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장사, 통일 장사, 환경 장사


김영삼과 김대중 양씨는 민주 장터에서 장돌뱅이로 시작하여 밑천을 몇 번이나 날렸지만, 민주 포장지와 민주 상자만큼은 애오라지 간직했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대체로 속에 무엇이 들었든, 장미꽃이 들었든 호박꽃이 들었든 쌀이 들었든 모래가 들었든 누렁이가 들었든 구렁이가 들었든, 겉만 번지르르하면 상품을 덜컥 사지 못해 안달이라는 것을 그들은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30여 성상을 그렇게 민주 장터에서 거상으로 군림하다가 마침내 양씨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봉황이 뒤에서 너울너울 춤추는 옥좌에 앉았다.

알고 보니, 김대중 전대통령(이하 김대중)이 둘 중 한 수 위였다. 그는 민주 상품이 스테디 셀러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민주라는 일차 목표를 달성한 한국인의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통일 장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던 것이다. 이미 통일 상품은 1980년 이래 언더그라운드에서 특히 대학에서는 핵폭탄급 상품이었다. 새 대통령은 직전 대통령의 무능을 통쾌하게 비난하면서 국내용 발언을 한번 했다가 혼이 나고는 이내 IMF에 굽신굽신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외환위기를 극복했다고 힘차게 선언하고 총선 직전 통일 상품을 깜짝쇼가 아닌 것처럼 전격적으로 선보였다.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대학의 지하에서 떠돌던 통일 상품은 하루아침에 전국의 백화점과 할인점에 일제히 전시되었다. 인기 폭발! 재래시장에서도 발을 못 붙이던 통일 상품이 최고급 백화점의 가장 폼나는 매장에 전시되었다. 그는 독재자 김정일을 식견 있는 지도자로 국제 무대에 소개하면서 뜨겁게 포옹하고 둘만이 한 차를 타고 짧지만 꿈 같은 밀월을 즐겼다. 그 덕분에 노르웨이에 초대되어 노벨상도 목에 걸었다.

퇴임 후도 그는 꿀같이 달콤한 노년을 보낸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 처음이다. 아들들을 비롯하여 측근의 각종 비리가 봇물 터지듯 터지고 김정일에 통크게 뇌물 바친 일도 들통났지만, 그의 통일 장사를 고스란히 이어받을 후계자를 잘 낙점한 덕분에 아랫것들 몇 명 자르는 선에서 유야무야, 여전히 통일 장사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누구도 그의 옷자락 하나 빗당기지 못한다. 세배 못해서 발을 동동 굴리는 사람은 부지기수이고.

순진한 한국의 소비자들이 분위기에 휩쓸려 통일 상품을 더러 사긴 샀는데, 포장을 뜯어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그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던 '자유민주' 통일 상품이 아니라 '자주평화연방' 통일 상품이었던 것이다. 대학에서 통일 상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 알고도 모르는 척 모르고도 아는 척하는 사이에 386끼리 치열한 내부 투쟁을 통해 주도권을 잡은 자들이 내용물을 바꿔치기 해 버렸던 것이다. 호남의 유일 선생님답게 김대중은 일찌감치 그 상품 가치를 정확히 알아 보고 통일꾼들과 제휴하는 척 그들을 전원 아랫것으로 접수해 버렸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남북 관계만 잘 되면(이하 생략)'이라는 한 마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통일 장사의 새로운 거상 노무현 대통령(이하 노무현)도 김대중 못지 않게 무서운 사람이다. 통일 상품을 구입한 후 환불도 안 되고 리콜도 안 된다고 구시렁거리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알고, 그는 새 상품 둘을 동시에 선보였던 것이다. 말 한 마디 않아도 방송에서 통일 상품은 알아서들 줄기차게 광고해 주고 팔리든 안 팔리든 백화점과 할인점에서 제일 목 좋은 자리에 진열해 주니까, 잠시 관심을 딴 데 돌리면 고정팬들이 다시 열광한다는 것을 알고 새 상품을 선보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환경 상품과 재생 민주 상품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 상품의 씨엠 송(CM song)은 젖먹이도 흥얼거릴 정도로 대박을 터뜨렸다. 야당은 여당과 시민단체와 방송의 무차별한 선제기습공격에 줄줄이 쪽박만 차고.

그러나 TV를 끄고 가만히 실시간으로 뜨는 외신이나 TV의 단골 씹힘 대상인 신문들을 보면,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김정일 정권은 핵에 대해 거짓말과 협박으로 일관하고, 개혁개방을 흉내만 낼 뿐 10년이 지나도록 굶주림 하나 해결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북한에서건 만주에서건 북한 주민에 대한 인권 탄압은 나날이 심해질 따름이니까.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와는 또 달리 전세계를 아무리 둘러봐도 이제 북한 정권을 편드는 정권은 한국과 중국밖에 없다. 중국도 겉보기일 뿐 속내는 전혀 다름을 쉽게 알 수 있다. 남북한을 동시에 겨냥하고 동북공정을 당당히 밝혀도 '자주평화연방' 통일 상품에 혹시 흠이 갈까, 남북의 지도자나 그 팬들은 술집에서조차 찍 소리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소비자들이 통일 상품에는 볼이 단단히 부어 있을 수밖에! 포장을 뜯고 뚜껑을 여니, 속에는 호박꽃과 모래와 능구렁이가 들어있을 뿐인 민주 상품에도 실망하고 분노하고 놀란 지 오래고. 이런 사실을 재빨리 파악하고, 노무현은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환경과 재생 민주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친위 쿠데타가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했다. 표정 관리만 잘하면 끝.

