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武器산업의 출발점 이야기

1971년11월9~10일

朴대통령은 경제기획원에서 방위산업 건설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차관선에 대한 교섭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청와대로 오는 차중에서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실망과 낙심을 토로했다.
金 실장이 집무실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상공부의 吳源哲 광공전(鑛工電) 차관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金실장은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吳차관보는 '오늘 경제기획원 보고 때 배석했었는데 나름대로 방위산업에 대한 생각이 있으니 한번 말씀을 드리고싶다'고 했다. 金실장은 '지금 곧 청와대로 오시오'라고 했다.
두 사람은 진지한 토론을 벌여 몇 가지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무기생산만 전문으로 하는 군공창은 경제성이 없다. 그렇다고 민영군수 공장도 병기수요가 따라주지 않으면 낭비가 심하다. 모든 무기는 분해하면 부품이다. 부품을 정밀 가공하는 기술이 핵심이다. 현대무기는 선진국 수준의 중화학공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다. 중화학공업 건설은 경제의 고도성장, 수출증대, 국제수지의 개선을 위해서도 필수적이지만 방위산업의 기반이다. 따라서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의 일환으로 추진하되 무기의 부품별 뭉치별로 유관공장에 분담시켜 제작케 함으로써 무기수요의 변동에 따른 낭비를 극소화시킨다.
1970년대의 한국을 크게 변모시킬 중화학공업-방위산업 동시 건설 전략의 대강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金실장은 吳차관보의 손을 이끌고 朴대통령 집무실(서재)로 들어가 직접 대통령께 보고하도록 했다.
朴대통령은 여러 각도로 질문을 했는데 저녁 식사시간이 다 될 때까지 세 시간이 넘게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朴대통령은 吳차관보의 건의에 대체로 동의했으나 본격적인 대량생산에 4~5년이 걸린다는 말에는 불만이었다. 그는 북한군의 동향이나 해외 미군 감축 방침을 고려할 때 2~3년내에 생산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사람이 서재를 물러나와 얼마 되지 않아 대통령이 金실장을 찾았다.
'내가 들어보니 방위산업뿐 아니라 중화학공업건설도 직접 챙겨야 하겠어. 吳차관보를 청와대에서 일하도록 하시오'
'그러시다면 제2경제수석실을 신설하여 吳차관보에게 그 일을 맡기고 차관대우 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장 내일 발령을 내시오. 그리고 국방장관과 국방과학연구소장에게는 즉시 병기개발을 시작하라고 전하시오. 대통령 지시라고 하시오'
다음날 朴대통령은 서재에서 吳차관보에게 임명장을 준 뒤 선 채로 세 가지 지시를 또박 또박 내렸다.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은 현재 초비상 상태라고 판단된다. 우선 예비군 20개 사단을 경장비 사단으로 무장시키는 데 필요한 무기를 개발 생산토록 하라. 60mm 박격포도 생산하라. 청와대에 설계실부터 만들어서 직접 감독하라. 나도 수시로 가 보겠다. 처음 나오는 병기는 총구가 갈라져도 좋으니 우신 試製品부터 만들어라. 그러고 나서 개량해가면 쓸 만한 병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우수한 인재를 동원하라. 북한군의 최근 동향에 대해서는 李厚洛 부장을 만나 설명을 듣도록 하라'
이 순간 공군장교 출신인 吳수석은 朴대통령이 군지휘관처럼 지시한다고 생각했다. 그 또한 차렷자세였다. 하머터면 거수경례를 할 뻔했다. 吳수석은 '예 알았습니다'라고 크게 말했다. 다시 군대에 입대한 기분이 들었다.
吳수석은 그 길로 청와대 옆 궁정동의 정보부장 사무실로 갔다. 李부장은 '지금 각하로부터 지시를 받았다'면서 곧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일선은 급박합니다. 북괴는 부대를 일선으로 이동시키고 있고, 탱크들도 휴전선에 바짝 붙여놓았어요. 그런데 우리의 대비는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 정보부의 판단입니다. 우리의 M1 소총은 북한측 아카보소총보다 성능이 떨어지고 그나마 자동장탄이 안된단 말이에요. 하루속히 M-16으로 교체해야겠는데 현역만 바꾸는 데도 5~6년이 걸립니다'
李부장은 캐비넷을 열고 총 한 자루를 꺼내어 주면서 말했다.
'이것이 서독군에서 채택한 총인데 구조가 아주 간단합니다. 참고로 해서 만들어보시오. 지금 일선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탄약입니다. 심지어 탱크가 쳐들어올 때 결사대가 지뢰 한개씩을 메고 뛰어드는 육탄전이라도 해야 할 판인데 그런 숫자의 지뢰도 없다는 보고요. 吳동지, 나라를 위해 死力을 다해주시오!'
'예,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에 한번 다녀오시오. 모든 병기와 탄약을 자급자족하고 있다고 해요'
吳수석은 이날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몸과 마음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분위기와 결심에 완전히 휩싸이게 되었다. 군복은 안입었지만 다시 입대한 것이다. 총사령관은 朴대통령, 전략참모본부장은 金正濂 실장, 나는 방위산업담당 참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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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으로부터 병기개발 시제품 긴급개발 지시를 받은 국방과학연구소는 한달 반안에 소총과 박격포를 만들어야 했다. 총포담당 洪判基 소령(뒤에 대령 예편, 연구소 부소장 역임)은 申應均 소장의 지시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해보겠습니다.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합니다. 작동도 할 수 있습니다. 기능상은 가능합니다. 다만 성능만은 보장하지 못합니다'
무기 제작에 들어가는 특수강을 구하기 위해서 연구원들은 시중 철물상과 청계천 고물상을 뒤졌다. 3.5인치 로켓포의 경우 도면이 없었다. 로켓 분야 담당이던 具尙會 박사(후에 연구소 부소장 역임)는 육군에서 쓰던 포를 빌려와 해체하고 부품의 치수를 정밀측정하여 逆설계를 했다. 그는 또 사무실에 같이 근무하던 徐廷旭 박사(뒤에 과기처 장관 역임)가 옛날에 청계천에서 구했던 3.5인치 로켓포의 미군기술교범을 참고로 하여 부품 및 조립도를 만들었다.

1971년12월17일

청와대 대접견실에는 샹데리아 불빛이 찬란했다. 유사이래 최초의 國産 병기가 전시되었다. 60mm 박격포, 로켓포, 기관총, 소총류. 새로 칠을 한 병기들은 무기가 아니라 예술품처럼 보였다. 朴대통령은 申應均 소장에게 치하의 말을 한 뒤 진열대쪽으로 다가갔다. 침묵이 흘렀다. 그 순간 대통령을 따라 들어왔던 洪性澈 정무수석이 자신도 모르게 '와!'하고 소리를 냈다. 朴대통령은 그를 향해 뒤돌아보더니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만든 것이야. 금년도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공업도 이 정도로 발전된거야. 그런데 언제 試射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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