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다. 엄마 젖을 문 채 천자문을 떼는 아이도 있었고, 나이 열 살도 안 되어 사서오경과 주자의 참고서를 달달 외는 아이도 있었고, 공자가 학문에 뜻을 둔 나이 열 다섯에 이미 즉석에서 아무 때나 자작 한시를 척척 읊는 무서운 아이들이 삼천리 방방곡곡 없는 고을이 없었다. 그렇게 즐비한 똑똑이들이 평생 공부만 하다가 3년에 겨우 30명 정도 대과에 합격했다. 그러니 벼슬한 자들은 하나같이 얼마나 똑똑했으랴! 비록 벼슬은 못했다고 해도 똑똑이들이 삼천리 금수강산에 얼마나 쌔고 쌨으랴!
조선 중기 이후에 접어들면 그렇게 똑똑한 자들이 많았지만, 그러나, 슬기로운 이는 눈을 씻고 봐도 '천재'들의 집합소인 조정에서나 '영재'들의 집결지인 향교에서나 찾기가 퇴비 속에서 떨어져 나간 바늘귀 찾기보다 어려웠다. 왜란, 호란, 사색당쟁, 세도정치, 한말의 외세 각축 등 국가적 위난이나 지리멸렬 상황에서 냉철하게 정국을 꿰뚫고 이에 대비하고 헤쳐나갈 분은 율곡과 충무공, 다산 등 다섯 손가락으로 꼽고도 남을 정도로 슬기로운 이가 드물었다.
왜 그랬을까? 오로지 입신양명을 위해서 지혜의 원천인 생각을 멈추고 유교 경전과 성리학만을 달달 외웠기 때문이다. 암기의 천재였을 뿐, 이해와 비판, 응용과 창조에는 백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전을 달달 외는 것과 관념론적인 담론에 참여하여 거품을 무는 것에만 능했을 뿐, 현실에 대해서는 어둡기 짝이 없었다. 수령은 이방과 형방 등 실무 담당자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재상은 노복의 부축을 받지 않으면, 백성의 송사 한 건 처리하지 못했고 발걸음 한 발짝 옮기지 못했다.
식사할 때도 양옆에 책을 펼쳐 둘 정도의 독서광이었지만, 정독이 몸에 밴 세종대왕이 일찍이 이런 겉똑똑이들을 개탄한 적이 있다. (세종15년 2월 2일) 풀어서 말하면:
--책을 많이 읽었다고 자랑하는 자들이 참 많으나 그런 자일수록 막상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하는 걸 못 보았다. 옛날 한(漢)에는 서경 박사, 시경 박사 등 한 경전을 평생 읽는 전문가들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우리 조선에서는 사서오경, 백가제사(百家諸史)에 두루 능통하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다니는 자들이 이리 많은가? 한 권을 읽어도 제대로 읽도록 하라.
세종대왕은 그 때 당시에 이미 과거 제도의 폐해를 알고 재주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특별히 책을 무진장 공급해 주면서 사가(賜暇)라고 하여 특별 휴가를 주고 깊은 산골에서 마음껏 독서하고 깊이 사색하게 했다. 세종 때는 과거 시험 문제[策問]도 기가 막히게 잘 냈다. 중국의 경전만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 거기에 더하여 우리나라의 역사, 제도, 문물도 두루 꿰고 평소에 미리 깊은 생각을 해서 이를 체계화하여 그 누구를 상대로 해서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혀 흥분하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히 토론할 수 있는 자만이,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슬기로운 사람만이 답할 수 있는 문제를 내었다. 그래서 그 때는 모든 분야에서 인재가 줄줄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10여년 전부터 똑똑한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 중 슬기로운 이는 한 명도 없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시골 할아버지보다 환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한글을 겨우 깨친 동네 반장보다 민주주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중학교도 못 나오고 남대문 시장에서 평생 장사하는 사람보다 경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고등학교 근처에도 못 가보고 영등포 철공소에서 쇠에 대해 박사가 된 사람보다 과학기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버드 박사니, 서울법대 수석이니, 전국학력고사 수석이니, KS 마크니, 호남의 영재니, 간판은 정말 화려하다. 동서고금의 온갖 좋은 말을 척척 잘도 인용하고, 한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거침없이 평가하는 데도 도가 텄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기껏 20년 30년 전부터 떠돌던 말을, 박사 공부하거나 고시 공부하거나 취직 공부하거나 전공 공부하거나 민주 공부할 때 귀동냥했거나 뜻도 모르고 달달 왼 것들이다. 기고만장하던 대학 1학년 때에 얻어들은 '진리'들이다. 지금도 대학에 가 보면 토론이란 걸 전혀 할 줄 모르고 고함만 버럭버럭 지르고 마냥 비분강개하고 상대를 협박하고 조롱하는 지적 미숙아들(교수 포함)이 즐비한데, 옥·배·룡·태·영 이들의 말은 그들의 말과 너무도 흡사하다. 다만, 영어와 한자로 된 어휘 수가 좀 늘었고 동서고금 여러 현자들의 서책에 밑줄 쳐 가며 외운 인용문이 길어졌을 따름이다. 그러니 대학생들이나 20대 초반 이후 생각을 멈춘 자들이 이들을 보고 열광할 수밖에. 코드가 같으니까. 수준이 똑같으니까.
민주 공식, 민족 공식, 통일 공식, 평등 공식, 분배 공식, 평화 공식, 자주 공식, 개혁 공식--이것들을 곧이곧대로 달달 외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여기에 다 꿰어 맞추고, 대한민국의 역대 위정자들을 하나같이 여기에 대 보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친일파요, 독재자요, 간신배요, 배반자요, 악마요, 마녀라고 서슴없이 단죄한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다. 비판 대신 욕설, 반성 대신 저주, 건설 대신 파괴, 유머 대신 야유, 전통 대신 정통, 미래 대신 과거가 이들의 전매특허품이다.
TV 스타가 되고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어, 드디어 경륜을 펼칠 자리가 마련되자 똑똑하기만 할 뿐 슬기롭지 못하니까, 하라는 '일'은 않고 하지 말라는 '싸움'만 한다. 그렇게 각종 싸움에 승리해서 그 전적을 내세워 다음에는 기필코 대통령이 되어 보겠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자들도 있다. 세상에는 워낙 배은망덕하고 무지몽매한 자들이 많으니까, 이들에게 열렬히 박수를 치는 자들도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 일인당 GNP가 10년간 제자리를 맴돌았는데, 만약 이들 중에 대통령이 나온다면 틀림없이 거꾸로 돌아서서 북한을 급속하게 뒤따라 잡을 것이다. 거기엔 이들보다 훨씬 어리석은 자들이 대를 이어 60년간 황금빛 찬란한 왕관을 쓰고 있으니, 배울 게 참 많기도 할 것이다. 희한하게도 이들이 달달 외고 있는 공식은 대부분 거기서 나왔다. 현실은 정반대이지만.
무지 똑똑한 옥님, 배님, 룡님, 태님, 영님! 부디, 소학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으시라. 그리고 몸소 실천하시라, 하마 입에는 큰 빗장을 지르고. 대신 쥐 귀는 떼어 버리고 코끼리 귀를 달으시라.
(2004. 8. 4.)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