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숭이 독재자를 옹위하는 늙고 추한 군인들

북한 방송엔 김정은이 늙은 군 장성들에게 둘러싸여 거들먹거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를 본 한 기업인은 이렇게 평했다.
“늙은 군인들이 애숭이 독재자를 부추겨놓고 자신들은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추한 모습이다.”
북한 사정에 밝은 국군 지휘부의 한 고위 인사는 “그 기업인의 말이 핵심을 찌르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북한 권력층 안에 노선 투쟁 비슷한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듯합니다. 김정은이 실권을 잡은 뒤 군이 관리하던 외화벌이 사업권을 내각으로 가져간 것이 기폭제가 되었어요. 돈줄을 잃게 된 군대가 반발하였고 군부 實勢였던 이영호가 장성택(김정은의 고모부)에 의하여 숙청되었습니다. 장성택은 작년에 중국을 방문,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성과가 없자 군 지휘부는 장성택 식 실용노선을 반대하면서 김정은을 자기들 편으로 끌고 간 듯합니다. 이들은 긴장을 조성해야 외부로부터 도움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작년부터 북한군의 훈련이 놀라울 정도로 강화되었습니다. 실탄 사격량이 3~4배로 늘고, 비행훈련도 엄청 많아졌습니다. 기름, 탄약 재고량이 바닥 날 터인데도 저런 무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위기를 만들면 주변 국가들이 달래려 나올 것이고 그때 많은 원조를 받는다는 계산을 한 것 같습니다. 투자에 대한 회수이지요.
문제는 중국까지도 김정은의 행태에 짜증을 낸다는 사실입니다. 주변국들이 김정은을 달래기 위하여 식량 원조를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 판명되면 이번엔 장성택 쪽의 반격이 시작될 겁니다. ‘강경 노선으로 얻은 게 무엇인가, 손해만 보았지 않은가’라고 말하면서 군 강경파를 몰아세울 때 권력층 안에서 티각태각하다가 돌발 사건이 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김정은과 군부가 일으킨 이번의 核위기를 결산하게 될 때 ‘손해만 보았구나’로 결론이 나면 김정일과 군부의 권위가 약해질 것입니다.”
그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2008년 여름 이후 북한정권의 행태는 합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질서가 없다고 했다. 이는 김정은의 무능을 보여준다. 문제는 군대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김정은이가 언젠가는 질주를 멈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등에서 내릴 때 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다. 路線투쟁이 권력투쟁으로 악화되면 10.26 사건 같은 것도 가능하다. 모순과 갈등의 정도가 심해지면 대폭발의 임계점에 가까이 가게 된다. 이 인사는 “북한정권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것은 예외이다. 역사에서 예외는 영원할 수가 없다. 드디어 망조가 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고도 했다.
북한정권의 지배층 인사들의 아들들이 어디서 일하고 있는가를 조사하였더니 거의가 외화벌이 사업을 하거나 해외에 나가 있고 黨이나 군대 근무자는 몇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배층 안에서도 북한정권의 미래를 비관하고 있다는 암시이다. 이 고위 인사는 김정은이 韓美군사훈련 중엔 도발을 하지 못하지만 소강국면에 접어든 이후 도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
,,,,,,,,,,,,,,,,,,,,,,,,,,,,,,,,,,,,,,,,,,,,,,,,,,,,,,,,,,,,

