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사, 두산동아> 6·25 전쟁

<교학사 교과서>

3. 미·소 공동 위원회와 단독 정부 수립 활동

단독 정부 수립 활동과 좌익의 방해

미·소 공동 위원회가 지리멸렬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1946년 6월에 이승만은 통일 정부의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순회 연설 중 정읍에서 남한만의 임시 정부 수립 필요성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였다.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 2월에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12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남한 임시 정부 수립의 필요성과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켰다.

미·소 공동 위원회를 둘러싸고 남한에서 좌우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반공적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하는 사이 좌익 세력은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위조 지폐까지 발행하였다(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 이어서 조선 공산당은 1946년 가을부터 총파업을 하였다. 1946년에는 대구 10·1 사건 같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는 등 미군정과 정면 대치 상황으로 갔다.

제주도에서는 1947년 좌익들의 3·1절 기념 대회에 남로당 제주 도위원회가 조직 총동원령을 내려, 정권을 인민 위원회로 넘기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게 하였다. 대회 당일, 모르고 아이를 친 기마경찰을 뒤쫓아 시위를 구경하던 군중이 경찰서로 몰려갔고, 경찰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48년 5·10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이에 1948년 4월3일 남로당의 주도로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 경찰서와 공공 기관이 습격받았다. 이 과정과 이후 진압 과정 등에서 일부 군인과 경찰, 우익 인사가 희생되기도 하였다. 당시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 있었다(제주 4·3 사건).

한편, 제주도의 봉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가 여수 주둔 14연대에 진압 명령을 내렸으나, 14연대 내의 남로당계 좌익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들은 여수를 장악하고 인민 재판소를 설치하여 우익 인사들을 살해하였다. 반란은 순천 지역까지 확대되었고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여수·순천 10·19사건). 이후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계속하였다. 남한 정부의 수립을 전후하여 남로당 지도부는 월북하였다.

● 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 보도(동아일보, 1946. 7. 30.)
조선 공산당 사무실이 조선 정판사 건물에 있었는데, 조선 공산당은 이를 활용하여 대규모로 위조 지폐를 발행하고 활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이 미군정에 의하여 발각되어 조선 공산당 간부를 구속하고 박헌영에 대하여 체포령을 내렸다. 조선 공산당은 이에 대항하여 역공세를 취하여 총파업과 폭동을 일으켰다.
● 대구 10·1사건
조선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파업을 벌이던 중 대구에서 폭력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를 해산 하는 과정에서 시위자 한 명이 경찰의 유탄에 의해 사망하자 시위는 폭동으로 변하였다. 시위 군중들은 대구 경찰서를 점거하여 무기를 약탈한 후 수십 명의 경찰과 그 가족들을 살해하였다. 폭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수백 명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제주 4·3 사건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 도민이 희생된 사건이다(‘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호.)

4.남북한에서 좌우익 투쟁과 정부 수립

북한에서의 정권 수립 과정

소련은 북한에서 1945년 8월25일부터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9월에 스탈린은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 정권의 수립을 지시하였다. 지시의 요점은 인민 민주주의 운동을 통하여 공산화의 길을 북한이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각 행정 단위에서 인민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어서 중앙 행정부격인 북조선 행정 10국이 조직 되었다. 1946년 2월에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여 사실상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1947년 2월에는 북조선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1947년 6월에는 김일성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세우겠다고 언명하였다. 궤를 같이하여 공산당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1945년 10월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북국이 설치되었고, 12월에는 분국의 책임자로 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에는 북조선 분국은 북조선 공산당으로 독립을 하였다. 이어서 통일 전선을 구축하여 연안파의 조선 신민당을 끌어들여 1946년 8월 북조선 노동당을 창설하였다.

● 인민 민주주의 운동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 조건이 충분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일단 부르주아지와 연합하여 부르주아 민주 정권을 구축하되 정치적 실권을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는 형태의 운동을 말한다.

남한에서의 정부 수립과 유엔

김구와 김규식도 이 제의를 받아들여 김구는 4월20일, 김규식은 4월22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에서는 전조선 정당 사회 단체 대표자 연석 회의가 이미 4월14일부터 개최되고 있었다. 연석 회의는 4월23일 단독 선거 반대와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이는 김일성이 작성한 안을 가결하는 회의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5월5일 서울로 돌아왔다. 김구는 북한이 남한 송전을 계속하는 문제를 협의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북한은 5월14일 남한 송전을 중단하였다.

1948년 5월 국회가 개원되었고, 이승만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7월17일 제정된 제헌 헌법은 정치, 경제, 사회에 있어서 자유 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였다. 또한, 대통령 중심제와 3권 분립을 통하여 제도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제헌 국회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정부를 구성하여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정으로부터 통치권을 인수하고 유엔으로부터 승인받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북한은 1948년 9월9일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여 김일성을 수상으로 선출하였다. 분단의 책임이 남한에 있는 것처럼 하려고 남한 정부보다 20여 일 늦게 정권 수립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유엔의 승인을 받을 수 없었다.

