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실무자를 반드시 獨對하던 朴 대통령
1960년대에 중앙정보부에서 북한 국장으로 근무했던 康仁德 前 통일부장관은 최근 필자에게 이런 증언을 해 주었다.
“분기별로 朴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朴 대통령은 당신께서 軍생활 하시는 동안 정보국에서 근무하시며 정보의 수집과 분석을 직접 하셨던 경험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분은 정보 실무자인 저의 보고를 받을 때면 반드시 獨對(독대) 보고를 하게 하셨습니다. 제 직속상관인 정보부장도 그 자리에는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실무자가 자기가 모시는 상급자 앞에서는 보고를 꺼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신 겁니다. 그렇다고 문서로 비서실장이나 누구를 거쳐 보고 받는다면 그 과정에서 정보가 오염될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계셨던 거지요.
저로서는 정보를 다룰 줄 알았던 대통령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밤새워 일을 해도 기뻤습니다. 정보부장이 우리를 몰라주더라도 대통령이 알아준다는 그 사실이 저 뿐 아니라 정보부의 모든 요원들에게는 힘이 돼 주었습니다.”
 
康仁德 북한 국장은 1969년부터 朴正熙 대통령으로부터 남북한 경제력을 분석 비교하라는 지시를 받고 2년 여 동안 불철주야로 일한다. 康 국장이 총 지휘를 맡았고 경제과장이던 정(鄭) 모 씨가 실무책임자인 ‘특별반(Task Force Team)’을 편성해 심도 깊은 북한의 國力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公開정보가 더 유용한 이유
“북한 정보는 인적 정보(人的 情報)인 ‘휴민트(Humint-Human Intelligence)’와 공개 정보(公開 情報)인 ‘오씬트(Osint - Open Source Intelligence)’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그래도 믿을 만 한 것은 公開 情報였습니다. 휴민트가 중요한 것은 맞지만 대개 정보 브로커들이 장사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검증에 오래 걸리고, 자칫 거짓 정보나 쓸모없는 정보를 비싼 값에 거래하는 위험이 많습니다. 그 당시 우리 정보부도 많이 속았지요. 그에 비해 공개 정보는 제대로만 분석해 내기만 하면 값진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육성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 무렵 북한 경제력 분석작업에서도 공개 정보를 많이 활용합니다.”
康仁德 당시 북한 국장은 북한 당국이 일본과 유럽 등 해외에 배포된 선전 책자에서 공개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지금보다 더 폐쇄적이었던 냉전시절의 敵國을 들여다보고 그 나라의 경제력을 분석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선전 책자에 실린 사진의 背景들은 조작된 것이 아닐 가능성이 컸지요. 더구나 현장 사진을 싣는 경우 아주 좋은 정보의 실마리를 얻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북한 잡지에 흥남 제철소 사진이 있으면 그걸 크게 확대해서 걸어두고 촬영 일자를 추정해 냅니다. 그리고 흥남 제철소에서 일하다가 월남(越南)한 사람들을 찾아내지요. 그 당시 정보부가 그런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월남자들의 정보를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니 수기(手記)로 적어두면서 일일이 관리했거든요. 그 분들을 찾아 불러옵니다. 그리고 월남 직전의 공장에 대한 기억을 부탁합니다. 잡지 사진에 실린 공장 사진에서 새로 지어진 건물, 심지어 공중을 가로 지르는 전선 가닥수, 전봇대 수까지 기억과 비교해 갔습니다. 공장에서 일해 본 사람들은 사진을 보여주면 어렴풋이 기억하거든요.”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북한제 트랙터·기계류·공구류 등 현물도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기계·공구류는 공법연구소 등에 맡겨 전문적 평가를 하도록 했다. 외부의 평가팀을 과학기술자7:경제학자3인의 비율로 조직하여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깊은 연구가 되도록 했다. 이론 보다 실물 위주의 분석이었다.
국가 지도자의 情報 선별 능력
그 과정에서 생긴 일화 한 토막이다.