적중한 推論

李世基 한중친선협회 회장은 고려대 교수, 민정당 원내총무(4選 의원), 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하였다. 후진타오, 시진핑 등 중국의 지도자들과 교분이 깊다. 李 전 장관은 작년에 ‘李世基의 중국 관계 20년’(중앙books)이란 책을 썼다.
지난 5월 초 李 장관이 전화를 걸어와 만났다. 그는 나의 손을 잡고 “趙 대표 덕분에 내가 기분이 좋다”고 했다. 나는 그 2주 전 TV 조선 인터뷰에 나가서 한국전 휴전 60주년을 맞아 쓴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秘史’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스탈린이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싸우도록 만들기 위하여 김일성을 시켜 남침 전쟁을 벌였다”는 요지인데, 그 증거로 스탈린이 체코 대통령에게 구두로 설명하도록 소련 대사에게 보낸 비밀 電文을 소개하였다. 1950년 8월27일자 이 전문에서 스탈린은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 파견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미국에 프리핸드를 주어 한국에 참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였다. 그는 또 중국군도 참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국과 중국이 한국에서 싸우게 되어 발이 묶이게 되어 국제공산주의 세력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스탈린은 한국전을 일으켜 미국과 중국이 싸우게 함으로써 두 나라를 이간질 시키고 중국을 소련에 종속시키려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秘史’는, 6.25 남침 전쟁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照明을 던지면서 트루먼이 스탈린의 대전략에 대응하여 서양이 냉전에서 최종승리할 수 있는 對蘇 전략의 틀을 만든 과정도 소개하였다.
李世基 장관은 “趙 대표가 쓴 책을 읽으면서 내가 30여 년 전에 썼던 논문의 추론이 적중하였음을 확인하게 되었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李 장관은 학원사태로 고려대를 물러난 뒤인 1977년 도쿄대학교 대학원에 유학을 가서 中蘇 갈등과 한국전쟁의 관련성을 캐고 들어간 적이 있었다.
李 장관을 만나고 와서 작년에 나온 그의 회고록 중 관련 대목을 찾아서 읽다가 놀란 것은 나였다. 아직 중국과 소련의 한국전 관련 비밀자료가 공개되기 전인데도 그는 한국전의 원인을 정확하게 짚었다. 2000년 들어서 冷戰史를 연구하는 미국 학자들이 내어놓기 시작한 ‘새로운 관점’을 李 장관은 한 세대 전에 이미 예언한 셈이다. 역사적 추론이 적중할 때 느끼는 희열을 맛보고 있다는 그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 장관은 6.25 전쟁과 중공군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전쟁 체험이 연구 주제를 정하는 데 동기가 되었다고 썼다.
그는 열다섯 살 때까지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사곡리 305번지에서 살았다. 개성의 남쪽 판문점 근처이다. 그가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마오쩌둥·스탈린 간의 갈등과 한국전쟁’으로 정하게 된 동기는 어렸을 적에 만났던 중공군에 대한 특별한 인상 때문이었다.
<전쟁 중 가장 무서운 일은 북한군이 나를 잡아가는 것이었다. 당시 15세 이상은 인민군에 잡혀가는 신세였는데, 14세였던 나는 키가 15세 이상으로 커보였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집의 온돌방 밑에 토굴을 파서 가족의 은신처를 만들었다. 우리 가족들, 특히 위험에 처한 나는 부엌 아궁이를 통해 은신처에 출입하면서 숨어 살아야 했다. 깜깜한 온돌방 밑 지하에 볏짚을 깔고 지내면서 식사 시간에만 아궁이를 통해 전해지는 밥을 먹는 실로 극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1950년 10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은 38선을 오르내렸다. 6.25 때 참전하였던 중공군은 軍紀가 엄정하였다. 특히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애썼다.
어느 날 갑자기 중공군이 이세기 소년의 집에 들이닥쳤다. 1개 대대 병력의 중공군은 그의 집에 대대본부를 차렸다. 지하 생활이 어렵게 된 그는 할 수 없이 지상으로 나와 두려운 마음으로 중공군과 마주했다.
<중공군들은 우리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마치 한 식구같이 친숙해졌다. 그들은 나에게 중국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당시에는 가사 내용을 모르고 그냥 따라 배웠는데 중국 동포인 조선인 鄭律成(정율성)이 작사·작곡한 ‘義勇軍行進曲(의용군행진곡)’과 지금도 중국인들이 즐겨 부르는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沒有共産黨, 就沒有新中國)’는 노래였다.>
약 20일 정도 마을에 주둔한 중공군들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 생활했다. 닭이나 돼지를 잡아갈 때 그들은 꼭 돈을 지불했다.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도 없었다. 전쟁 통에서 본 다른 나라 군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1975년 이세기 고려대 교수는, 당시 고려대 김상협 총장 비서실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한번은 약 500여 명의 시위 학생들이 경찰의 추적에 쫓겨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농성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당국은 학생들의 계속되는 시위를 조기에 해산시키기 위해 도서관의 수도관을 끊어버렸다. 도서관 수위가 그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다. 그는 학생들이 데모를 한다고 해서 먹을 물조차 못 마시게 하면 어떻게 하냐고 반문하면서, 즉각 물을 틀어 주라고 했다. 관계 당국으로부터 학생들의 뒤에서 시위를 선동하는 문제 교수로 지목되었다. 정부는 고려대학교에 한정해 ‘긴급조치 7호’(1975년 4월8일)를 발령, 학교를 폐쇄하였다. 金相俠 총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이세기 교수도 그만두었다. 