남북한 분단 과정의 이해

자료1. 스탈린이 연해주 군관구 위원회와 25군 사령부에 하달한 명령(1945. 9.)

1. 북한 영토 안에 소비에트 및 기타 소비에트 정권의 기관을 수립하지 말 것이며 또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말 것.
2.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조직의 광범한 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할 것.
3. 붉은 군대가 점령한 조선 땅에서 반일 민주 단체와 정당 결성을 방해하지 말고 그들의 사업을 도와줄 것.
4. 지방 주민에게 아래와 같이 홍보할 것.
가) 붉은 군대의 북조선 진주는 일본 강점자의 섬멸이 목적이며 조선 영토를 탐내거나 또는 소련식 질서를 부식시키자는 것이 아님.
나) 북조선 인민의 사회적 및 개인적 소유는 소련군의 보호를 받음.

자료3. 슈킨의 북조선 정세 보고서(1945. 12.)

1945년 9월21일자 최고 사령부의 훈령에 언급된 북조선에서의 민주 정당 사회 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 결성을 겨냥한 노선이 대담하게 관철되지 못했다.
1. 반일 민주 정당 사회 단체의 광범위한 블록을 토대로 한 북조선의 부르주아 민주 개혁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2. 조선에서 소련 군대가 철수될 경우 소련의 국가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굳건한 정치 경제적 교두보를 아직 쟁취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 민족 간부가 아직 충분하게 파악되지 못했다. 현재 북조선에서 인기가 높은 인사들은 공산당 지도자 김일성과 박헌영, 민주당 지도자 조만식이 있는데 조만식의 소련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아직 모호하다. 연해주 군관구 군사 위원회에 따르면 민주주의 단체들을 지도할 수 있고 소련의 이익을 고수할 수 있는 민주주의 민족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4~5개월이 소요될 것이다.
3. 최단 시일 내에 북조선 경제를 복구하고 민족 간부를 양성하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북조선 내 정권을 중앙 집권화하여 이를 민주 활동가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4. 인민 민주주의 운동은 대지주의 토지 소유 현실 때문에 지장을 받고 있다. 빠른 시일 내에 토지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

6·25 전쟁

1.소련의 적화 전략과 김일성, 중국

중국의 지원

중국은 팔로군 출신 한인들을 주축으로 하고 중국 인민 해방군 내의 한인들을 차출하여 한인들로만 구성된 군대를 만들어 입북시켜서 3개 사단 5만 명의 병력을 지원하였다.

김일성의 오판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으로 북한 공산 정권을 이끌게 되었다. 이제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륙의 극동 지역은 모두 공산화되었다. 소련은 남한만 적화시키면 미국의 봉쇄선을 무너뜨리고 일본까지 위협할 수 있었다. 소련의 이 같은 적화 전략을 부추긴 것은 북한의 김일성이었다. 북한은 나름대로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우익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공산 정권을 수립하였고, 남한의 정부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약점으로 인하여 좌익 세력들이 언제나 사회를 교란할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의 인민은 폭동과 총파업으로 군대의 전투력을 마비시키고, 반란을 통하여 배후를 공격하면서 짧은 시간 내에 남한 정부를 전복하여 한반도 전역을 통일할 수 있다고 보았다.

2. 6·25 전쟁의 전개 과정

김일성이 주도하고,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마오쩌둥이 지원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마오쩌둥은 북·중 국경 지대에 병력을 집결시켜 전쟁에 개입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소련도 공군 병력을 위주로 침략 전쟁을 지원하였다. 북한군의 병력은 대한민국 국군의 2배 정도인 약 20만 명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대한민국의 국군은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던 반면 북한군은 팔로군 출신이 중국의 국·공 내전에 참전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화력도 압도적으로 남한보다 유리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남침 소식을 보고받고 즉각 침략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6월25일에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소집되어 침략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27일에는 무력 개입을 결정하였다. 바로 그날 트루먼 대통령은 미 공군과 해군의 파견을 지시하였는데, 유엔군의 전 병력 중 미군이 88%에 달했다.

개전 초에 북한군은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로 남진을 계속하였다. 8월에는 낙동강 방어선만을 남기고 모든 남한 지역을 점령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국군이 필사적인 저항을 하였고 방어 전선에 학도병, 소년병들까지 기꺼이 참전하였다. 9월에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였다. 유엔군은 신속하고도 과감한 전술로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하였다. 이어서 유엔군은 북진하였다. 10월에는 평양까지 다다르고 11월에는 북한군을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압박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밀리게 되었고(1·4 후퇴), 서울을 빼앗겼다가 다시 수복하여 1951년 6월경 부터는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전선이 고착되었다.

그러나 휴전 협정은 2년 이상의 시간을 끌다가 스탈린이 사망한 후 1953년 7월27일에 가서야 체결되었다.

