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은 오래 전부터 행정 요지의 역할을 수행해 온 곳이다. 지금도 한국은행 부산지점과 우체국, 용두산 공원 등이 자리한 이 부근에는 3층짜리 회색 건물 하나가 서 있다. 3월 18일, 검은 연기와 함께 별안간 건물이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단순 화재가 아니었다. 같은 시각 800m 근방에 위치한 유나백화점과 국도극장에서는 유인물 수천 장이 흩뿌려졌다. “살인마 전두환 북침준비 완료!” 3로 돌아온 5 한국의 학생운동사에서 1980년의 5은 중요한 분기점이다. 3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종의 ‘성역’으로 남아있어 자유로운 담론이 불가능한 광주사태를 기준점으로 학생운동은 한층 더 극렬한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후 광주, 대구 등에서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잇따랐다. 1985년에는 73명의 대학생이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을 벌였다. 반미와 방화, 농성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져나간 것이다.
생각보다 크게 번졌던 불 모든 것의 시작이 되었던 1982년 3월 18일의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김현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는 부미방 이전부터 이미 학생운동권의 유명 인사이자 르포라이터였다. 광주사태 관련자로 수배를 당하던 상황에서 부산으로 넘어온 김현장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허진수라는 인물과 접촉한다. 그 뒤 밖으로 나와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솜사탕 모양의 방화봉을 꺼내 가스라이터로 불을 붙여 휘발유가 쏟아진 건물 안으로 던졌다. 문화원 건물은 순식간에 폭발음과 함께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여학생 4명은 대신동 방향으로 사라졌다. ‘변호인’ 노무현, 등장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전대미문의 충격을 안겨줬다. 사람이 사망할 정도로 불이 워낙 크게 번졌던 데다가 여러 명의 학생들이 극렬한 구호의 유인물까지 뿌렸기 때문이다. 고의성이 명백해 보였기 때문에 사건 직후부터 수사 종결까지 대중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 한편 문부식과 김은숙은 사건 이후 원주교구청의 최기식 신부에게로 갔다. 최 신부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활동하던 함세웅 신부에게 연락을 취했고 사건발생 14일 만인 4월 1일 두 사람은 자수했다. 출두 직전에는 결혼식을 대신한 예식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공범 3명과 전단 살포자 3명, 의식화 학습을 함께 한 3명 등 11명이 검거됐다.
‘각자의 길’ 걸어간 사건의 주역들 피의자들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선고까지 내려졌지만 실제로 사형을 당한 인물은 없다. 김은숙의 경우 약 5년을 복역한 뒤 1987년 출옥했다. 이후 ‘김백리’라는 필명으로 소설 창작과 번역 활동을 했으며 2011년 5월 암으로 사망했다. “민주화운동 인정 여부는 공론 영역에서 충분한 논의를 통해 설득력을 갖추고 사회적 합의를 거쳐 이뤄져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다는 점에서도 큰 파장을 야기한 해프닝이었다. 김현장 “역사를 증오심으로 풀 순 없어” 반면 김현장은 2007년 대선 무렵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경선 후보를 공개 지지한 것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2012년 치러진 19대 총선 직전에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18번 강종헌에 대해 “북한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남파된 간첩이었다”는 내용의 충격적인 증언을 해 파문을 일으켰다. 강종헌에게 공개편지까지 보냈지만 대답이 없는 상태에서 이석기 RO사태가 일어났고, 강종헌은 여전히 통합진보당에서 활동 중이다. 이석기가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면 금배지를 승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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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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