그는 1977년 당시 아시아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던 김준엽 교수의 주선으로 아시아재단의 지원을 받아 김상협 총장이 수학한 바 있는 일본 도쿄대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종일 대학 도서관에 파묻혀 한국전쟁과 중국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공산권에 관한 자료들이 없거나, 설사 있다 해도 열람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도쿄대 도서관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자료들, 특히 미국과 중국, 소련 자료의 원본 또는 번역문들이 많았다. 늘 문제의식을 가져왔던 주제인 마오쩌둥과 스탈린 간의 암투, 中蘇(중소)분쟁, 그리고 한국전쟁의 발발 배경 등에 관한 자료를 상당량 수집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979년 3월, 학교로 복직이 되었다. 복직 후 도쿄에서의 작업을 기초로 박사학위 논문 ‘마오쩌둥·스탈린 간의 갈등과 한국전쟁’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가 연구를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한국전쟁은 1949년 신중국의 수립으로 1945년에 형성된 얄타체제가 붕괴되면서 생긴 東北亞의 커다란 힘의 공백 상태에서 중국과 소련이 격하게 대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동북아에서 형성된 얄타 체제는 일본의 패망(미국의 점령)과 美蘇(미소)의 한반도 분할 점령, 그리고 소련의 만주 지배를 主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미국과 소련이 동북아 지역을 半分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이끄는 신중국이 수립됨으로써 얄타체제가 흔들리게 되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의 중국을 상실하고, 소련은 1945년 蔣介石(장개석, 장제스) 국민당 정부와 체결한 ‘中蘇우호동맹조약’에 따라 점령하고 있던 만주를 토해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세기 교수는, 만주 문제를 둘러싼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의 갈등이 결국 한국전쟁으로 飛火(비화)되었다고 보았다. 李(이) 장관은 스탈린이 중국의 공산화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고 본다. 스탈린은 통일된 중국보다는 장제스와 마오쩌둥으로 양분된, 즉 약화된 중국을 선호하였다는 것이다.
<소련의 스탈린으로서는 兩大(양대) 진영의 대결 논리에 따라 마오쩌둥의 신중국을 自國(자국)을 중심으로 한 1국(종주권) 체제에 묶어 두는 것이 급선무였다. 경쟁국인 미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중국 공산당 정부가 소련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바햐흐로 신생 중국을 놓고 미소가 경쟁을 벌이게 된다. 마오쩌둥은 신중국 수립 2개월이 조금 지난 1949년 12월16일, 스탈린의 70세 생일 축하 명분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마오쩌둥은 약 70일 동안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길고 긴 협상, 전투 아닌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역사의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모택동은 두 가지 과제를 갖고 소련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최대 현안은 중국이 스탈린 휘하의 一國(일국)체제에 종속되지 않고, 소련과 형제적·수평적인 관계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1945년 얄타 비밀협정에 따라 종전 후 소련이 차지하고 있던 동북3성 지역, 즉 만주를 되찾는 일이었다.
당연히 양자 간의 협상은 순탄하지 않았다. 심각한 대립의 연속이었다. 이게 한국전쟁 발발과 전쟁의 과정을 좌우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게 李(이) 장관의 해석이다. 중국 측의 끈질긴 ‘만주 반환’ 요구에 심기가 불편해진 스탈린은 모택동을 모스크바 교외의 별장에 머물게 해, 사실상 연금 상태에 두고 겁박하면서 협상을 진행했다.
<역사적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중국의 동북 지역인 만주는 동아시아 변동의 시발점 혹은 진원지와도 같았다. 강대국 간의 물리적 충돌의 각축장이었던 만주의 변화는 곧 동아시아의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 과정에서 소련이 만주를 차지하게 된 계기는 두 차례였다. 하나는 1858년 러시아가 청나라와 체결한 ‘아이훈 조약’과 1860년 청나라가 러시아에 우수리강 동쪽의 연해주를 할양하기로 한 ‘베이징 조약’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1904년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함으로써 일본이 만주를 차지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얄타협정(1945년 2월)에 따른 것이다. 회담 당시 미국은 만주에 주둔중인 일본의 관동군을 그대로 묶어두기 위해 소련의 참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소련의 對日戰 참전 代價로 일본이 지배하고 있는 만주를 소련에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얄타협정은 ‘1904년 일본의 공격으로 帝政 러시아가 침해당한 예전의 권리를 회복한다. 이를 위해 소련과 중국 국민당 정부가 동맹조약을 체결한다’는 내용을 명시한다.>
미국 국방성이 주도해 미군의 일본 본토 공격 시(1945년 11월 예정) 예상되는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체결한 이 같은 협정은 戰後(전후) 처리 과정에서 미국의 國益(국익)에 반하는 것이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의 참전을 막기 위하여 일본과의 전쟁을 서둘러 끝내려고 8월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原爆(원폭)을 투하하였지만 8월9일 소련의 참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소련은 終戰(종전) 직전인 8월14일에는 얄타협정에 따라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 中蘇 동맹조약을 체결해 만주를 확보했다.




