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만60이 되는 해방둥이인 나는 1945년10월에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났다. 그 여섯 달 뒤 우리 가족은 부산항을 거쳐 귀국하여 고향인 경북 청송에 재정착했다. 생전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일본 항복 후 미군이 우리 가족이 살던 마을에 진주했다. 村長이 자신의 딸을 미군 부대장(그는 흑인이었다고 한다)의 情婦로 내어주고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고 마을에 유리한 조치를 얻어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 어느 누구도 그 村長을 욕하지 않았고, 村長도 자신의 딸을 이용하여 私益을 추구하지 않더란 것이다.
아버지는 1946년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괜히 돌아왔구나'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귀국자들을 에워싼 아이들이 물건을 서로 팔려고 싸우고 속이고 하는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패전후 일본사람들의 가난속의 질서를 목격했던 아버지였다. 경부선 기차를 탔더니 의자에 붙은 것들을 다 뜯겨나가고 뼈대만 남아 있더란 것이다. 아버지는 당장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아이들 교육 때문에 참았다고 말하곤 했었다.
청송에서 6. 25전쟁을 소년기에 겪은 나는 국민학교 2학년 때 가족을 따라 부산으로 옮겼다. 지난 60년의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또 많은 사람들이 남았다. 남은 사람과 떠난 사람을 비교하면 떠난 사람들이 출세하고 치부한 경우가 더 많다. 격동의 시대에 이동한 사람은 성공하고 머문 사람은 정체했다.
이동은 모험이다. 고향을 떠나는 것, 조국을 떠나는 것, 직장을 옮기는 것, 계층을 탈출하는 것, 집을 옮기는 것. 이 여러 이동에서는 결단이 필요했다. 이동을 결심한 사람은 준비를 하고 계산을 하고 정보를 모으며 친구를 만든다. 인간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이동이다. 지난 60년의 본질은 한국인이 이동의 시대를 살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지구 전체를 활동공간으로 확보했다. 반대로 북한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는 것도 외국에 가는 것처럼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정지된 공간이었고 그로 해서 한국인의 위대한 잠재력이 억압되었으며 오늘의 상황으로 귀결되었다.
1963년 고교 시절 나는 가족과 함께 사진관에 가서 여권용 사진을 찍었다. 남미의 파라과이라는 곳으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고 있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천만다행으로 이민수속은 잘 되지 않아 나는 지금 서울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그때는 그러나 대한민국을 떠난다는 희망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근대화의 불씨가 막 피어나고 있던 초입에서 한국의 그 누구도 아직은 조국의 장래를 낙관할 수 없었다.
3년4개월간의 군 복무를 끝내고 1971년 부산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한 나는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 운동노래만 들으면 기분이 나빴다. 朴대통령이 좀 고상한 주제를 들고나오지 왜 저런 저차원의 국가목표를 설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소중한 그 무엇, 예컨대 민주주의 평등 자주 자유 같은 것!
1970년대 부산은 세계로 뚫린 對外 개방형 산업화의 창구로서 활기에 차 있었다. 나는 기자의 눈으로써 이런 변화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산업화의 그늘, 철거민의 불만, 관변단체 사람들의 부정들을 주로 파헤치는 것이 기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기 朴正熙와 대한민국이 세계사적인 巨步를 내딛고 있다는 사실을 이 젊은 기자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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