야 하는데 이 부분은 깨끗하다”며 외부 加擊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이는 추락보다 외부 가격에 의해 머리뼈가 손상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머리뼈와 엉덩이뼈가 추락으로 손상됐다면 어깨뼈도 부러져야 하는데 張 선생의 어깨뼈는 멀쩡했다”고도 했다. 머리뼈를 가격한 물체에 대해서는 “頭皮(두피) 손상 부분이 좁은 것을 고려하면 동그란 모양을 가진 돌멩이나 아령 등이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언론이 외면한 ‘골반 골절’…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

과거 張 씨의 유골을 檢案(검안)한 적이 있는 이윤성 서울대 법의학과 교수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실족사’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李 교수는 김대중 정권 때 발족되었던 1기 의문사위에서 非상임위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가 내세운 근거는 다음과 같다.

▲(두개골에 있는) 타원형 골절 바깥의 방사형 골절은 일반적으로 망치 加擊보다 훨씬 큰 충격에 의해 발생한다.
▲망치에 맞은 시신에는 여러 차례 내리친 상처 자국이 흔히 발견되는데 張 씨의 경우 한 개 뿐이다.
▲시신 두피에 망치 가장자리 모양으로 찢어진 상처가 남아야 하는데 故 조철구 박사가 1993년 민주당 진상조사위에 낸 檢案 소견에는 이 같은 내용이 없다. (<동아일보> 2012년 8월24일字 A12면 참조)

주목해야 할 것은 張 씨 골반 골절이다. 다수의 언론은 두개골 함몰에만 초점을 맞추고 골반 골절은 외면했다. 이윤성 교수는 2012년 8월17일字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오른쪽 볼기뼈(골반) 골절을 발견하고 추락이 개입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골반 골절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추락) 가능성을 높게 본다. 인위적 가격 뒤 절벽으로 張 선생을 추락시켰거나, 강제로 떠밀어서 바닥 근처의 돌에 부딪혔을 가능성 모두 있다. (추락이라도) 환경 등에 따라 (골절 부위가) 적을 수도 있다. (사망 당시) 부검을 했다면 폐나 간 같은 장기가 터진 모습이 관찰됐을 수 있다. 지금도 가격에 의한 타살이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3월27일 현재, 인터넷 <네이버>에 ‘장준하’, ‘골반’, ‘볼기뼈’라는 키워드를 입력하면 2012년에 보도된 기사에서만 일부 검색될 뿐, 금번 위원회 발표나 이정빈 교수의 再감식 소견발표 내용 등에서는 키워드가 걸리지 않는다. 이는 再감식에서도 골반 골절이 언급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목격자와 담당 검사도 ‘실족사’임을 분명히 해

사고 목격자도 일관되게 ‘실족사’임을 증언했다. 사고 당시 張 씨와 함께 포천 약사봉을 등반했던 金龍煥(김용환) 씨는 <월간조선> 1993년 5월호에 사고 정황을 기록한 手記(수기)를 공개했었다. 그는 “선생님(注: 장준하)은 일행이 기다릴테니 식사 준비하던 곳으로 직선으로 下山하자고 하셨다”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올라왔던 길로 등성이를 따라 내려가서 일행과 같이 오던 계곡을 따라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일행이 기다리니 빨리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뜻이 그러한데 더 반대할 수도 없어서 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후에 생각하니 ‘왜 선생님의 뜻을 더 막지 못했나’하고 후회가 된다…(중략) 선생님의 뒤를 따라갔다. 평평한 능선 두 개를 넘은 것으로 기억된다. 능선을 돌아가니, 급경사를 이루는 계곡이 시작되는 제일 윗부분에 서게 됐다. “선생님, 더 못가겠습니다. 되돌아 가시지요”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그곳에 좀 서 계시더니 건너편으로 뛰어 넘으시면서 나더러 건너오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뛰어 넘으셔서 나도 그곳을 뛰어 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곳을 뛰어 넘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계곡, 아찔함을 느꼈다…(중략) 얼마를 내려오니 병풍같이 펼쳐진 斷崖(단애)가 있었다. 단애 밑에는 소나무가 나 있어서 나는 그 나무를 잡고 단애를 뛰어 내렸다. 그 단애의 높이는 1.5m 정도 된다고 생각된다. 단애의 밑은 평평한 지형이었다. 게속 내려가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 뒤를 돌아보니 선생님께서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同 잡지에는 담당 검사의 증언도 수록되어 있다. 당시 의정부지청 徐燉洋(서돈양) 검사는 張 씨의 실족사건을 최초로 수사했던 인물이다. 사건 당일 그는 당직 검사였으며 경찰 보고로 올라온 張 씨 사고 소식을 듣고 약사봉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 사건과 관련해 그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증언을 했었다.

<새벽 1시쯤 도착해 포천 지역 의사회장이던 심구복 씨(사망)와 함께 산에 갔다. 이미 시신은 옆으로 치워져 있었고 피가 꽤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심 씨가 시신을 살펴보는 동안 플래시로 떨어졌다는 지점을 비췄더니 절벽에 비스듬히 나 있는 소나무가 아래쪽으로 휘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 높이가 12m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옆에는 기자들도 많이 와 있었는데 저마다 그 소나무를 가리키면서 ‘저 소나무를 잡으려다가 떨어졌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가족들도 그분이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몸이 쇠약해졌는데 아마 현기증이 일어서 추락한 모양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신도 그렇게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시신을 살폈던 심 씨가 후두부와 다리에 골절이 있다고 말한 기억도 난다. 별로 의심할 만한 점이 없었다. 그때 金龍煥 씨가 저에게 호되게 닦달을 당했다. 나는 타살 가능성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의문을 갖고 그를 추궁했다. 하지만 타살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일각에서 제기하는 외압說에 대해서도 “외압이 있을 일이 뭐가 있습니까”라고 반문하며 “마치 검찰이 숱한 궁금증을 억지로 덮은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 사건은 경찰의 1차 조사 서류에다가 제가 金龍煥 씨를 조사한 기록 등을 첨부해서 그걸로 끝난 겁니다”라고 단언했다.

최초 수사까지 포함하면 총 네 번이나 조사한 셈

이 사건은 김영삼 정부 초인 1993년,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 주도로 만들어진 ‘장준하선생사인규명진상조사위원회’에서 조사했었으나 타살 가능성만 제기됐을 뿐, 뚜렷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졌던 ‘의문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문사위)’도 두 차례나 조사했지만 두 번 모두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고 직후의 최초 수사까지 포함하면 총 네 번의 조사가 이뤄진 셈이다.

張 씨의 再검안을 주도한 위원회는 2012년 12월, ‘장준하선생암살의혹규명국민대책위원회’와 민주통합당 ‘장준하선생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이 함께 구성한 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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