이 때문에 모택동은 중국을 통일한 후 대등한 관계에 입각한 중소 조약을 맺어 만주를 되찾으려 했다. 스탈린과 모택동 간의 협상은 신경전의 연속이었다. 이 틈을 타고 외교적 공세를 편 것은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였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모택동 간의 협상이 한창일 때인 1950년 1월12일,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對中 화해 메시지를 던진다. 이세기 장관은 애치슨 연설의 노림수를 정확하게 짚었다.
<이는 중국과 소련을 이간시키기 위한 책략이었다. 이 선언에서 미국은 중공혁명의 성공을 ‘아시아 민족주의의 승리’라고 고무하면서, 중국의 新疆(신강, 신장) 지역과 만주에 대한 소련의 야심을 폭로한다. 미국은 아시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국의 도서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했다. 애치슨 선언은 진행 중인 스탈린과 모택동의 협상에 긴장과 갈등·마찰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次敵(중국)을 감싸 안아 主敵(소련)에 대항하도록 하는 일종의 以夷制夷(이이제이)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미국이 의도한대로 되지 않았다.>
애치슨 국무장관의 연설은 한국을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제외, 김일성에게 “남침해도 미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는 신호를 준 것으로 유명한데, 이세기 씨는 이 연설의 주된 목표가 中蘇를 이간질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미국은 그 전에 이미 대만을 군사적으로 보호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중국의 대만 점령계획도 양해하였다. 스탈린도 애치슨 연설의 목적을 간파, 중국이 미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막는 방법을 고민한다. 모택동은 미국이 던지는 추파를 對蘇 협상에 지렛대로 이용, 스탈린의 양보를 받아냈다. 소련과 중국은 1950년 2월 중순, 새로운 中蘇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통하여 소련은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중국에 반환한다.
<당시 스탈린은 만주를 고수할 명분이 없었다. 마오쩌둥을 계속 홀시할 경우 중국이 미국 쪽으로 갈 수 있다는 것도 우려했다.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만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중요한 것은 길고 긴 협상 과정에서 그는 自力으로 혁명을 성공시킨 마오쩌둥의 중국이 자국의 종주권 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대만을 포기하면서까지 중국에 우호적 제스처를 써서 中蘇를 이간질시키려 했던 트루먼 행정부는 兩國이 동맹조약을 맺자 중국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대결정책으로 선회한다. 애치슨은 정책실장 폴 니츠를 시켜 국가안보회의(NSC) 전략문서 68을 만들어 대통령의 결재를 받는다. 이 문서는 공산주의를 서구 문명의 敵으로 규정, 자유진영의 장점인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침투시켜 붕괴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에 따라 대만도 포기대상에서 보호대상으로 바뀌었다. 이 문서는 미국의 군사력을 증강시켜 소련을 상대로 군비경쟁을 하여 소련의 경제력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含意(함의)도 담았다. 문제는 대결정책 추진의 계기를 잡는 일이었다. 이 계기를 제공한 것이 스탈린과 김일성이었다.
스탈린도 절치부심했다. <새로운 경쟁자로 떠오른 모택동이 제2의 티토가 되기 전에 제어하고 압박해 자신의 예속 하에 두고, 적대국인 미국을 시험하고 흔들어 힘을 뺄 수 있는 대전략이 절실했다>는 것이다. 이때 걸려 든 것이 김일성이었다.
1950년 3월30일 김일성은, 스탈린을 찾아와 미국의 애치슨 선언 등 변화된 정세를 거론하면서 남침 계획을 승인해 줄 것을 간청했던 것이다. 만주를 상실한 허탈감 등으로 상심해 있던 스탈린은 이전과 달리 김일성의 南侵계획을 흔쾌히 승인하면서도 반드시 모택동의 동의를 구하라고 지시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경고한다. 소련은 어떤 경우에도 미국과 제3차 세계대전을 초래할 수 있는 직접적인 개입이나 참전은 없을 것이라고. 여기서 李世基 교수는 스탈린의 전략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전쟁을 개입하지 않으면 한반도의 공산화를 통해 국경을 따라 완충지대를 확장해 중국을 포위·견제하고, 만약 개입하더라도 美中간의 전쟁을 통해 신중국을 미국의 화약고 속에 빠져들게 해 自國의 예속 하에 두며, 특히 미국의 힘을 중국의 늪 속에 빠뜨려 유럽에서 힘의 우위를 도모하려 했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은 유엔 안보리의 결정에 따라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을 불러왔다. 그 과정에서 소련은 유엔 안보리 회의에 불참, 미국의 한국전 참전을 용이하게 했다. 소련의 안보리 불참 의도는 미국 등 서방의 참전을 유도해 美中 사이에 분명한 적대관계를 형성하게 함으로써 중국을 자국의 손아귀에 두려고 한 것 같다. 미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은 중국의 개입을 초래해 마침내 한국전쟁은 美中 간의 국제전이 되고 말았다. 애치슨 선언을 통해 中蘇 간의 이간과 불화를 획책한 미국은 그로부터 5개월 후 스탈린의 치밀한 책략에 따라 한반도에서 중국과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미국의 애치슨 선언에 대한 스탈린의 대반격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이세기 교수는 당시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소련의 유엔 안보리 불참을,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한 스탈린의 음모라고 추리하였는데 이 분석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최근 공개된 스탈린의 電文이 뒷받침한다.



