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國' 기행


열흘 전 일본 니이가타의 유자와(湯澤) 온천을 가게 되어 있어 이곳을 무대로 하여 쓰여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雪國'을 읽게 되었다. 이 소설은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한번 읽으려 했는었데 중단했다. 줄거리가 너무 평범하여 재미가 없었다는 기억과 함께 소설의 첫 문장은 오래 남았다. 명화 '닥터 지바고'에서 피란민을 태운 기차가 터널을 지나니 雪景이 나타나는데 나는 '雪國'의 첫 문장을 연상했다.

<國境의 긴 터널을 빠져나가니 雪國이었다. 밤의 바닥이 하애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

여기서 國境이란 군마현과 니이가타현 사이에 있는 시미즈(淸水)터널을 가리킨다. 도쿠가와 막부시대에는 영주들이 다스리는 영지(藩)를 國이라 불렀다. 시고쿠(四國)은 4개 번이 있던 곳이다. 국경이란 이런 번의 경계선(그 뒤는 縣의 경계선)을 가리킨다.
'雪國'을 다 읽지 않는 사람들도 이 첫 문장을 기억하는 이가 많다. 여러 소설들의 첫 문장중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雪國'은 그 배경처럼 문장이 아름답다.

일본의 短詩(7-5-7자)인 俳句를 닮은 문장과 대화가 많이 나온다. 짧게 끊어지는 문장에 일본인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을 담았다. 이 짧은 소설을 다 읽고나면 마음속에 많은 장면들이 殘影처럼 남는다. 한 편의 詩를 읽은 느낌이다. 문장이, 특히 대화가 짧고 함축적이라 오히려 상상력과 애틋한 생각이 더 길게 오래 가는 모양이다.

남자주인공 시마무라는 시니컬한 성격의 무용평론가(기혼자로 추정된다)인데 유자와 온천향에 한가하게 놀러와서 게이샤를 불러 수작이나 걸려고 한다. 그래서 고마코를 만나게 된다. 그 장면.

<여자의 인상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청결했다. 발가락 뒤 옴폭 파진 데까지 깨끗할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첫여름의 산들을 보고 온 자신의 눈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가 하고 의심이 들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소설에서 많은 것을 생략한다. 그 생략으로 해서 상상력이 자극된다. 예컨대 고마코의 과거를 이렇게 한 문장으로 처리한다.
<술마실 기분도 나지 않던 차에, 여자가 그의 태생은 역시 이 눈고장이며 도쿄에서 술집 접대부로 있다가 빚을 갚아준 남자가 있어, 그 남자를 의지하면서 장래 일본춤 선생이나 되려고 했던 것이,1년반쯤 지나 돌봐주던 남자가 죽어버렸다는 의외로 솔직한 이야기를 했다>

야스나리는, 시마무라가 이 고마코와 처음 관계하는 장면을 이렇게 스쳐지나가듯이 썼다.
<'내가 나쁜 여자가 아니에요. 당신이 나빠요. 당신이 진 거예요. 당신이 약한 거예요.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라고 중얼거리면서 기쁨을 누르려고 소맷자락을 씹었다.
잠시 힘이 빠진듯 조용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날카로운 어조로,
'당신 웃었죠. 날 비웃는 거죠?'
'웃긴 누가 웃어?'
'마음 속으론 웃고 있는 거죠. 지금은 웃지 않아도 나중엔 반드시 웃을 거야'>

야스나리는 이 소설을 1934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3년 뒤 일단 완결했으나 1947년까지 고치고 다듬고 하여 마무리했다. 사와노라는 일본 평론가는 '이 소설만큼 상징적이고 아름다운 일본문장은 좀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慾情 같은 것도 눈 녹은 물처럼 淸潔하다'고 썼다.
'돌을 갈아놓으면 반들반들해지는' 그것처럼 신경이 예민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소설을 붙들고 13년간이나 고치고 다듬고 했다는 것은 그의 '고독한 魂'에서 나온 힘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사와노는 '그의 부드러움은 失意와 체념에서 나온 것이고 그의 엄격함은 사라지는 일본의 美를 마지막까지 버티어보려는 데서 연유한다'고 덧붙였다.

이 소설의 基調(기조)를 이루는 '사라져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생애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 早失父母한 천재 야스나리가 일본의 美的 감수성에 탐닉했다가 73세에 자살로 생애를 마감하는 것이 이해가 간다.

나는, 연일 눈이 내리고, 이미 내린 눈은 깊이가 2m를 넘는 곳도 있었던 유자와 온천에서 못다 읽은 이 소설의 남은 부분을 덮고 인적이 드문 거리로 나와보았다. 고마코를 닮은 여인과 마주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자들이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라고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고마코는 약간 어색한 기색으로, 이를테면 아기를 한번도 낳아 본 적이 없는 처녀가 남의 아기를 안고 거북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들어 마치 아기의 잠자는 얼굴을 지켜보는 몸짓을 했다. 잠시 후 시마무라가 입을 열었다.
'넌 좋은 애다'
'왜? 어디가 좋아요?'
'좋은 애야'
'그래요. 짖궂은 양반, 무슨 애길 하는 거죠? 정신 좀 차리세요.'
고마코는 외면을 하고 시마무라를 흔들면서 토막토막 쏘아붙이듯 말하고는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혼자 입속으로 웃으면서 '당신 안되겠어요. 괴로우니까 돌아가 주세요. 이젠 입을 옷이 없어요. 당신에게 올 때마다 새 옷을 갈아입고싶지만 이젠 바닥이 났어요. 이것도 친구에게 빌린 거예요. 나쁜 애죠?'
시마무라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뭐가 좋은 애에요?'
고마코는 약간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처음 만났을 때, 당신 뭐 그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어요. 그런 실례의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정말 기분 바빴어요.'
시마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걸 아세요?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하게끔 만드는 건 그것으로 이미 끝장 아닌가요?'
'할 수 없지'
'그래요?'
고마코는 자신을 뒤돌아보듯이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한 여자의 살아 있는 느낌이 시마무라의 마음에도 따뜻하게 옮겨왔다.

'넌 좋은 여자야'
'짖궂은 분'
어깨가 간지러운듯 얼굴을 숨겼으나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한쪽 무릎을 세워 고개를 들고는, '그게 무슨 의미죠, 네? 무슨 애기에요?'
시마무라는 놀라서 고모코를 보았다.
'말해주세요. 그래서 찾아오신건가요? 당신, 비웃고 있었군요. 역시 비웃고 있었죠?'
고마코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시마무라를 노려보더니 어깨는 심한 노여움으로 떨리고 안색은 창백해지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분해라, 아이, 분해라' 하며 데굴데굴 구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돌아앉았다>

'넌 좋은 애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감격하면서 과거 심정까지 털어놓던 고마코가 '넌 좋은 여자야'라고 시마무라가 말을 바꾸는 순간 돌변한 이유는 일본인과 한국인은 알 것이다. '좋은 애'와 '좋은 여자'의 차이. 이 차이로 해서 고마코는 시마무라에 대한 꿈을 접고 배신감을 느끼며 소설은 파국으로 달린다.

평론가는 '낱말의 사소한 차이를 가지고 이렇게 많은 것을 암시하는 소설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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