“한 6개월 쯤 지났을 때입니다. 한 번은 분기 보고 때문에 대통령과 독대(獨對)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보고를 다 마친 뒤에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각하. 북한 경제력 분석 때문에 그러는 데, 현재 북한이 생산한다는 트럭이나 트랙터 같은 중공업 제품들을 제3국에서 좀 사들여야겠습니다. 그래서 그걸 좀 분해해 봐야겠습니다.”
“아, 그렇지. 그게 필요하지. 그래 예산이 얼마나 필요해?”
“예. 각하. 대충 30만 달러 정도면 되겠습니다.”
“음. 작진 않구먼. 그건 정보부 예산에서 쓰도록 하지.”
朴 대통령은 부저를 누르더니 비서실장에게 ‘정보부장 들어오라고 해’라고 하셨어요. 밖에서 대기하던 김형욱(金炯旭) 부장이 들어왔습니다.
“金 부장. 康 군이 보고하는 걸 들었는데, 북한이 생산한 자동차나 트랙터 같은 게 필요하다고 그러내. 한 30만 달러 한다는 데, 그거 정보부 예산에서 사 주라고.”
“예. 각하. 잘 알았습니다.”
이렇게 그 날 대통령과의 독대 보고는 끝났지요. 저와 金炯旭 부장은 나란히 청와대를 나와 金 부장의 전용차량 뒷좌석에 타고 이문동 정보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저는 보고용 궤도를 말아 무릎위에 놓고 앞만 보고 있었지요. 차가 막 청와대 정문을 벗어났을 때 金 부장이 한 숨을 내 쉬면서 이런 말을 합디다.
“햐-. 康仁德이 너… 햐-. 참, 간도 크다. 너 그 돈이 얼마나 큰돈인 줄 알어? 우리 예산도 얼마 안 되는 데 햐-.”
저야 정보부 예산이 얼마나 되고 그 돈이 정보부 예산의 몇 분의 몇인지 잘 모를 때지요. 그저 “아, 예…”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말았습니다. 죄송하다고 할 수도 없고, 뭐라 말 할 수가 없어서 그 자리가 참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金炯旭 부장은 더 이상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돼 대통령의 지시대로 예산은 집행 됐고, 그 자금으로 북한이 생산한 각종 중장비들을 국내로 들여와 그들의 공업수준과 경제력의 규모 등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됐습니다.”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1970년 말, 康仁德 국장의 노력으로 ‘남북한 경제력 비교 분석 보고서’가 완성됐다. 建國 이후 약 2년 에 걸쳐 최초로 시행된 이 작업에 동원된 인원은 중앙정보부, 국방부, 정부연구소, 민간연구소, 월남자 등 1000명쯤 됐다고 한다.
“그 때 우리가 한 작업으로 북한경제의 문제점뿐 아니라 북한체제를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과학적인 눈을 갖게 되었던 겁니다.”
1971년과 1972년에 남한측 기자들이 적십자 및 조절위 대표단을 따라 북한을 방문했을 때 정보부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북한상품을 사오라고 부탁했었다. 그 과정을 거쳐 남한으로 유입된 상품들은 정보부에 의해 거두어들여서 북한경제 분석 및 평가에 활용된다. 화장품은 화장품회사에, 레코드는 작곡가에 맡기는 식으로 전문적 분석을 했다. ‘인삼비누’를 어느 비누회사에 분석의뢰 했더니 얼마 뒤 그 회사에서 인삼비누를 생산하기 시작하더라고 한다.
1970년 겨울, 박정희 대통령의 책상위에 올라가게 된 ‘남북한 경제력 분석 평가 보고서’에는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1972년이면 북한과 동등해지고 그 다음 해부터 우리가 추월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歷史와 대면하던 朴 대통령으로 하여금 確信을 갖게 해 준 정보 보고서였다.
이처럼 최고급 정보를 관리할 줄 알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기간 18년 동안 정보의 실패로 인한 잘못된 정책결정을 내린 적이 거의 없었다. 오늘날 번영을 구가하는 大韓民國의 과거를 거슬러 살펴보면 국가 지도자의 정보 선별 능력이 얼마나 진중(鎭重)했었는지 알게 되고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