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합창하는 NGO

자유기업원(토론방)

제목 : 정부와 합창하는 NGO - [Near governmental organization]

김우룡(金寓龍) (한국외국어대 교수, 언론학)

- 언개연의 공과 -

NGO 시대

시사저널이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집단은 NGO로 밝혀졌다. NGO란 무엇인가? 사회적 압력단체, 자발적 시민그룹을 가리킨다. 글자 그대로 비정부기구(nongovernmental organization)의 줄임말이다. 비정부기구, 그러니까 정부 밖의 시민단체를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곧 제도권의 코아 그룹과는 달리 정부정책이나 정부 기구 등의 활동을 감시하고 또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 - 교육, 경제, 자연, 미디어, 상품, 성차별, 양성평등 등등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니터하고 현황파악, 개선방향 제시 등에 주력하는 민간단체나 기구를 뭉뚱그려 NGO라고 부르고 있다.

나는 어느 사석에서 한 저명한 행정학자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연히 NGO의 역할과 문제점에 관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데, 오랜시간이 지났어도 그 대화를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NGO란 Near governmental organization(친정부 기구)의 약자가 아닙니까?”
“모르는 소리 마세요. NGO는 Nice governmental organization(핵심정부기구)의 약자라고 해야
지요.”

이건 반우스개 소리였지만, 단순히 조크라고 하기에는 의미심장한 뜻을 함축하고 있는 듯싶다. 설마 모든 시민단체가 친정부적이든가 정부의 외곽단체 노릇을 하고 있을리야 없겠지만 현 우리나라 NGO의 한 측면을 잘 말해주는 듯싶어서 그 여운은 아직까지 씁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GO가 정부의 독주독단을 견제하고 환경파괴와 난개발을 막고 인권을 신장시키고 공권력의 남용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해 왔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언론관련 모니터 그룹은 정보의 질을 향상시키고 선정성과 폭력성을 텔레비전 화면에서 추방하는데도 앞장서 왔다. 사실 비정부, 비영리 시민단체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고 있다.

“제3의 정부(the third-party government)”라는 말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NGO는 시민운동의 한 복판에 우뚝 서서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 뿐만아니라 소외의 극복, 참여의 증대, 개인 잠재력의 개발, 타인에 대한 고려 등 인간공동체를 형성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이는 어느 전문가의 NGO에 대한 평가이다. 예컨대 미국 소비자 운동은 랠프 네이더의 자동차 결함 고발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어린이 텔레비전에서 광고를 추방한 것은 보스턴에 본부를 둔 어린이 텔레비전 연대(ACT)였다.

특히 TV모니터 그룹은 세갈래로 발전돼 왔다. 첫째는 여성단체이다. 둘째는 종교집단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문제제기가 돼 왔다. 셋째는 소수인종 그룹이 미디어 워치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들은 인종차별, 부정확한 보도 그리고 취업의 불평등 따위에 관심을 기울인다.

「언개연」이란 무엇인가?

언개연은 ‘연론개혁시민연대’의 약칭이다. 1998년 8월 27일 33개 시민단체와 개인 350여명이 모여 창립한 시민단체이다. 현재는 참여단체가 44개로 늘어났으며 이들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언론 개혁을 바라는 우리사회 각계각층의 자발적인 참여로 왜곡된 언론을 바로잡고, 한국언론의 발전을 위한 정책과 대안을 제시하며, 실천적인 시민행동을 통하여 바람직한 언론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들은 우리 언론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왜 이들은 언론개혁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일까? 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보자.

“외국언론의 외환위기 경고에도 뒷짐만지고 있다가 IMF 사태를 불러온 한국언론, 민주적이고 건전한 여론형성보다 사주와 광고주의 이해만을 쫓는 언론, 공정하고 객관적인 보도를 외면하고 권력과 자본의 눈치만 살피는 언론, 자신들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는 비겁한 언론, 구독강요와 광고강요 등 독자와 시청자를 우습게 보는 언론”, 이런 것들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소임을 맡겠다고 스스로 출범한 것이 언개연이다.

언개연이 내세우는 사업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방송법 및 정기간행물 등록에 관한 법률 개정에 힘쓴다는 것이다. 특히 신문법 개정에 특별히 힘쓰고 있는데 여론독과점을 규제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신문불공정거래 신고센터를 운영하는 등 언론관련 법, 제도를 고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른바 ‘언론법제 개선운동’이다.

둘째, 미디어 교육과정을 초중고 정규교과과정에 편입시키도록 촉구한다. 또 공정보도를 감시하는 활동을 전개, 매체 수용자들이 언론 소비자로서 주권을 확립토록 돕는다. 이름하여 ‘미디어수용자운동’이다.

