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조짐이 있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일부 동물들이 불안해 어쩔 줄 모르듯이 나라에 큰 변고가 있기 전에 몇몇 사람들은 딱 꼬집어서 뭐라고 말은 못하지만 왠지 불안해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이럴 때 지혜로운 사람이 나타나 미래의 창을 열어서 보여 주면 좋은데, 큰 변고가 생기려면 지혜로운 사람은 숨고 간사한 사람들이 설치고 다닌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제 누구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간사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도 더러 느끼는 왠지 모를 불안도 느끼지 못하니까, 희희낙락 세상의 주인공으로서 마음껏 부귀영화를 누린다.

모든 일에는 조짐이 있다. 그러나 그 조짐이 조짐인 줄은 일이 터지고 나서야 깨닫는 게 보통 사람들이다. 역사책을 뒤지며 한탄하지만, 실지로 그런 상황에 처하면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아무 것도 안 들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가 힘들다. 때로는 식자우환이라, 배운 사람일수록 둔감하고 보통 사람일수록 예민하다. 배운 사람은 이론이란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만, 못 배운 사람은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배운 사람은 대체로 편견을 지혜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못 배운 사람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나 건전한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들은 이런 자들을 보면 이론이 딸려서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더 답답하다. 이 정도는 인간 사회에 늘 있는 일이니까 괜찮다.

문제는 식자층이 건전한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들을 계도하려고 들 때이다. 식자층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도 암기하고 있을 뿐,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보는 공식'을 '무식자들'에게 주입시키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빛을 잃고 스스로 암흑에 갇히게 된다. 해도 지고 달도 지고 별도 드문드문한 사회가 되면, 너나 없이 번득이는 칼을 보고도 흥을 돋우는 칼춤인 줄 알고 침을 삼키다가 몇 사람이 피를 뿌리며 넘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다. 누구도 손을 못 쓴다. 일방적인 도륙이 있을 뿐이다.

1997년의 외환위기는 작은 조짐이었다.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것은 사실 다가올 위기에 비하면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는다. 임진왜란 전의 을묘왜란 정도랄까.

준비 없는 위기는 속수무책의 패배와 일방적인 양보를 가져온다. 1997년말 한국은 핫 머니를 비롯한 국제금융 세력에게 속수무책으로 패했고 뒤이어 IMF를 앞세운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했다. 더군다나 외환위기는 정권교체와 맞물리는 바람에 새 정권은 옛 정권을 실제보다 훨씬 더 부풀려 매도하고 자신들은 쏙 빠졌다. 여기서 더 큰 문제가 잉태되었다. 청진기로 진단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원인을 진단하고 칼로 베는 것보다 더 매정하게 환부를 도려내야 하는데, 새 정권은 자신과 관계된 일은 전혀 질병의 원인으로 거론도 못하게 막고 환부도 자기와 관련되면 암 덩어리인데도 그대로 두고 자신들이 신봉하는 국적불명의 사이비 경제이론에 어긋나면 색깔만 좀 이상해도 멀쩡한 생살을 IMF의 칼을 빌어 사정없이 도려냈다.

제일 심각한 병은 '노조' 병이었으나 이것은 집권 과정과 정권 유지에 크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저 뭇 눈총에 못 이겨 두루뭉실 노사정이란 말로 한데 묶긴 했으나 결국 '勞'와 '政'이 작당해서 '使'를 멍석말이시켰다. 실은 '사'도 '사'지만 '노'와 '정'이 훨씬 더 큰 병의 원인이었는데, '노'와 '정'은 슬그머니 빠지고 권력과 조직이 자기들끼리 통하는 암호를 주고받으면서 병이 든 '사'만이 아니라 멀쩡한 '사'도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가 김대중 정권 말기부터 급격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경제를 가장 잘 비추는 거울이 주식인데, 이것이 15년 전 수준에도 아직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직도 주식에 환상을 가진 한국인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다.

기업뿐만 아니라 은행도 정부도 정치권도 노동시장도 '자유'의 바람을 사정없이 쐬어야 하는데, 이전부터 상대적으로 자유의 바람을 가장 많이 쐰 기업만 더 맞았을 뿐, 나머지는 다 흉내만 내고 다시 철갑을 두르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기업도 중소기업은 노사전체, 대기업은 임원들만 자유의 바람을 쐬었을 뿐, 대기업과 공기업의 노동자들은 '인간 띠'를 두르고 감히 자유의 바람이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 사이 새 정치권력은 이전보다 더한 구태를 보였다. 기업의 온몸에 이전보다 더욱 교묘하고 정교한 규제의 족쇄를 씌운 것이다. 또한 금융은 여전히 정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일부 외국에 넘긴 은행마저 정부의 입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게 했다.

