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착륙사고를 낸 아시아나 항공 214편 보잉 777 여객기 機長이 비행기가 멈춘 후 90초가 지날 때까지 탑승객들에게 탈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가 오늘 밝혔다. 데보라 허스먼 NTSB 위원장은 機長이 충돌 직후
"탈출할까요"라고 묻는 승무원들에게 대피 절차를 시작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그 직후 한 승무원이 機體에 불이 붙은 것을 확인하고 조종실에 다시 알리자 탈출이 시작됐다고 허스만 위원장은 설명하였다.
허스먼 위원장은 "조종사들이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례들을 봐도 탑승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킬 차량들이 도착할 때까지 탈출 작전을 시작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機長들은 비행기 앞 쪽에 있어 승무원들로부터 보고를 받을 때까지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와 관련해 더 조사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각자 갖고 있는 관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들(기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정보와 절차를 갖고 있는지, 그 절차를 준수했는지, 또 탈출이 제시간에 진행됐는지 지나고 나면 분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救難차량은 사고 후 약 2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으며 그로부터 1분 뒤 불을 끄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비상 탈출용 슬라이드 두 개가 機內에서 안쪽으로 펼쳐졌는데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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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중 기사(퍼가지 마세요)
<중앙일보>에 고정 칼럼을 쓰는 송호근 서울대 교수가 지난 7월30일자에 ‘종전(終戰)은 아직 멀기만 한데’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잡지 편집장 때처럼 矯正(교정)을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교정의 기준은 문장과 논리성이다.
*본문: <인류의 평화로운 삶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위협요인은 지진과 전쟁이다. 지진은 자연재해, 전쟁은 인재(人災)다. 첨단과학 문명도 속수무책인 것이 지진이고, 전쟁과 전쟁의 파괴력은 문명수준과 비례해서 더욱 커졌다.>
이 부분은 줄일 수 있겠다. ‘여름엔 덥다’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것처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당연한 내용이다. ‘지진은 자연재해이고 전쟁은 인재’임은 <중앙일보> 독자이면 다 안다. ‘뻔한 사실'을 굳이 설명하면 꼭 써야 할 내용을 희생시켜야 한다. 모든 글은 경제적으로 써야 한다. 신문 紙面(지면)은 무한정하지 않다.
*본문: <두 개가 중첩된 중동의 몇몇 국가들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다. 한국과 일본은 이 두 가지를 하나씩 나눠 가진 나라다. 환태평양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하는 ‘지진단층선’ 위에 길게 가로누워 있는 게 일본열도라면, 한국은 4대 강국이 치열한 화염을 뿜어내는 ‘전쟁발생선’ 위에 단짝 앉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치명적 실수였다. 지진에 전쟁을 스스로 겹쳐 놓았으니까 말이다.>
이 부분도 줄이고, 그래서 새로 생긴 지면을 다른 내용으로 채우는 게 어떨까? 객관적 사실의 나열일 뿐 새로운 視覺(시각)이나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칼럼은 '나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다.
*본문: <이런 숙명에 우리는 얼마나 유념하고 있나? 한국의 근대는 전쟁과 함께 문을 열었다. 열강들이 탐욕을 불태웠던 가장 멀고 치열했던 전선이 한반도였다. 1885년 영국이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려 거문도를 점령했다. 일촉즉발의 위기는 청(淸)의 중재로 다행히 진정됐다. 이번엔 한반도 주도권을 놓고 청과 일본이 맞붙었다. 평양과 아산 부근엔 청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러일전쟁(1904) 때는 압록강 하구, 아산만, 남해에서 수천 명이 수장됐다. 그 뒤 태평양전쟁에 수만 명이 징병으로 끌려갔고, 나라가 서기 무섭게 터진 6·25에 산천은 폐허가 됐다. 정전(停戰) 60년, 군사경쟁에 가세한 북한이 핵을 터트리고 미사일을 발사했다. 세계에 도대체 이런 지역이 있는가? 그래도 우리는 불발탄과 시체 위에 도시를 세웠고 경제를 가꿨다. 산천에는 아직 참전용사들의 단말마가 잡초처럼 무성한 채로 말이다.>
‘(러일전쟁 때) 남해에서 수천 명이 수장됐다’는 표현에서 '남해'를 '동해'로 바꾸는 게 어떨까? 1905년 5월 말, 일본 연합함대가 러시아 발틱함대를 요격한 水域(수역)은 대마도 근해이고 발틱함대가 궤멸된 곳은 동해이다. 일본은 ‘일본해 해전’이라고 한다. 일본해는 동해를 가리킨다. 연합함대가 진해만에서 출항하였으므로 '남해'라고 해도 틀린 건 아니지만 정확하게 표현하면 ‘동해’나 ‘대마도 근해’이다.