2005년에, 러시아의 3大 국립문서보관소 중 하나인 社會政治史(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RGASPI)에서 안드레 레도프스키라는 러시아 학자에 의하여 발견된 스탈린의 편지(문서번호 fond 558, opis 11, delo 62, listy 71∼72) 全文은 이렇다.

<필리포프(스탈린)가 프라하 주재 소련 대사에게 보낸 편지: 체코슬로바키아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전달할 메시지(1950년 8월27일)

고트발트에게 아래 메시지를 口頭(구두)로 전달할 것. 요구한다면 筆寫(필사)하여 줄 것.

우리는 지난 6월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불참한 것과 그 뒤의 사태전개에 대하여 고트발트 동지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는 안보리에 네 가지 이유로 불참하였다: 첫째, 새로운 중국과 소련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하여, 둘째, 미국이 안보리(상임이사국)에서 국민당 괴뢰 정권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하고 (注-모택동이 이끄는) 중국의 진정한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책의 바보스러움과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셋째, 두 강대국의 불참 때문에 안보리 결의는 정당성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 ‘프리 핸드’를 갖고 어리석은 짓을 마음대로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진면목을 알도록 그렇게 하였다.
나는 우리가 이런 목적들을 달성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안보리에 불참한 이후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엮이어 들어가 군사적 名聲(명성)과 도덕적 권위를 망치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서 침략자와 暴君(폭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미국이 한때 생각하였던 것만큼 군사적으로 강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구나 美 연방합중국이 極東(극동)에 묶여 현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이 같은 사실은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에게 得(득)이 되지 않는가?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미국 정부가 極東(극동)에 계속해서 묶여 있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하여 보자. 이로부터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첫째, 미국은, 그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방대한 병력을 보유한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없다. 미국은 이 투쟁에서 (戰線을) 지나치게 넓히게 될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가까운 장래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제3차 세계대전은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지만 연기될 것이고, 이는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줄 것이며, 더구나 미국과 중국의 투쟁이 極東의 全지역을 革命化할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모든 것들이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를 유리하게 만들지 않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다. 귀하도 이해하겠지만, 소련이 안보리에 참여할 것이냐 아니냐는 피상적으로 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는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하여 우리는 “민주진영은 안보리에 불참해선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참여할 것인가 불참할 것인가는 당시 상황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다. 국제 환경에 따라서 우리는 또 다시 안보리에 불참할 수도, 復歸(복귀)할 수도 있다.
왜 우리가 지금 안보리에 복귀하였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돌아간 것은, 미국 정부의 침략적 정책을 폭로하고, 그들이 안보리의 깃발을 이용하여 침략성을 은폐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미국이 한국에 침략적으로 개입하였으므로 안보리에 참여하여 이를 폭로하기가 매우 쉬워진 것이다. 이는 너무나 명백하므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事案(사안)이라고 생각한다. 필리포프(스탈린)>