셋째, 일반 시민의 목소리를 그대로 방송할 방송접근권의 확립, 국민이 주인되는 방송을 세우기 위한 국민주방송을 추진하는 등 세가지 과제를 중심축으로 사업을 전개해 왔다. 이를 ‘대안매체운동’이라고 이름하고 있다.

한마디로 언개연은 우리 신문 방송의 환경개선을 위해서 법제도를 고치는데 힘쓰고 국민 미디어 교육을 통해서 올바른 정보소비자를 육성하며 국민이 주인되는 ‘민중의 매체’를 만들어 보고자 뭉친 시민단체의 연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

NGO 무엇을 해왔나

우리사회 조직은 개인과 공공조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가운데 정부와 기업 기타 공공 조직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를 제외한 자발적 비영리, 비정부적 결합체가 적지 않다. 비영리단체, 비정부기구 등 제3영역에 속하는 시민그룹이 그것이다. 물론 엄격하게 비영리기구, 비정부기구 그리고 사회복지단체나 종교단체 기타 봉사집단이 엄격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정부나 사회 공적 기구를 감시 견제하고 또 그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해 주기 위해서 NGO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정부는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제약으로 스스로 담당하기 어렵든가 또 할 수 없는 일정 분야를 민간기구에 위임하므로써 공공서비스를 확충하게 된다. 이런 추세에 발맞추어 NGO는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정부는 다수결 원칙에 입각해서 ‘획일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키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민주정부의 대국민 서비스는 공평하고 일치되고 전국적으로 보편적이어햐 하지만 이를 실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복지국가일 수록 NGO의 역할이 빛나게 된다.

또한 NGO는 국가권력을 견제하는데 큰 힘을 발휘해 왔다. 자칫 국가권력은 민권을 억압하고 독점적으로 불평등을 야기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등 숱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권력의 남용을 막는데 NGO는 기여한다.

미국의 경우 노예폐지운동, 여성해방운동, 민권운동,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등 대부분의 시민권리 보호가 NGO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짧은 기간이나마 언개연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그것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언론개혁’이라고 하는 매우 전문적 화두를 국민적 관심사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하였다.

둘째, 신문 방송의 종사자로 하여금 투명경영, 공정보도를 촉구하고 정보의 질 향상에 힘쓰도록
큰 압력을 행사해왔다.

셋째, 정부와 관련기구로 하여금 언론 개혁에 관심을 쏟도록 다양한 활동을 벌여왔다.

이와 같은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언론관련 시민운동단체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적지 않다. 시민단체가 과연 시민의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논란이 되고 있다.

정부 대변인 같다

원칙적으로 시민그룹의 감시대상은 정부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독단 독선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데 시민단체의 존재 의의가 있을 것이다. 물론 언론 관련 사회적 압력단체는 방송사나 신문사를 감시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성차별적 보도, 지나친 폭력 그리고 선정적 내용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뿐 아니라 어린이의 상업적 이용이나 여성의 균등한 입사 기회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시민의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시민단체들은 위협받는 언론자유의 신장에 힘쓰지 않고 특정 신문 죽이기에 주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시민단체의 목소리는 노조, 정부, 여당 그리고 친여매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아이러닉하게도 참여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곧 미디어를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고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을 구사해 왔다. 온라인 매체와 오프라인, 신문과 방송, 그리고 신문의 경우에도 메이저와 마이너로 나누어 ‘내편 네편’ 2분법적 논리로 상대방을 공격해왔다.

이들의 타겟은 언제나 조중동이었다. 첫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두고서는 항상 악의적인 나쁜 이름으로 부르기를 좋아한다. 예컨대 <족벌언론>, <수구언론>, <친일언론>이 그것이다.

신문이 공론형성에 기여하고 뉴스라고 하는 문화적 상품을 팔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방송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방송은 국민의 재산인 ‘공공재’ 전파를 이용한다. 따라서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야하고 공공성, 공익성을 위해서 내용 규제를 받는다. 이에 반해 신문은 근본적으로 사기업일뿐 아니라 누구나 잉크와 종이만 있으면 발행할 수 있다. 곧 등록제인 것이다. 이 신문을 문중이 운영하든 개인이 운영하든 소유와 경영이 일치하든 정부나 법이 간여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정부와 언개연은 특정인의 소유지분을 규제해야 한다느니 혹은 시장 점유율을 제한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한걸음 더 나아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편집권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오너일가가 편집을 좌지우지 하고 있는가? 아니면 경영진은 편집에 관여하면 절대로 안되는가? 그렇다면 편집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신문사에서 경영의 핵심은 편집이다. 다만 사장이 모든 것을 다할 수 없으니 편집이사나 편집국장 등에게 일부 또는 전부를 위임하는 것이다. 또 반드시 오너는 편집에서 손떼야 한다는 논리는 오너는 <악>이고 기자는 <선>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시장점유율 문제도 그렇다. 여론시장의 독과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왜 3개 신문만 많이 팔리느냐고 시비다. 잘 만드니까 팔리는게 아닌가. 정보의 질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사상의 자유시장 원리”(a free marketplace of ideas)는 누구도 거역하지 못한다. 신문사도 망할 수 있을 때 나라가 바로 선다. 세계 주요도시를 보라. 여론을 주도하는 일간지는 2개 아니면 3개이다. 우리나라는 거꾸로 일간지가 너무 많이 나오고 있는 게 문제일 뿐이다.

