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內 잔류 日本人

종전 후 북한 땅에 남아있는 日本人은 35명, 日本정부로부터도 오랫 동안 잊혀져, 北韓 땅에 묻혀 이미 흙이 되어버린 日本人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14. 8. 31. 産經新聞 




【挿絵で振り返る「アキとカズ」】(22)北朝鮮はたった36人しか残留日本人を帰さなかった



終戰 이전에, 지금의 北韓지역에는 당시 日本이 만든 동양최대의
화학공장인 '興南工場'과 그곳에 전력을 공급해 주는 '水豊댐'이
있었고, 철광석이나 석탄 등
광물자원도 풍부하여 그 쪽 지역에서
일하는
기술자나 노동자 등 약 30만 명의 日本人이 있었다. 終戰時
에는,
소련軍을 피해 만주(現中国東北部) 쪽으로 와 있던 日本人
피난민까지 합쳐 약 32만 명의 日本人이 北韓,
만주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終戰時 소련軍의 침공이 몰고 온 비극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北韓 지역에서 빠져 나오려는
日本人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조직적인
이동(탈출)이 허락되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각자 자력으로 조국 日本 땅을 향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련軍은
일찍이 美軍이 지배하는 남쪽 지역(지금의 한국)과의
경계선인 38度線을 봉쇄해 버렸다. 越境을 시도하는 者에게는 가차
없는 총탄세례가 퍼부어졌다.


【挿絵で振り返る「アキとカズ」】(22)北朝鮮はたった36人しか残留日本人を帰さなかった


꼼짝하지 못하던 日本人들은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열악한 환경으로
콜레라 등이 만연하고, 식사배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갔다.

작가인 '이쓰키 히로유키'(五木寛之,81세)씨도 平壌에서 종전을
맞았던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당시 13세였다. 모친은 죽고,
이쓰키(五木)씨는 부친과
어린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필사의 각오로 
38度線을 넘었다.
그리고, 당시는 남쪽 지역에 속해 있던 '開城'의
美軍 캠프에
도착하여 구사일생으로 일본으로의 탈출에 성공하게 
됐다.

이쓰키(五木)씨의 모친과 같이 혼란스럽고 가혹한 환경 하에서 목숨을
잃은 日本人은 3만 5000명 이상이 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1956년에
이슈화된 '(북한內 잔류) 日本人 귀환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
북한은 1000명이나 2000명까지 추측되던 잔류 日本人 중에,
불과
36명밖에 귀환시켜주지 않았다. '이 정도밖에 (일본으로의)
귀국
희망자가 없다'는 것이 당시 북한의 이야기였다.


【挿絵で振り返る「アキとカズ」】(22)北朝鮮はたった36人しか残留日本人を帰さなかった


그런데,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당시는 전후 11년 시점이었는데,
어렵게 주어진 이같은 그리운 고국으로의 귀환 찬스를 마다할 리
없는 것이다. 그 때 이후로 北韓은 (납치 피해자 外) 잔류 日本人을
귀국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 日北협의로, 당시 北韓에서 죽은 日本人의 유골반환과
'잔류日本人'의 귀국문제가 재차 주목을 받고 있다. 전후 69年,
'너무 늦었다'고 할 만하다. 잔류日本人은 이미 '35명'
밖에는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日本정부로부터도 오랫 동안
잊혀져, 北韓 땅에 묻혀 이미 흙이
되어버린 日本人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만큼은 '귀국 희망자가 이것 밖에 안된다'는
式의
어처구니 없는 北韓의 변명 따위에는 절대 속아서는
안된다.   




     http://youtu.be/8JDr_z8AU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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