단 기업이 바다만 건너가면 어딜 가든 자유의 날개를 활짝 펼칠 수 있다. 그러나 바다가 아닌 땅을 건너가면, 곧 휴전선을 넘어가면 그건 곧 질식사를 뜻한다. 정치적 목적이 아닌 한 거기 들어가는 것은 부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는 규제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정말 이보다 더한 코미디가 없다. 그것은 연산군 시대로 되돌아가서 대대적으로 사업을 벌이려는 환상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황이니, 우리 기업은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해외로 또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다. 많이 고용하고(高임금, 過고용) 많이 내고(高세금, 高준조세) 그리고 다시 이리저리 뜯기고도 도둑 또는 하인 취급받는 것보다 적게 고용하고(低임금, 적정 고용) 적게 내고(低세금, 無준조세) 그리고 전혀 뜯기지 않고도 영웅 또는 칙사 대우받는 걸 선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껏 생각한다는 게:
'위기는 무슨 위기! 위기설을 퍼뜨리는 요망한 입들에 강력 본드를 붙여라! 저것들은 본드를 흡입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게 아무도 없느냐, 저것들을 엄히 문초하라!'
'이리 오너라, 재벌의 두목들아. 너희들은 향후로 나라와 겨레를 위해 힘쓸지어다.'
'이리 오너라, 은행의 우두머리들아. 너희들은 향후로 제 이익을 앞세우지 말고 먼저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라. 왜 대답이 없느냐! 지은 죄가 너무 무거워서 그러느냐? 다시는 죄를 짓지 말지어다.'

이대로 가면 을묘왜란에 지나지 않는 외환위기에 이어 임진왜란에 해당하는 총체적 경제 위기가 올 게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그것도 약과다. 병자호란이 또 기다리고 있다. 임금이 저 높이 청의 황제를 올려다보며 바위에 머리를 아홉 번 찧어 그 때마다 이마로 피를 분수같이 쏟으면서 오체투지하는 큰 절을 세 번 올린 병자호란의 치욕이 또 기다리고 있다. 만약 한국의 권력과 여론주도층이 방송과 인터넷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공식'을 일반 사람들에게 주입하여 경제의 눈과 귀만이 아니라 안보의 눈과 귀마저 멀게 하면, 미구에 한국은 잿더미가 될 게 틀림없다.

총체적 경제 위기의 조짐은 강성정치노조, 신용불량자, 국가부채, 가계부채, 실업, 소비 위축, 투자 감소, 부동산 침체, 금융 부실, 주식 횡보, 빈부 격차 심화, 여당과 정부의 민생 외면, 반기업 정서, 무차별적인 증오심의 격화 등이다. 이건 이제 외환위기 예방접종 때문에 보통 사람도 볼 수 있다.

총제적 안보 위기의 조짐은 두 번의 서해교전, 6·15 '민족'선언, 광화문 촛불, 노근리 추적, 매향리 소란, 이라크 파병 물타기, 주적과 동맹의 섞바뀜, 휴전선의 평화선화(도로와 철도 잇기, 지뢰 제거, 선전물 제거, 평화방송 중단 등), NLL의 물꼬 틔우기, 무해통항권 논란, 미군 철수, 별들에 대한 백면서생의 정훈 교육, 양보의 선을 넘어선 북핵 문제, 미소짓는 국방위원장, 거의 무조건적인 북한(김정일) 편들기, 북한(민초) 인권 멀뚱멀뚱 쳐다보기, 국보법 폐지에 목숨 걸기, 남남 갈등의 격화, 전향하지 않은 주사파들의 당당한 득세 등이다.

이 안보 위기는 6·25의 참극으로 공산주의에 평생 면역된 어른들은 투표장에 아예 나오지 말고 골방에서 고려장이나 치라고 괄시하는 세태라서, 피 흘려 싸울 젊은이들이 대부분 분홍빛 통일 환상에 젖어 있어서, 어지간한 사람이 아닌 한 알아보기 힘들다. 요즘 사람들은 방송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는데, 방송이 거의 10년 가까이 남북 평화무드로 흥청거리고 있기 때문에 안보 위기에 대해선 자신도 모르게 너나 없이 치유 불가능한 불감증에 걸릴 수밖에 없다. 외환위기로 자신도 모르게 전 국민이 경제 위기에 대한 안목이 생긴 것과는 달리, 안보 위기는 이런 이유 때문에 알아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지혜로운 분들이 천둥소리를 내야 하건만 그분들은 거의 다 폐관수련에 들어가 버려서, 나 같은 조무래기가 모기 소리를 낸다,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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