시민단체가 출세의 발판인가

나는 운동은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은 운동으로 끝나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첫째, 시민단체 인사가 감시자 역할을 저버리고 감시의 대상이 되는 기구와 조직의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예가 너무 많다.

보라. 정부의 각종 자문기구나 위원회에는 시민단체 출신들이 ‘약방의 감초’격으로 끼여 있다. 물론 반론이 있을 것이다. 대안을 갖고 있고 경륜도 갖추었으니 전문적 조언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또 그 속에 들어감으로 고급 정보를 접하게 되고 또 그들을 밀착감시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한낱 변명일 뿐, 온당치 못한 일이다. 이해 충돌의 문제가 발생한다. KBS의 편성, 보도의 워치타워 역할을 해야 할 파수꾼이 그 시청자위원으로 참여한다면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KBS의 편성과 보도에 문제가 있다면 자문을 해온 시민그룹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견제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이런 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모든 자문기구, 위원회 심지어 사외이사에도 NGO 출신이 포진하고 있다. 사실 시민 단체의 의견이나 권고는 문서로 얼마든지 제출할 수 있고 공청회 등에 나와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시민운동 출신들은 아예 ‘좋은 자리’로 옮겨 앉는 사례가 적지 않다. 특히 언론 관련NGO에 이런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몇가지 사례를 보자. 방송위원, 심의위원, 시청자위원, 사외이사, 재단이사, 이사장 등 ‘단골손님’이 되었다. 결국 시민단체는 감시자 역할보다는 정부와 코드를 맞추어 입신의 “뜀틀”로 이용되고 있지 않나 의구심이 자아낸다.

정부돈 받아도 좋은가

이외에도 심각한 사태가 하나 더 있다. 곧 보조금 문제이다.

NGO는 정부를 감시, 견제 하지만 공공서비스를 생산하고 정부정책의 유지, 발전에 대한 주요 언론 관련 요직의 지지 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정부로부터 일부 지원금을 받는 일 자체를 크게 비판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은 그 역사가 짧아서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대단히 부족하다. 이 때문에 시민없는 시민그룹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돈을 주는 대상이 시민단체의 건전한 육성보다는 ‘입막음’의 성격이 짙다는데 있다. 사회학 교과서에는 사회교환이론(social exchange theory) 이라는 게 있다. 주면 받게 된다는 것이다. 또는 끄나풀없는 돈이 어디 있느냐는 의미를 함축한다. 사람은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신세를 갚게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프로젝트’란 이름하에 정부로부터 돈을 받게 되면 정부의 눈치를 보게 되고 또 정부의 입김이 작용하게 되고 심하면 정부의 심부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오죽 했으면 “시민단체에 411억… 아낌없이 퍼주는 혈세(血稅)”이런 신문표제가 나왔겠는가.

사실 김대중 정부시절부터 시민단체를 적극 육성해왔다. 그것은 이들 단체에 국민세금을 지원하고 이들을 대폭 참여시키므로써 이들의 활동 영역을 넓히고 영향력을 확대시켜온 느낌이다.

문제는 정부, 지방정부 그리고 감시대상의 기관으로부터 큰 돈을 받고 있으면서 과연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있을까. 모름지기 국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생간다는 점이다.

시민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돼야 한다. 시민그룹을 친정부적이라거나 정부의 외곽조직이 아니냐는 일부 국민들의 의혹을 씻기 위해서는 1) 권력 또는 감시대상 기관과 등거리를 유지해야한다. 2) 또한 재정 자립을 꾀해야 한다. 개인 회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고 정부가 아닌 공익재단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도록 해야 한다. 3) 끝으로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자리를 넘보든가 영달을 꾀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시민운동이 뜀틀운동이 되지 않도록 운동가들의 윤리의식의 강화가 시급하다.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일부 시민단체는 참으로 ‘반시민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김우룡(金寓龍) (한국외국어대 교수, 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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