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선 공산주의자들이 주동한 제주도 무장반란(4.3 사건)을 설명하면서 남로당과 좌익의 역할을 일체 언급하지 않아 마치 제주도 사람들이 무장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오해하도록 기술하였다. 다른 교과서를 살펴 보니 남로당과 좌익의 개입에 대한 설몀이 있었다.
교학사 교과서는 <제주도에서는 4월3일 남로당 주도로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경찰서와 공공 기관을 습격하였다. 이때 많은 경찰과 우익 인사들이 살해당하였다.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초래되었다(제주 4·3사건)>고 썼다.
두산동아 교과서는 <단독 정부 수립 반대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제주도에서는 1948년 4월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좌익을 중심으로 한 무장 유격대는 미군 철수,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주장하며 경찰, 군인 및 우익 청년단체와 맞섰다. 제주 4·3 사건 제주도 3개 선거구 가운데 두 곳에서는 선거를 치르지 못하였다>고 썼다.
지학사 교과서는 <총선거를 앞두고 제주에서는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때 남조선 노동당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이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등 사태가 격화되었다. 정부는 병력을 투입하여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제주 주민 일부가 큰 피해를 입었다>고 썼다.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마침내 1948년 4월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과 일부 주민들은 남한 단독 선거 반대, 미군 철수 등을 요구하며 무장봉기하였다(제주 4·3사건). 무장대는 경찰 지서와 우익 단체를 공격하고, 한라산을 근거지로 삼아 저항하였다. 제주도의 무장봉기는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군인과 경찰, 우익 단체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진압 작전을 벌였다. 사건은 1954년에 와서야 마무리 될 수 있었는데, 진압과정에서 2만 5000명이 희생되는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고 썼다.
미래 엔 교과서는 <제주도의 3·1절 기념 행진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주민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다(1947.3.1). 시위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체포되자, 미군정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주도의 좌익세력은 5·10 총선거를 앞두고 단독 선거 저지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무장봉기하였다(1948.4.3). 미군정은 무력진압을 시도했지만, 3개 선거구 중 2곳에서 선거가 실시되지 못했다>고 썼다.
비상교육 교과서는 <1947년 제주도에서 3·1절 기념 대회가 열렸다. 이때 경찰의 무분별한 발포로 초등학생을 비롯한 주민 6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분노한 제주 도민은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경찰이 오히려 주민들을 탄압하자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주민들에 대한 탄압 중지와 남한만의 단독 선거 반대 등을 주장하며 무장봉기하였다. 미 군정과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앞세워 이들을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로 수많은 제주 도민이 희생되었다>고 썼다.
리베르스쿨 교과서는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는 남조선 노동당 당원들을 중심으로 5·10 총선거에 반대하는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미군정은 극우 청년들과 경찰,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다. 제주 4·3사건으로 제주도에서는 3개 선거구 가운데 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진행되지 못하였다>고 썼다.
비상교육 교과서는 <경찰이 오히려 주민들을 탄압하자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주민들에 대한 탄압 중지와 남한만의 단독 선거 반대 등을 주장하며 무장봉기하였다>고 기술, 무장반란의 책임을 경찰에 전가하고, 남로당의 무장반란 동기를 미화하였다. 
최악의 기술은 천재교육, 두번째가 비상교육 교과서이다. 모든 교과서가, 남로당의 무장반란을 , '봉기'나 '무장봉기'라고 표현했다. 이는 적절한 언어선택이 아니다. '봉기'는 정의로운 저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장반란'이 정확한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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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학사’ (305페이지)
단독 정부 수립 활동과 좌익의 방해
미소 공동 위원회가 지리멸렬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1946년 초에 이승만은 통일 정부의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순회 연설 중 정읍에서 남한 만의 정부 수립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는 소련이 통일 정부 수립을 막는다고 생각하여 반소반공의 기치를 들었다. 12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소련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켰다.
미소 공동 위원회를 둘러싸고 남한에서 좌우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반공적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하는 사이 좌익 세력은 남한을 공산화시키기 위해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위조 지폐까지 발행하였다(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 이어서 조선 공산당은 1946년 가을부터 총파업을 하였다. 1946년에는 대구 10·1사건 같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는 등 미군정과 정면 대치 상황으로 갔다.