태평양전쟁 때 강제징병된 한국인은 수만 명이 아니라 군속을 포함하면 20~40만 명이다. 일본 후생성 보존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 피징병자(군속 군인) 43만7137명’이다. 군인만 쳐도 10만 명 이상이다. ‘나라가 서기 무섭게 터진 6·25에 산천은 폐허가 됐다’는 대목도 걸린다. 6·25는 화산처럼 터진 것이 아니고 김일성의 남침으로 일어난 人災(인재)였다. 왜 송 교수는 전쟁을 개탄하면서 전쟁을 일으킨 자를 명시하지 않는가? '6·25'가 아니라 '김일성의 6·25 남침'이라고 써야 누가 일으킨 전쟁인지를 알 수 있다. 교수나 교사가 '6·25'라고만 가르치면 학생들의 명료한 역사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본문: <지진이라는 ‘자연적 천형’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각심은 일상에 배어 있다. 지진발생 시 행동수칙 매뉴얼은 공공 지식이고 학생·시민들은 대피요령과 응급처치술을 정기적으로 익힌다. 그럼에도 지난 후쿠시마 쓰나미에 2만 명이 희생됐다. 일본 정부가 지진과 방재 연구에 투입하는 비용은 어림잡아 17조원, 주요 대학, 지방정부, 국책연구소가 ‘라이프 이노베이션’(생명혁신) 제하의 방재 대책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우선 표기 문제이다. ‘방재’는 防災(방재), ‘제하’는 題下(제하)라고 漢字를 써줘야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물론 <중앙일보>의 한글專用(전용)주의 때문에 필자의 자유는 아닐 것이다. <지진이라는 ‘자연적 천형’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각심은 일상에 배어 있다. 지진발생 시 행동수칙 매뉴얼은 공공 지식이고 학생·시민들은 대피요령과 응급처치술을 정기적으로 익힌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상식 아닐까? ‘투입하는 비용은 어림잡아 17조원’이라는데 年間(연간) 비용인지의 여부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본문: <그렇다면 전쟁발생선 위에 놓인 한국은 ‘근대문명의 천형’인 전쟁에 어느 정도 관심을 쏟을까? 일본엔 세계적 지진연구소가 즐비한데, 한국엔 그럴듯한 전쟁·평화연구소는 들어 보지 못했다. 서울대 평화연구소가 유일할 거다. 정전(停戰)을 종전(終戰)으로, 무력대치를 평화공존으로 전환시키는 그 ‘문명혁신’을 최고의 원칙으로 놓는다면, 대북정책에서 격·자존심·조건을 두고 벌이는 싸움은 소인배 난투극이다.>
<‘근대문명의 천형’인 전쟁>이란 표현이 적절한가? 근대문명만이 ‘天刑(천형)’처럼 전쟁을 부르는가? 과학 기술의 발달로 파괴와 殺傷(살상)의 규모가 커진 점은 맞지만 근대문명 전에는 전쟁이 더 많았다. 몽골군의 西征(서정)이나 1618~1648년 사이 독일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종교전쟁은 세계대전 못지않게 참혹하였다. 송 교수는, 전쟁과 문명을 무리하게 결부시킨다. 송 교수는 일본이 지진에 관심을 쏟는 것보다 한국은 전쟁에 대한 관심이 약하다고 말하고 싶은 듯한데 비교가 잘못되었다. 한국의 GDP 당 국방비 지출은 일본의 2.6배 정도이다. 그만큼 전쟁 억지에 관심이 많다는 증거이다. 송 교수는 ‘그럴듯한 전쟁·평화연구소’가 없다(이 視覺도 문제)는 점을 들어 한국이 전쟁에 관심이 약한 것처럼 주장하는데 연구소가 많다고 평화가 유지되는 게 아니라 국방에 돈을 많이 써야 유지된다.