이 電文에서 드러난 스탈린의 한국전 계획은 <미국이 ‘프리 핸드’를 갖고 어리석은 짓(편집자 注: 한국 파병)을 마음대로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중국을 끌어들>이고, 그렇게 되면 <미국은 방대한 병력을 보유한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미국은 가까운 장래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제3차 세계대전은 연기될 것이고, 이는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줄 것이며, 더구나 미국과 중국의 투쟁이 極東의 全지역을 革命化할 것이며, 이런 모든 것들이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를 유리하게 만들 것이다>로 요약된다. 즉 김일성의 南侵은 스탈린이 미군과 중국군을 한반도에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김일성은 외세를 빌어 同族을 치려다가 외세, 즉 스탈린에게 이용되어 수백 만 명을 희생시키고도 목적(한반도 공산화)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세기 교수는 모택동이 전쟁중에 스탈린에 종속되어 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스탈린의 참전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마오쩌둥은 미국과의 전쟁이 가져올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소련은 중국이 줄기차게 요구한 공군지원을 거부, 중국군은 공중지원 없이 주로 야밤에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전쟁 기간 중 증국 인민지원군의 사상자는 총 39만 여명에 달했다.
1951년 5월부터 2년 동안 지루한 줄다리기와 공방을 계속한 휴전협상에서도 소련의 태도는 확고했다. 당초 스탈린은 중국의 휴전제의를 미국에 대한 굴복으로 비화시키며 반대했다. 휴전협상 과정에서는 중국과 북한이 회담에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부추기면서 협상의 지연을 추구했다. 중국과 북한의 협상 조기 종결 희망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전쟁과 협상을 계속하게 해 미국과 중국의 적대감을 강화시키고, 가능한 한 美中 양국의 힘을 소진시키려 한 것이다.>


유엔군이 관리하는 반공포로의 처리문제를 놓고 대립, 2년을 끌던 휴전협상은 스탈린이 죽자 급진전, 넉 달 만에 휴전에 이르게 된다. 한국전이 스탈린이 기획하고 관리한 전쟁이었다는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은 소련에 보다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우선 소련은 신생 중국을 미국과 싸우도록 해 한국전쟁은 물론 전후 20여 년 동안 美中 양국이 서로 적대관계가 되도록 했다. 중국은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낙인찍힘으로써 미국 등 서방과의 접촉이 차단되고, 더욱더 親蘇(친소)적인 방향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중국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저지하려는 스탈린의 주요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었다.
한편, 중국이 달갑지 않은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고 나서 추구했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다. 1차적인 목표는 물론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의 전략요충인 북한 지역과 만주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2차적인 목표는 이른바 ‘만주 작전’을 통해 소련의 지원 하에 만주의 독립 왕국화를 추구했던 친소파 가오강(高崗, 고강) 일파를 분쇄, 만주를 소련의 지배로부터 되찾는 것이었다. 중국도 또한 그들이 의도한 두 가지 큰 목적을 달성했다.>

2000년 6월25일 韓國戰 발발 50주년 기념식이 워싱턴에서 열렸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특히 다음 대목이 韓國戰의 세계사적 의미를 잘 정리해주었다. 그날 서울 기념식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의 눈치를 봐가면서 6.25 南侵의 의미를 애써 축소시켰지만 클린턴은 당당하였다.
"砲聲이 멈추었을 때 상당수 사람들은 한국에 간 우리 군대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한 일이 무엇인가라고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38도선에서 시작되어 38도선에서 끝났으니까요.
나는 오늘 감히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역사라는 긴 렌즈를 통하여 뒤돌아보면, 미국이 한국에서 버티어낸 덕분에 冷戰에서 우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물러나지 않았으므로 소련은 미국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기꺼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가르침을 얻게 된 것입니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터키 및 호주 등 우방국들이 그러한 사명감과 확신을 보여주지 못하였더라면, 트루먼 대통령이 걱정하였던 대로 우리는 제3차 세계대전을 불렀을 것입니다. 50년 전 한국의 稜線(능선)을 지켜낸 용감한 병사들 덕분에 10년 전 멋지고 행복한 젊은이들이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가 (공산권의 붕괴를) 自祝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역사를 과대 해석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굳건히 버티어내었기에 아까 한국 대사가 말씀하셨던 대로 한국은 지금 세계 제12위의 경제大國으로서 자유롭고 번영하는 나라, 세계사의 가장 유명한 성공 스토리의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한반도에는 여전이 긴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스스로 불러들인 고립 속에서 주민들은 혹독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50년 전에 하였던 일들을 하지 않았더라면, 미국과 동맹국들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함께 굳게 서지 않았더라면 한국 또한 북한과 많이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클린턴은 한국전이 냉전 승리의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스탈린의 대전략을 트루먼이 역이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스탈린은 美中을 떼어놓고 중국을 한동안 소련에 종속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트루먼도 가만 있지 않았다.
남침 직후 트루먼 행정부는 對蘇 봉쇄구도를 완성한다. 공산권에 대한 심리전을 시작하고, 대만 보호를 결단, 일본과 독일의 재무장을 허용하며, NATO를 군사동맹기구로 강화하고 미국의 국방비를 3년간 네 배로 증액하였다. 30년간 美蘇 군비경쟁에서 나가떨어진 것은 소련이었다. 경제력이 망가져버린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등장,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을 때는 이미 늦었다. 소련붕괴는 한국전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스탈린의 미끼로 활용된 김일성이 얻은 것은? 300만 구의 屍身?
그가 얻은 것이 있기는 하다.
첫째, 朴正熙 대통령의 등장이다. 남침이 없었더라면 남로당에 연루되어 군에서 추방되었던 박정희는 '불만 많은 민간인'으로 생애를 끝냈을 것이다. 남침 직후 군에 복귀한 그는 그 11년 뒤 한강을 넘어와 정권을 잡고 김일성과 체제경쟁을 벌여 북한을 코너로 몬다.
둘째, 韓美동맹이다. 한국전 발발 때는 한미동맹이 없었지만 휴전과정에서 이승만의 벼랑 끝 외교로 동맹조약이 맺어져 그 뒤 한국의 번영과 자유를 보장하였다.
셋째, 한국군의 성장과 대기업의 등장이다.