6·25 전쟁은 유엔군이나 공산군 양측에 엄청난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다. 국군 약 15만 명과 미군 3만 7천 명을 비롯하여 기타 참전국 군인 2,500명 정도가 사망하였다. 북한군 약 30만 명, 중국군 약 14만 명, 소련군 약 300명이 전사하였다.

●공산 빨치산(조선 인민 유격대)의 활동
공산 빨치산은 공산주의적 이념을 가진 무장 게릴라 세력을 일컫는다. 한반도에는 광복 직후 남로당의 활동을 통하여 전투적 성격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대구 10·1 사건을 일으키고, 제주도 4·3 사건과 여수·순천 10·19 사건 등을 통하여 노골적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을 저지하고 북한의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지지하였다. 북한은 남한의 공산 빨치산을 지휘하기 위하여 1949년 7월에 조선 인민 유격대를 창설하였고, 그 책임자로 박헌영과 이승엽을 임명하였다. 또한, 북한은 강동 정치 학원에서 양성한 빨치산 약 2,400명을 1948년부터 1년에 걸쳐 파견하여 남한 빨치산에 합류시켰다.

●6·25 전쟁에 참여한 유엔
⦁병력 지원-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터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벨기에, 에티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 태국
⦁의료지원-인도,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물자 및 재정 지원-자유 중국, 일본, 멕시코, 인도네시아, 스위스 등 39개국
⦁지원 의사 표명-브라질, 볼리비아, 니카라과

3. 6·25 전쟁의 피해

또한, 북한군의 침입으로 수십만 명이 학살, 실종, 납치, 부상당하였다. 동네 불량배였던 룸펜 공산주의자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사회적 불만을 폭력으로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치안대의 이름으로 붉은 완장을 하고 다녔다. 경찰관과 우익 인물이 학살되었다. 서울을 접수했던 6월28일에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 중인 국군과 민간인 환자 500여 명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인민재판으로 인한 학살이 너무 심각하여 군령으로 인민재판을 금할 정도였다. 북한군은 대략 9월 한 달 동안 1만 4천여 명을 학살하였다. 특히,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후퇴하면서 대전 형무소에 있던 1,700여 명의 우익 인사와 가족을 학살하였다. 학살은 북한군 점령지 전역에서 벌어졌다.

북한군은 북한에서도 학살을 자행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서 진격하자 평양, 함흥 등 주요 지역에서 사상을 의심받아 미리 구속하였던 인사들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다. 목사와 신부들도 학살되었다.

남한에서도 민간인들에 대하여 살상이 있어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민 보도 연맹사건이다. 국민 보도 연맹은 좌익 사상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그러나 북한군이 남침하자 국민 보도 연맹원들은 이들이 북한에 협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 다수가 학살되었다. 대전 형무소에 감금되었던 국민 보도 연맹원 3,500여 명이 학살되기도 하였다.

<두산동아 교과서>

4. 6·25 전쟁이 일어나다

전쟁의 기운이 감돌다

1948년 남북한에 따로 정부가 들어서며 38도선은 분단선이 되었다. 남북한 정부는 군대를 정비하고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북한은 1948년 2월에 창설한 조선 인민군을 정비하고 남한은 조선 경비대를 국군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전쟁 직전 남북한 지상군은 남한이 10여만 명, 북한군은 20여만 명에 이르렀다. 38도선 일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 남한에서는 남조선 노동당의 투쟁이 확대되고, 각지에서 빨치산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신의주 등지에서 반공 의거가 일어났다.

남북한 사이의 갈등이 커져 가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군대를 철수하였다. 하지만 두 나라는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계속하였다. 1949년 9월에는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고, 1950년 초 미국은 태평양 지역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하였다.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북한은 중국에게 전쟁 지원 약속을 받아내고, 국·공 내정에 참여하였던 조선 의용군 3만여 명을 귀국시켜 인민군을 강화하였다.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무력 통일을 위한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6·25 전쟁이 일어나다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국제 연합은 북한의 불법적인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한국에 군사 지원을 결의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미국을 주축으로 16개국이 유엔군을 편성하였다.

국군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유엔군의 지원이 있었음에도 북한군에 밀려 한 달여 만에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였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역전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28일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함락하였으며,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퇴각하여 1951년 1월 다시 서울을 빼앗겼다. 전열을 정비한 국군과 유엔군은 두 달 만에 서울을 되찾고 북한·중국군을 38도선 부근까지 밀어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소련은 정전 협상을 제의하였다. 미국은 세계 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승만 정부가 통일을 주장하며 휴전에 반대하였지만 정전 협상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협상은 2년 가까이 계속되었으나 군사 분계선 설정, 중립국 감시 기구의 구성, 포로 교환 등의 문제로 난항을 거듭하였다. 협상이 장기화되면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전투는 더 격화되었다. 북한 지역에 대한 폭격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1953년 7월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 협정에서 양측은 현 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정하고, 군사 분계선 남북 각각 2km 지역을 비무장 지대로 설치하였다. 그러나 정전 협정은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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