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둥이의 이력서(2)


기자와 역사가 만난 것은 1979년 10월이었다. 10월16일 부산사태, 10월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 그 이틀 뒤 마산에 위수령, 그리고 10.26사건. 朴正熙가 총맞아 죽은 날, 그 화창했던 가을날, 나는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지루한 장기집권이 끝나고 새 시대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1980년 5월 나는 광주사태를 취재하러 갔다가 회사에서 해직당하고 그 몇달 뒤에는 신군부에 의해서 강제퇴직대상 언론인으로 지정됨으로써 확인사살을 당했다.
1980년은 朴대통령의 서거를 민주화의 호기로 보았던 세력과 이를 국가의 위기로 보았던 세력 사이의 대결에서 後者가 승리한 해였다. 중산층이 학생층과 야당정치인들의 행동을 과격하다고 판단하여 중립을 취하는 바람에 신군부의 집권 드라이브는 성공했다.

실직한 나는 먹고살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이동했다. 나로서는 생애 세번째의 이동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1980년대의 한국은 연평균 경제성장률 10.5%를 기록하여 세계1등이 되었다. 민주화의 열풍이 가장 거세었던 1986년과 87년에 한국의 고도경제성장은 그 절정을 구가했다. 민주화 운동의 절정과 경제성장의 절정이 한 사이클로 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나. 한국 경제의 호황과 튼튼한 안보가 민주화의 부작용을 견디어내게 했다. 1980년대 '야당+학생 對 신군부'의 구도에서 중립을 취했던 중산층은 1987년에는 학생 야당편을 들었다. 이로써 대세가 결정되었다.신군부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6.29 선언으로 대결을 모면하고 평화적이고 타협적인 한국형 민주화의 모델을 만들었다. 兩金의 분열은 盧泰愚를 대통령으로 뽑아주었고 군인 출신 대통령에 의한 민주화가 추진되었다.
月刊朝鮮은 1980년대 민주화의 열망에 부응하는 기사로써 시사종합지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月刊朝鮮은 40만 부 이상의 발행부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노점상 아줌마가 월간조선을 읽고 있는 것을 본 적도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국인의 善意가 모여서 만든 작품이었다. 이것은 국민국가 건설 과정의 찬란한 한 章을 넘기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 뒤 한국은 정신적 사회적 이념적 갈등의 시대로 접어든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드디어 경제에 부담을 주기 시작한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대로 떨어진다. 소위 역사바로세우기, 외환위기, 카드빚 사태, 친북좌파의 득세, 노사갈등, 지역갈등. 어둠과 회색이 主調인 이 시대에 월드컵 같은 반짝거림, 정보화의 전개 같은 好材도 있었으나 한국인들은 대체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북한사람들의 1990년대는 지옥圖였다.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300만의 주민들을 저승으로 보낸 북한 김정일의 단말마적 북핵 개발과 對南공작은 남한의 갈등을 부채질했다.

1980년대 한국사회에 씨가 뿌려졌던 좌익이념의 세례자들은 1990년대에는 한국사회의 불안요인이었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는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 국가건설, 국가방어, 그리고 공업화와 민주화라는 거대한 흐름속에서 생긴 그늘과 상처속에서 기생했던 친북좌익세력은 이제 대한민국의 국체변경까지 시도할 정도의 힘을 갖게 되었다.
근대화와 민주화는 그러나 민간부문의 자율성을 엄청나게 키웠다. 60년간의 국가건설과정에서 생겨난 자유민주적 시장경제적 가치관과 제도는 그 뿌리를 깊게 내렸다. 친북좌익이란 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무성한 나뭇잎은 흔들리지만 깊게 박힌 뿌리는 뽑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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