<정전(停戰)을 종전(終戰)으로, 무력대치를 평화공존으로 전환시키는 ‘문명혁신’>이란 대원칙을 위하여 對北(대북)정책에서 ‘격·자존심·조건’을 따지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놀라운 비약이다. 이 주장을 하기 위하여 앞에서 전쟁 이야기를 길게 쓴 듯하다. 이 주장은 이 칼럼의 본문인 셈이다. 송 교수의 논거는 평화지상론인데, 이는 남북간 평화공존을 위하여는 한국이 일방적으로 무장해제해야 한다는 주장으로도 뛸 수 있는 위험한 一般化(일반화)이다. 戰犯(전범)집단인 북한을 상대로, '정전(停戰)을 종전(終戰)으로, 무력대치를 평화공존으로 전환시키'려면 정상국가에 대하여서보다 더욱 ‘격·자존심·조건’을 따져서 버릇을 고쳐놓아야 한다. 그런 행위, 즉 국제규범이나 국가의 원칙을 수호하려는 행위는 송 교수의 눈에는 ‘소인배 난투극’으로 보인다. 북한정권의 국장급이 대한민국의 장관을 상대하겠다고 나오는데도, 개성공단에서 수시로 한국인을 억류하는데도 격과 자존심과 조건을 버리라니? 그 결과로 많은 人命(인명)이 위험에 빠지면 이것도 문명혁신을 위한 봉사인가? 對北관계를 정상화 시키려는 朴槿惠(박근혜) 정부를 '소인배', 그런 노력을 '난투극'이라고 표현하는 건 지나치다.
*본문: <요즘 ‘대화록 실종’을 두고 백병전을 벌였던 정치권이 한심스러워 하는 말이다. 공개적으로 묻고 싶다, 대화록을 끝내 밝혀 얻는 정치적 이득은 무엇인가? ‘맞습니다 맞고요, 그런데…’로 역전시키는 고인(故人)의 화법으로 미뤄 진심 논란은 끝도 없을 터이지만, 상대를 몰살시킨들 평화공존에 한 발짝 다가간 것일까?>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의 내용에 대한 是非(시비)를 가리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시비를 가리려는 행위를 ‘상대 몰살’로 과장한다. 이 대화록에 담긴 총체적 국가반역혐의, 즉 'NLL 포기-北核(북핵) 비호-反美(반미)공조-차기 정부에 쐐기박기'를 그냥 덮고 넘어가자는 사람이 정치꾼이 아니고 학자이다. 그래야 할 이유로 또 등장한 게 또 평화공존이다. 是非를 가리는 건 평화공존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말투이다. 송 교수는 ‘평화공존’이란 공허한 명분에 안보도, 진실도, 정의도 종속시키려 한다. 위선과 거짓에 기초한 평화공존은 공동묘지의 평화일 것이다.
