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한이 對南(대남) 도발을 하여, 수백 명의 한국인이 죽고 다친다.
2. 한국군은 응징책으로 김일성-김정일의 미이라가 있는 평양의 금수산 궁전과 동상을 크루즈 미사일로 파괴한다.
3. 북한은 개성공단을 폐쇄, 수백 명의 한국인 근무자를 억류한 뒤, "한국 정부가 최고 존엄의 권위를 훼손시킨 데 대하여 사과하고 책임자를 문책하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4. 朴槿惠 정부의 선택은? 응징이 구걸로 바뀌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戰時(전시)에 인질이 될 것이 뻔한 수백 명의 自國民(자국민)을 敵地(적지)에 둔 채 作戰을 하겠다는 정부와 군대를 믿을 수 있나? 인질상황을 걱정해야 하는 軍이 보복을 제대로 할 수 있나? 김정은부터 韓國軍의 보복의지를 의심할 것이다. '모든 것을 전시에 준하여 처리하겠다'는 北의 협박은 남북한간 交戰(교전)이 벌어지면 개성공단 체류 한국인을 敵으로 간주, 억류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개성공단 입주 업체는 북한의 도발의지에 대한 압박이 아니라 한국의 응징의지를 약화시키는 존재가 되고 있다. 개성工團(공단)에 손발이 묶이는 쪽은 韓國軍이다. 늦기 전에 한국인들을 전원 철수시키고 믿을 수 있는 신변보장책을 요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공단 가동 중단의 책임을 北에 넘겨야 한다.
국가가 수백 명의 自國民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하거나 요행을 바라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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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40년간 公職에서 봉사할 기회를 준 나라에 보은하고 싶어서 쓴 글
死境을 헤매면서
근래 우리의 자연수명은 길어져 옛날에는 드물던 고희(古稀·70)는 물론 미수(米壽·88)의 나이도 드물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장수(長壽)를 자랑하기보다는 그간 걸어온 인생의 질(質)이 중요한데도 필자의 만년(晩年)은 자랑스럽지 못하다.
4년여의 주미(駐美)대사의 중책을 대과(大過) 없이 마치고 돌아올 때, 6·25 당시 입은 척추부상으로 30여 년이나 필자를 괴롭혀오던 허리의 통증을 제거하고자 척추를 절개하여 그 속에 박혀있는 뼛조각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 의학(醫學)에도 한계가 있는 듯 왼쪽다리의 기능과, 일반 사회에 더 봉사하고 싶었던 꿈을 앗아갔다. 그것이 내 건강의 균형을 상실하게 했는지 이후 27년간 암을 비롯한 여러 병을 앓게 되었다.
지금 이 나이가 되어 감히 글을 쓰게 된 것은 여러모로 부족한 나에게 40년이나 공직(公職)에 서서 봉사할 기회를 준 나라에 보은(報恩)하기 위함이다.
4년 전, 먹은 음식이 식도에서 위(胃)로 내려가지 않고 일부가 기도(氣道)를 통해 폐로 흘러들어가 폐렴을 일으켰다. 1년여의 재활치료에도 차도가 없었다. 주치의는 “오래 살려면 후두 덮개를 식도에 고정시키는 수술을 하라”고 권했다. 성대(聲帶) 위에 구멍을 뚫어 호흡은 그대로 할 수 있게 하되 성대는 파손되어 제대로 말을 못하는 수술로, 그저 연명(延命)만 하라는 것이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하였으니, 나의 개성의 일부인 고유의 음성은 그대로 지키면서 액체영양식을 직접 위에 주입하여 살 수 있을 때까지 재활치료에 전력하기로 하였다. 중환자실에서 사경(死境)을 헤매면서 새삼 필자가 걸어온 길이 특이하고 남다른 점이 많았음을 깨닫기도 하였다.
스승 신태영 장관
재일(在日)교포 생활을 하다가 중국전쟁터에서 돌아온 것은 해방이 된 다음해, 1946년 5월이었다. 그때 알아듣기만 했던 우리말을 배워가면서 충북도청 소재지인 청주(淸州)의 미 군정청(軍政廳)에서 구호식량과 적산(敵産)관리 업무에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학창시절 때 영어공부에 열중한 덕분이었다. 찾아 돌아온 고국(故國)에는 학창시절의 동문은 한 명도 없고 지역적 연고나 밀어주는 선배도 전무(全無)하였다.
당시 청주는 인구 8만 명에 불과한 전형적인 교육도시였다. 겨레는 한결같이 해방의 기쁨에 젖어있고 나라는 독립의 산고(産苦)를 겪고 있었지만 별로 실감할 수는 없었다. 일본의 수도 동경(東京)에서 자랐고 광대한 중국 땅을 밟아본 내게는 이 고요한 농업도시가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마침내 나는 역사적인 이 시기를 보람 있게 살아볼 길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건국(建國)에 이바지하려 나라의 간성(干城)이 될 결심을 한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보고 2일 후인 17일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초급장교 시절 나의 절대적인 스승은 신태영 전 국방장관이었다. 그분은 舊韓末 대한제국의 사관생도였지만 일본 육사에 편입되어 지청천, 이응준, 홍사익 장군들과 함께 그곳을 졸업했다. 새 정부의 초대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 장군의 군무국장이 되어 창군(創軍)의 골격을 짜느라 국군조직법, 병역법, 국방부 업무분쟁규정 등의 초안을 잡을 때 나도 구미(歐美) 군사운용교리를 찾아드리며 군사지식을 넓혀나갔다. 申 장군은 신임 장교인 내게 군인의 올바른 본분을 심어준 필생의 교육자셨다.