1948년 5·10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이에 남조선 노동당이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남한에서의 단독 총선을 거부하도록 지시하면서 파업과 시위가 이어졌다. 제주도에서는 4월3일 남로당 주도로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경찰서와 공공 기관을 습격하였다. 이때 많은 경찰과 우익 인사들이 살해당하였다.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초래되었다(제주 4·3사건).
한편, 제주도의 봉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가 여수 주둔 14연대에 진압 명령을 내렸으나 14연대 내의 남로당 계 좌익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들은 여수를 장악하고 인민 재판소를 설치소를 설치하여 우익 인사들을 살해하였다. 반란은 순천 지역까지 확대되었고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여수·순천 10·19사건). 이후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계속하였다. 남한 정부의 수립을 전후하여 남로당 지도부는 월북하였다.
2. ‘두산동아’ (270페이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남한만의 총선거가 결정되자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은 이에 찬성하였고, 김구와 김규식은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였다. 좌익은 단독 정부 수립 저지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에게 통일 문제를 협의할 남북 협상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남북 협상에 동의하면서 사회단체 대표자 회의를 제안하여 남북협상이 이루어졌다.
김구와 김규식은 단독 정부 지지자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38도선을 넘었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 지도자 회의에서 두 사람은 단독 정부 수립 반대, 미·소 양군의 철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북한 지역 모두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던 단계였기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단독 정부 수립 반대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제주도에서는 1948년 4월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좌익을 중심으로 한 무장 유격대는 미군 철수,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주장하며 경찰, 군인 및 우익 청년단체와 맞섰다. 제주 4·3 사건 제주도 3개 선거구 가운데 두 곳에서는 선거를 치르지 못하였다.
1948년 8월15일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는 10월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에게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해 제주도로 출동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일부 군인들이 이 명령을 거부하면서 여수·순천 10·19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얼마가지 않아 진정 되었지만 일부 군인들은 지리산 등에 들어가 6·25전쟁 때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은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 10·19사건으로 전투원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하였다.
3. ‘지학사’ (349페이지)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다
1948년 5월10일,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감시 하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총선거를 앞두고 제주에서는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때 남조선 노동당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이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등 사태가 격화되었다. 정부는 병력을 투입하여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제주 주민 일부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충돌로 일부 선거구에서는 선거가 연기되기도 하였다(제주 4·3사건)
한편 그해 10월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 경비대 제14연대 소속 병사 중 일부가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제주도 출동 반대 등을 주장하면서 약 일주일간 여수·순천 지역을 점령하였다. 진압군에 의해 사태가 수습되자, 이들은 지리산 등에 들어가 무장 게릴라 활동을 이어갔다.
4. ‘미래엔’ (312페이지)
제주 4·3사건이 일어나다
제주도의 3·1절 기념 행진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주민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다(1947.3.1). 시위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체포되자, 미군정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주도의 좌익세력은 5·10 총선거를 앞두고 단독 선거 저지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무장봉기하였다(1948.4.3). 미군정은 무력진압을 시도했지만, 3개 선거구 중 2곳에서 선거가 실시되지 못했다.
여수·순천 10·19사건이 일어나다
제주도 좌익 무장 세력의 정항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여수에 주둔한 군부대에 제주도로 출동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부대 내의 좌익세력들은 ‘제주도 출동 반대’, ‘통일 정부 수립’ 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무장봉기하여 여수와 순천 지역을 점령하였다(여수·순천 10·19사건).
정부군은 미국 군사고문단의 협조와 화력을 지원받아 신속하게 반군을 진압하고 군 내부의 좌익세력을 색출하여 제거하는 숙군 사업을 벌였다. 제주도에도 토벌대가 파견되었으나, 제주 4·3사건은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종결되었다.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10·19사건을 진압 과정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도 일어났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다.
<사건 속으로> 제주 4·3사건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과 서청(서북 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보고서)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뒤늦게 정부는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사과와 함께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제주 4·3사건을 재조사했고, 2005년에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만들어져 여수·순천 10·19사건에 대한 조사도 진행하였다.