환경 상품과 재생 민주 상품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과거의 상품에 초를 치는 수법이다. 환경 상품은 과거의 개발 상품을 풀어헤쳐 내동댕이치면 절로 둥실 떠오르고, 재생 민주 상품은 과거의 생활 필수품을 마당에 끌어내어 '독재 껍데기'를 벗기고 그 위에 재생 민주 포장지나 상자를 덮씌우면 눈부신 반사효과를 얻는다. 그러면 공은 고스란히 집권세력에게 안기고 과는 몽땅 과거 정권들에게 돌아간다, 라고 그들은 생각하는 듯하다.

전라도 사람들의 비원은 개발 상품을 고향에서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늦게나마 새만금 간척사업과 위도 핵폐기물 처리장을 유치한 것인데, 이들은 졸지에 환경 상품으로 돌변하면서 이웃은 원수가 되고 원수는 이웃이 되었다. 전국의 환경 잡상인이 일시에 몰려 들어 난장판이 벌어졌다. 천성산과 북한산도 아연 활기가 넘쳤다.

재생 민주 상품은 단연 초장기 베스트 셀러인 박정희 브랜드의 생활필수품을 독재 상품으로 낙인찍고 그 위에 민주 브랜드를 붙여 필요한 것만 재빨리 가로채면 돈 한 푼 안 들이고 대량 생산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행정수도 이전 상품이다. 이건 맞춤식 상품인데, 박정희의 원래 계획과는 달리 특정 지역의 소비자용이다. 20년 이상 무덤같이 퀴퀴한 창고에 들어있던 박정희판 청사진을 꺼내 여론이 어떠하든 헌재가 뭐라든 포장만 살짝 바꾸어 밀어붙인다. 단, 여기엔 절대 환경 브랜드나 경제 브랜드를 붙이지 않는다. 개발 브랜드도 붙이지 않는다. 균형과 화합과 분권이란 긴 브랜드를 붙인다. '암표' 장사만 잘하면 되니까, 각종 개발 상품을 환경 상품으로 환원시키면서 증발하는 헛돈과 숱한 독재 상품을 재생 민주 상품으로 리모델링하면서 추가되는 생돈은 오불관언이다. 어차피 '내 돈' 들어가는 것 아니니까. 모든 게 지나가면 '땡'이니까.

요란하기만 했지, 통일 상품과 환경 상품과 재생 민주 상품의 매니아들 숫자는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가만히 살펴보고 조용히 귀기울여 보면 이들은 거의 같은 무리이다. 문제는 이들의 조직이 비단처럼 촘촘하고 거미줄처럼 가볍고 강철처럼 단단하고 공기처럼 투명하여 열 명이 능히 낙엽처럼 뒹구는 백 명을 이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뿔뿔이 흩어진 다수는 포장마차에서 노가리를 쭉쭉 찢어 입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으며 소주를 들이킨다.

조직 외에도 이들은 그 이빨이 상어급 내지 악어급이다. 오죽 했으면 젊은 혈기에 김일성 특허품인 '자주평화연방' 통일 상품에 현혹되었다가 뒤늦게 깨닫고 뉴 라이트란 브랜드로 새로운 통일 상품과 새로운 민주 상품을 개발하고 생산하여 대대적으로 판매하겠다고 당당히 선언한 똑똑한 청장년 소비자도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올드 라이트라면 재생 민주 상품에 소름이 끼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도리어 올드 라이트를 뉴 레프트보다 경원시한다. 독재는 독재다, 밝힌 건 밝혀야 한다며 재생 민주 상품을 들고 나오는 뉴 레프트를 은근히 방조하고 반긴다. 손오공이 현장법사에 의해 이마에 스스로 풀 수 없는 머리띠를 둘렀듯이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노사모로 대표되는 광팬들에게 무의식이 금제되어 있는 셈이다. 그 정도로 현 집권층과 그 팬들의 이빨이 대단하다.

문득 올려다보니, 백두산에 걸터앉아 남북을 동시에 새까맣게 내려다보는 김정일이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하하, 귀여운지고! 꼴도 보기 싫은 박정희 상품을 묵사발로 만들어라. 우리 부자 60년 통치를 가장 우습게 만드는 자가 무덤에 들어간 지 사반 세기나 된 그 작자거든. 통일 상품 로열티는 지금처럼 꼬박꼬박 바치고. 우리 수령님 아바이께서 만드시고 세계특허까지 받아 놓은 '자주평화연방' 통일 상품은 남조선에서 얼마든지 생산하고 가공하고 판매하되, 매출액의 20%(내가 너무 마음이 좋았나)를 로열티로 꼬박꼬박 바치도록 하라. 민주 상품, 환경 상품 그 따위엔 나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감히 나한테 이걸 들이대는 간덩이 부은 짓은 않겠지! 남조선이 그 문제로 자금 사정이 어려우니 어쩌니 핑계를 대며 한 달이라도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으면 당장 라이선스를 회수해 갈 터이니 명심하도록, 핫핫!'

(2005.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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