韓美연합사를 만들다
육군 소위로 임관한 지 2년도 채 못 되어 닥쳐온 시련은 북한의 불법 남침(南侵)이었다. 2년3개월간 야전(野戰)에서 여러 보직을 거쳤다. 軍은 내게 여러 교육과 실무경력을 쌓게 하여 군이 요구하는 새로운 과제들을 추진하게 했다. 임관 후 16년이 지났을 때는 파월 맹호사단을 전지(戰地)에서 지휘하며 베트남전에 참전한 여러 나라 부대들 중 최고의 전투서열을 자랑하게 해주었다. 귀국 후 극심한 무장공비의 침투를 봉쇄·소탕하는 작전을 성공시키고,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여 향토방위를 책임지고 운용하는 실무책임을 맡기도 했다. 중장(中將)으로 승진하여 중부전선에서 군단을 지휘했을 때는 철원에서 김일성이 파 내려오던 땅굴을 탐지하고 그 야욕을 좌절시키기도 했다.
합동참모본부로 전보(轉補)된 후에는 유엔司가 단독으로 행사해오던 작전통제권을, 우리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이 한미(韓美)양국군을 함께 지휘하는 한미연합지휘체제로 발전시켜 한미연합군 사령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그 사령부가 우리나라 안보(安保)는 물론 지역안정의 기틀이 되어왔음을 보니 다행하기만 하다. 합참의장이 되어서는 훼손된 한미(韓美)간의 상호신뢰를 회복하고 나라의 안보를 견고히 하고자 한미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1981년 6월에 34년간의 군복무를 합참의장으로 마무리 짓고 주미(駐美) 대사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미국으로 부임하자 내가 다년간 한미안보에 노력한 업적을 인정하여 국방성, 국무성은 물론 美 의회도 문을 열고 나를 상대해주었다. 백악관의 안보특보도 수시로 만나 협의하였다. 4년 여 후 소임을 다하고 돌아올 때는 허리 수술의 잘못으로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다. 평생 세 번이나 전쟁터에 섰던 군인의 몸으로 흔히 있는 일이지만 6·25 때 입은 척추부상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맡아온 업무에만 열중한 인과응보(因果應報)이기도 했다.
기록을 남기라는 충고들
이번의 급성폐렴은 어려운 투병이다. 그래도 회복기에 들어서자 나의 군사학파 문하생으로 불려온 부관과 보좌관들이 찾아왔다. 영광스럽게도 내가 20년간 군의 장성으로 보임해 두었던 15명의 부관들 중 12명이 장성으로 승진해 군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들은 내가 각급부대를 지휘할 때 동행하면서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앞날에 활용할 전투력으로 길러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3군을 합동군으로 통합 발전하는 율곡계획을 비롯해 여러 계획을 입안하면서 실행에 몰두하는 과정도 견습하였다. 그들은 입을 모아 필자가 걸어온 국가안보의 길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충고해주었다.
나의 발자취를 회고(回顧)하여 글로 쓰려니 어려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학습해보지 못한 재일교포가, 한정된 군사문화를 기초삼아 침상에서 글로 써보겠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그렇다고 내 생각을 구술(口述)하여 대필하기에는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진통제를 먹으며 매주 여러 번의 통원치료를 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책상에 앉아있기조차 힘이 들어, 흩어진 여러 기록과 자료를 찾아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예측하기 어려운 병세라 시간을 정하여 나의 말을 받아 써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정리한 내 기록이 앞날의 국가안보를 연구하고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랄뿐이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과 농림부 장관으로 복무하였던 기록, 예편하여 주미 대사로 헌신하였던 일은 달리 평가받을 일이어서 이 책에서는 제외하였다.
신세진 분들
나는 긴 공직 봉사를 통하여 북한의 악랄한 도발을 격파, 봉쇄하느라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왔다. 북한의 본성을 해부하고 주변 정세가 우리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면서 우리의 지상(至上)목표인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과정도 부록으로 기록해보았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서 내 글의 객관성을 고증 받고자 국방부 군사(軍史)편찬연구소의 양영조(梁寧祚) 박사에게 검토를 부탁했다.
양 박사는 면밀하게 내 글을 살펴보고는 “군의 후배들에게 참고자료로 남기기보다 출판하여 일반 사회의 평가를 받아보라”고 권유해주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오랜 지기(知己)인 조갑제(趙甲濟) 대기자에게 송고하였더니 친절하게도 내 졸고(拙稿)를 교정하고 정리하여 출판해주기로 하였다. 일반사회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군사용어와 표현을 바로잡아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글로 고쳐 써준 것은 조갑제닷컴의 이지영(李知映) 기자이다. 이분들의 도움이 있어 내 글을 독자들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깊이 감사드린다. 2년이 넘게 집필하다보니 시사성을 겸한 글이 된 것에 양해를 구하며, 심한 병마(病魔)에도 불구하고 아흔인 내가 이 글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천운(天運)이었다.
2013년 봄 아차산 아래 우거(寓居)에서
저자 柳炳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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