결국 김일성의 남침은 한국의 번영과 북한의 몰락을 가져온, 스스로 판 무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外勢의 노리개가 되어 同族을 친 어리석은 반역의 결산은 그의 손자가 하게 될 것이다.



북한 방송엔 김정은이 늙은 군 장성들에게 둘러싸여 거들먹거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를 본 한 기업인은 이렇게 평했다.
“늙은 군인들이 애숭이 독재자를 부추겨놓고 자신들은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추한 모습이다.”
북한 사정에 밝은 국군 지휘부의 한 고위 인사는 “그 기업인의 말이 핵심을 찌르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북한 권력층 안에 노선 투쟁 비슷한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듯합니다. 김정은이 실권을 잡은 뒤 군이 관리하던 외화벌이 사업권을 내각으로 가져간 것이 기폭제가 되었어요. 돈줄을 잃게 된 군대가 반발하였고 군부 實勢였던 이영호가 장성택(김정은의 고모부)에 의하여 숙청되었습니다. 장성택은 작년에 중국을 방문,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성과가 없자 군 지휘부는 장성택 식 실용노선을 반대하면서 김정은을 자기들 편으로 끌고 간 듯합니다. 이들은 긴장을 조성해야 외부로부터 도움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작년부터 북한군의 훈련이 놀라울 정도로 강화되었습니다. 실탄 사격량이 3~4배로 늘고, 비행훈련도 엄청 많아졌습니다. 기름, 탄약 재고량이 바닥 날 터인데도 저런 무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위기를 만들면 주변 국가들이 달래려 나올 것이고 그때 많은 원조를 받는다는 계산을 한 것 같습니다. 투자에 대한 회수이지요.
문제는 중국까지도 김정은의 행태에 짜증을 낸다는 사실입니다. 주변국들이 김정은을 달래기 위하여 식량 원조를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 판명되면 이번엔 장성택 쪽의 반격이 시작될 겁니다. ‘강경 노선으로 얻은 게 무엇인가, 손해만 보았지 않은가’라고 말하면서 군 강경파를 몰아세울 때 권력층 안에서 티각태각하다가 돌발 사건이 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김정은과 군부가 일으킨 이번의 核위기를 결산하게 될 때 ‘손해만 보았구나’로 결론이 나면 김정일과 군부의 권위가 약해질 것입니다.”
그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2008년 여름 이후 북한정권의 행태는 합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질서가 없다고 했다. 이는 김정은의 무능을 보여준다. 문제는 군대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김정은이가 언젠가는 질주를 멈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등에서 내릴 때 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다. 路線투쟁이 권력투쟁으로 악화되면 10.26 사건 같은 것도 가능하다. 모순과 갈등의 정도가 심해지면 대폭발의 임계점에 가까이 가게 된다. 이 인사는 “북한정권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것은 예외이다. 역사에서 예외는 영원할 수가 없다. 드디어 망조가 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고도 했다.
북한정권의 지배층 인사들의 아들들이 어디서 일하고 있는가를 조사하였더니 거의가 외화벌이 사업을 하거나 해외에 나가 있고 黨이나 군대 근무자는 몇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배층 안에서도 북한정권의 미래를 비관하고 있다는 암시이다.


