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巖會 회원 임동원, 北가족 만난 뒤 돌변

1990년 이후 임 前 원장은 일관되게 親北행태를 보여 왔다.
기사본문 이미지
1999년 12월24일 <동아일보> 캡쳐


제1차 남북정상회담(김대중-김정일 회담)을 수행했던 ‘특별수행원’ 24명은 방북 당시 숙소였던 ‘주암산 초대소’의 이름을 따 ‘주암회(酒巖會)’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주암회’ 회원으로는 모임의 회장인 최학래 前 <한겨레신문> 사장을 비롯,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고은(詩人), 박지원 민주당 의원, 박재규 前 통일부 장관, 이해찬 민주당 前 대표, 이종석 前 통일부 장관, 임동원 前 국정원장, 문정인 연대 정외과 교수 등의 인사들이 있다.

이들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2004년 까지 5~6차례 걸쳐 만나 식사를 하는 등 모임을 가졌다. 2002년 북한 경제시찰단과 2004년 6월 6.15공동선언 4주년 기념 국제토론회 참석차 방문한 북한의 리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일행과 만찬을 갖기도 했다. 아태평화위는 북한의 통일전선부 산하조직으로 외형상 非정부기구의 형태를 띤 채, 對南당국-민간협상을 전담하는 북한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주암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이해찬 민주당 前 대표는 2013년 대선에서 야권연대를 주도했던 左派원로 활동자들의 모임인 ‘희망2012 승리 2012 원탁회의’(원탁회의) 참여인사로 활동했다. 이종석 前 장관과 문정인 연대 교수는 문재인 민주당 前 대선후보 캠프 내 ‘남북경제인연합회’(연합회) 위원이며, 임동원 前 국정원장은 연합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기사본문 이미지
1990년 10월23일자 <한겨레신문> 캡쳐


이들 중 임동원 前 국정원장의 경우도 문재인 前 후보처럼 북한에 가족이 있는 케이스다.

그는 평안북도 위원군 출생으로 위원초등학교와 선천중-신성고를 졸업한 뒤 6.25전쟁이 터지자 1.4 후퇴 때 단신으로 월남(越南)했다. 임 前 원장은 1990년 10월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로 평양을 갔을 때 누이동생을 만났다. 이후 그는 자신의 회고록 ‘피스메이커’(2008년 출간)에서 북한의 가족들에 대해 아래와 같은 내용을 남기기도 했다.

《여동생 동연이와 남동생 동진이임을 확인한 나는 마침내 서로 그러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울고 난 후, 어머님과 아버님이 모두 전쟁 때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전해 듣게 되자 도무지 눈물의 바다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이날 밤 나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밤새 울었다.(198페이지)》

1990년 이후 임 前 원장은 일관되게 親北행태를 보여 왔다.

1993년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 1993년 통일정책평가위원, 1994년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을 맡다가, 軍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對北상호주의’를 주장했던 것이 김대중의 눈에 띄어, 1995년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어 ‘햇볕정책’을 연구했다.

기사본문 이미지
6.15선언 5주년 기념행사에 정부대표단으로 참석한 임동원 前 국정원장이 김정일과
건배하고 있는 모습/통일부


이후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정부개편위원회 심의위 위원(1998년)을 거쳐 1998년 2월25일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차관급)에 임명됐다. 이어 1998년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장을 겸임했으며, 통일부장관(2001년 3월30일~2001년 9월3일)을 지냈다.

임 前 원장은 김대중 정권에서 외교안보수석, 통일부장관, 국정원장, 외교안보통일 특보 등을 거치면서 김대중의 트레이드마크인 ‘햇볕정책’을 입안-집행한 장본인이다. 김대중과 임동원, 둘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 없었다면 ‘햇볕정책’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정리/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