*본문: <남북교류의 작은 숨통인 개성공단 문제도 여태 해결하지 못한 마당에 서해북방한계선(NLL) 진실 공방이 한반도의 천형을 누그러뜨릴까? 아니다. 그것은 원한의 불씨를 살려 유효기간이 만료된 냉전효력을 연장하려는 정치권의 얄팍하고 괘씸한 정략이다.>
주어를 생략한 문장이라 확실하진 않으나 개성공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책임을 한국 측에 돌리는 뉘앙스이다. 공단을 불법적으로 폐쇄한 것은 북한이다. 서해북방한계선을 허물려 했던 노무현-김정일의 음모를 드러내고 단죄하는 것은 북한의 도발을 저지,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송 교수는 대화록의 진실을 밝히려는 행위가 원한의 불씨를 살린다고 했는데, 누구의 원한인가? 반역자들의 원한이 아닌가? ‘유효기간이 만료된 냉전효력’은 송 교수의 현실인식의 비현실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냉전 지대가 아니라 熱戰(열전) 지대이다. 유럽에서 공산체제가 무너져 냉전이 끝났다고, 그 인식 틀을 한반도에 들이대곤 ‘냉전은 끝났다’고 외친다면 한겨울에 봄이 왔다면서 외투를 벗고 나갔다가 凍傷(동상)에 걸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3대 세습, 강제수용소, 핵개발, 집단처형, 우상숭배의 凍土(동토)에 2300만 명의 인간들이 갇혀 있는데 냉전효력이 만료되었다고? 송 교수도 <정전(停戰) 60년, 군사경쟁에 가세한 북한이 핵을 터트리고 미사일을 발사했다. 세계에 도대체 이런 지역이 있는가?>라고 걱정하면서 왜 대화록 문제를 덮자는 대목에서만 냉전적 현실을 부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는지 짐작은 가지만 무리가 많다. ‘정치권’이라고 뭉뚱그려 비판하지 말고 '새누리당'이라고 摘示(적시)하는 게 정직하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는 행위를 ‘얄팍하고 괘씸한 정략’이라고 공격하는 건 노무현 세력에 불리한 진실은 덮어야 한다는 생각의 노출로 보인다.
그의 칼럼은 이렇게 끝난다.
<과거 정권처럼 전쟁의 기억을 재점화시켜 군기 잡자는 얘기가 아니다. 전운(戰雲)이 피어나는 우리의 ‘운명의 지도’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쟁의 기억이 없는 필자 자신에게, 그리고 전율의 감도가 더욱 떨어지는 자식 세대에게 환기하고 싶은 것이다. 무엇보다, 골육상잔의 원한(怨恨)을 대중적으로 동원해서 고지로 진격하는 저 한심한 정치권에 일갈하고 싶다. 정전 60년이 흘렀음에도 종전(終戰)협정을 거쳐 평화발효지대로 가는 길을 열지 못하면 정치 그만두라고!>
전쟁의 기억을 재점화시키는 것은 어느 정권이 하든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국민교육이다. 그런데 송 교수는 이를 軍紀(군기)잡기라고 폄하한다. ‘골육상잔의 원한(怨恨)을 대중적으로 동원해서 고지로 진격하는 한심한 정치권’은 남한에 없다. 북한에 있다. 김정은 정권이다. 송 교수는 칼럼에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한 번도 북한정권의 전쟁범죄 행위를 언급하지 않았다. 지식인이 한반도에서 살면서 惡(악)을 惡으로, 敵(적)을 敵으로 보지 않으면 모든 言動(언동)이 뒤틀린다. 휴전선 남쪽에선 용감하고, 김정일 앞에 서서는 작아진 노무현처럼.
眞僞(진위)분별은 善惡(선악)구분과 彼我(피아)식별을 위한 전제이다. 眞僞(진위) 분별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들이 기자이고 학자이다. 그런데 학자가 국가의 안전과 관련된 사안의 眞僞분별 노력을 '골육상잔의 원한을 동원한 한심한' 행위, ‘얄팍하고 괘씸한 정략’이라고 규탄조로 말한다. 그런 규탄이 향해야 할 곳은 북한정권과 추종세력, 그리고 거짓말쟁이들 아닌가?
송 교수의 글은 감성적(때로는 감정적) 전개이지만 이념적 가치관을 깔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6·25에 대한 북한정권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은 점,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규명 노력에 대한 분노, 정부의 엄정한 對北정책에 대한 반감, 평화라는 명분으로 국가의 안보 기능을 부정하려는 노력은 일정한 방향성을 보인다. 그 방향이 어느 쪽인지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칼럼은 순진하다. 紙面(지면) 낭비가 있지만.
아시아나 機長, 착륙 사고 후 90초 지날 때까지 탈출 못하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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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1, 1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