이런 북한에 대한 중국의 태도도 바뀌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지도부도 한국 주도의 통일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한다. 한국의 분단은 美蘇 대결과 中蘇갈등의 유산이다. 소련의 붕괴 이후엔 美中 갈등, 특히 중국의 對北지원이 한반도 통일을 막고 있다. 북한정권의 핵무장은 통일의 장애물이다. 한반도의 자유통일은 北核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달성될 것이다.
한국은 자유통일의 주역을 맡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려면 북핵해결 및 통일작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통일된 한반도에서 한미동맹은 유지하되 휴전선 이북으로 미군을 배치하지 않는다든지, 북한지역을 동북아의 자유무역지대로 개방하겠다고 천명하는 등 창조적 설득 방안을 연구할 때이다.
신라가 당과 동맹하여 삼국을 통일한 이후 중국의 漢族 정권과 한반도의 역대 왕조는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한족정권은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었고, 한반도의 역대 왕조는 중국에 사대하였다. 중국의 韓族정권이 이 전통을 깨고 무력침공한 것은 1950년 중공군 개입이 처음이었다. 통일된 한반도는 자유롭고, 번영하고, 강력해야 동북아 평화의 안전판이 될 수 있다. 韓民族은 침략전쟁을 한 적이 없다. 이 역사적 사실이 통일과정에서 주변국을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다.



1. 萬惡의 根源은 공산주의
-공산주의는 人命과 진실을 부정하는 논리를 가진 絶對惡이다.
-레닌, 스탈린, 김일성, 그리고 人權탄압은 공산주의 논리의 필연적 결과이다.
-공산주의는 이론도 학문도 아니고, 권력을 잡기 위한 도구이다.
-권력으로서의 공산주의를 없애버려야 人權문제와 核문제가 해결된다.
-북한인권 운동은 북한 공산당 제거 운동이라야 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공산집단을 惡과 敵으로 규정한다
-헌법 1, 3, 4, 10조는 북한 정권을, 인간의 불가침적 기본권을 위협하고 대한민국 영토를 불법 점거한 반란 집단으로 규정, 반드시 해체해야 할 대상으로 지정하였다. 해체의 방법은 ‘평화적 자유통일’이다.

3. 冷戰 승리의 교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는 공산주의를 공존이 불가능한 惡, 敵, 위협으로 보았다.
-武力을 방패로, 인권을 槍으로 삼았다.
-무력으로 敵의 침략을 저지하는 사이에 인권(자유, 평등, 복지, 진실)의 가치를 敵陣으로 들여보내 주민들의 생각을 바꾸고 지배층의 내분을 조장, 내부 붕괴를 촉진하였다.

4. 한반도의 특수성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一民族 一國家’의 전통을 이어가는 한반도의 남북대결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란 특성을 지녔다.
-따라서 북한정권과 從北세력을, 反문명-反인권-反민주세력일 뿐 아니라 민족반역세력으로 규정해야 한다.

5. 北核과 從北
-북한인권 문제를 지속시키는 根源이자, 북한정권의 존립과 위협을 뒷받침하는 핵무기와 從北세력을 無力化시켜야 한다. 한국이 갖지 못한 北의 전략무기와 정치무기를 해체하는 길이 북한 정권 붕괴 전략이다.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하는 테러집단이 핵미사일을 實戰배치, 한국과 일본 및 미국을 위협하는 상황은 가장 큰 인권침해로서 이를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 한국은 '北의 핵미사일實戰배치'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고(쿠바에 소련 核미사일이 배치되는 것을 核전쟁을 각오하고 막은 케네디 대통령처럼), 국가생존 차원의 결단으로 이를 기어코 막아낼 것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할 필요가 있다.

6. 자유통일의 전략
-冷戰 승리의 교훈과 한반도의 특수성을 연구하여 총을 안 쏘고 북한정권을 무너뜨리는 방안을 강구한다.
-국내외 여론을 ‘反김정은’으로 돌려놓기 위한 다방면의 노력을 한다. 여론이 바뀌면 정책과 정권이 바뀐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代의 反인류적 전쟁범죄 및 대량학살을 국제법적으로 단죄하기 위한 汎지구적 운동을 전개한다. 북한정권을 히틀러, 스탈린보다 더 악질적인 인류의 公敵으로 규정한다. 특히 강제수용소의 反인류성을 폭로한다.
-북한인권 운동의 목적은 북한 공산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임을 銘心한다.
-영토문제 및 역사관 갈등이 계속되는 東北亞에서 북한정권을 소멸시키는 것은 더 큰 戰禍의 雷管을 제거하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산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 주도의 자유통일이 北核-人權문제-동북아의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하는 길임을 주변국에 설득한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