5. ‘금성출판사’ (369페이지)
정부수립을 둘러싼 갈등
남한 단독선거를 둘러싼 갈등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은 제주도였다. 1947년 삼일절 기념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제주도민 여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제주도민이 크게 반발하였는데, 미군정청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 단체는 오히려 강압적으로 대응하여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마침내 1948년 4월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과 일부 주민들은 남한 단독 선거 반대, 미군 철수 등을 요구하며 무장봉기하였다(제주 4·3사건). 무장대는 경찰 지서와 우익 단체를 공격하고, 한라산을 근거지로 삼아 저항하였다. 제주도의 무장봉기는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군인과 경찰, 우익 단체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진압 작전을 벌였다. 사건은 1954년에 와서야 마무리 될 수 있었는데, 진압과정에서 2만 5000명이 희생되는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한편,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0월에는 여수․순천 지역에서 군인들이 무장 봉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여수․순천 10·19사건). 당시 여수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 소속 군인들 가운데 좌익세력은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통일 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며 무장봉기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은 조속히 진압되었으나, 일부 군인들은 지리산 등으로 근거지를 옮겨 6·25전쟁 때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
<더 알아보기> 제주 4·3사건, 그리고 평화와 인권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비단 그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 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여 보다 밝은 미래를 기약하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4·3사건의 소중한 교훈을 더욱 승화시킴으로써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확산시켜야 하겠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 담화문(2003.10.31)
1980년대 후반부터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2000년에는 국회에서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2003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원수의 자격으로는 처음으로 국가 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사과하였다.
6. ‘비상교육’ (351페이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유엔에서 남한 만의 단독 선거를 결정하자 좌익 세력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단독 선거 반대 투쟁이 일어났다.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와 일부 주민이 단독 정부 수립 반대와 미군 철수르 주장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켰다(제주 4·3사건). 이로 인해 제주도 3개의 선거구 중 2개의 선거구에서 선거를 치루지 못하였고, 사건의 진압 과정에서 수만 명의 제주 도민이 희생되었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부가 여순 주둔 군대를 파견하여 제주 4·3사건의 잔여세력을 진압하려 하자, 군대 내 좌익 세력이 반발하여 여수와 순천 지역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여수․순천 10·19사건).
<제주 4·3사건>
제주 4·3사건은 1948년에 발생한 좌익 세력의 무장 봉기 이후 1954년까지 7년 여에 걸친 기간 동안 수많은 제주 도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광복 이후사회가 혼란한 가운데 1947년 제주도에서 3·1절 기념 대회가 열렸다. 이때 경찰의 무분별한 발포로 초등학생을 비롯한 주민 6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분노한 제주 도민은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경찰이 오히려 주민들을 탄압하자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주민들에 대한 탄압 중지와 남한만의 단독 선거 반대 등을 주장하며 무장봉기하였다. 미 군정과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앞세워 이들을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로 수많은 제주 도민이 희생되었다.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2003년 정부는 국가 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뤄진 점을 인정하고 제주 도민에게 공식사과 하였다.
7. ‘리베르스쿨’ (351페이지)
단독 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제주 4·3사건이 일어나다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는 남조선 노동당 당원들을 중심으로 5·10 총선거에 반대하는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미군정은 극우 청년들과 경찰,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다. 제주 4·3사건으로 제주도에서는 3개 선거구 가운데 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봉기가 계속되자 이승만 정부는 한라산에 들어가 있는 유격대를 소탕하기 위해 1948년 여수에 주둔하던 군인에게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여수 지역 부대 내의 좌익세력들이 주동이 되어 ‘제주도 출동 반대’, ‘통일 정부 수립’ 등의 구호를 내세우고 무장봉기하였다. 이 사건을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여수와 순천 지역을 점령한 뒤 인근 지역을 장악하였으나 정부의 신속한 대응으로 곧 진압되었고, 반란군은 지리산 등으로 숨어들어 빨치산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군대 내의 좌익 세력을 몰아내는 숙군 작업을 진행하였다.
<도움글> 제주 4·3사건과 진상규명
제주 4·3사건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컸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제주 4·3사건을 토벌한 토벌대는 제주도민을 疏開(소개)시킨 뒤 130여 개 마을을 불태웠다고 한다. 당시 제주도에는 169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하니 3분의 2이상이 사라진 셈이다. 당시 희생자 가운데는 공산주의자 이외에 양민들이 많이 포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제주 4·3사건은 오랫동안 진상 규명이 되지 못하였다. 이 사건은 2000년 1월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됨으로써 비로소 진상이 규명되었다. 이 법안은 제주 4·3사건을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과 서청(서북 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면서 희생자를 2만 5000~3만 명으로 추정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