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終戰결단'을 둘러싼 昭和天皇과 측근들

 2014. 9. 9. 産經新聞 

9日 公表된 <昭和天皇実録(소화천황실록)>의 記述内容에는,
昭和20年(1945年)
8月15日 終戦과 관련하여, 昭和天皇이 리더십을
発揮9발휘)했던 모습이,
宮中 側近(측근)들이나 閣僚(각료)들의
謁見内容(알현내용) 등을 통해 새롭게 알려졌다.
昭和天皇은
戦時中, 陸海軍 上層部로부터 連日 報告를 받았는데,
悪化(악화)되고
있는 戦況을 詳細하게 把握(파악)하고 있었던 점이 '終戰결단'
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実録에 의하면, 昭和天皇이 終戦의 뜻을 最初로 明確(명확)하게 밝힌
시점은, 1944年 9月26日이다. 側近인 '기도 고이치'(木戸幸一)
内大臣을 불러,
<武装解除 또는 戦争責任者 問題를 除外(제외)한 채
和平을 実現할 수 없겠는가,
領土(영토)는 어떻게 처리되든 문제 없을
것> 등의 발언을 했다.
기도(木戸) 内大臣은, 이를 極秘事項(극비사항)으로
'시게미쓰 마모루'
(重光葵) 外相에게 전했다. 당시는, 陸海軍 모두
戦争継続(전쟁계속)의 意思를
강하게 갖고 있었지만, 昭和天皇은 이미
慎重하게 終戦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오키나와(沖縄)戦에서 日本軍의 組織的 戦闘의 終了(종료)에 대한
報告를 받은
1945年6 月20日 밤(夜), 天皇은 고쿄(皇居, 천황의
거처)에 놓여진 반딧불
("509)을 1時間이나 바라보고 있었다고, 実録은
記述한다. 
2日 後인 6月22日,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首相,
'도고 시게노리'
(東郷茂徳) 外相,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陸相,
'요나이 미쓰마사'(米内光政)
海相,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参謀総長, '도요다 소에무'(豊田副武)
軍令部総長을 불러 懇談会(간담회)를
開催한다. <戦争의 終結에 대해서도 속히
具体的 研究를 하라>는
요구였다. 実録에서 昭和天皇이 軍의 最高 간부
에게 戦争終結의
希望을 表明한 記述로는 이것이 최초다. 다만, 당시는,
条件付(조건부)
終戦을 모색하고 있었다.


昭和天皇이 '포츠담宣言' 受諾(수락)을 決意하며 明確한 리더십을
発揮하게
된 것은, 소련参戦 情報를 얻은 8月9日 午前부터다. 10日
未明의 御前会議에서
<결단>을 내려, 그 후로도 前首相인 重臣들을
불러 意見을 聴取(청취)하거나 
抗戦派인 '아나미'(阿南) 陸相을
説得하거나 하는 등의 모습이 実録에
기재돼 있다. 스즈키(鈴木) 内閣
発足부터 終戦까지의 4개월간, 側近들에
의한 謁見回数(알현회수)는,
'기도'(木戸) 内大臣이 最多인 102回, '우메즈'(梅津)
参謀総長이 55回,
'스즈키'(鈴木) 首相이 43回 등이다. 和平派와 抗戦派의
意見이 
대립하는 가운데, 政府와 軍部의 内部 사정에 정통한 기도(木戸)
内大臣의 意見을 들어가며 終戦으로의 길로 접어들었다.


'스치다 히로시게'(土田宏成)・ 간다(神田)外語大 准教授(준교수,
日本近現代史)는,
<昭和天皇이 終戦을 決断(결단)하기에 이른 것은, 
大規模 空襲(공습)과 오키나와(沖縄)戦,
原爆投下 등의 惨禍(참화)에
衝撃을 받아, 国民과 国家의 存続(존속) 危機를 느끼게
된 것도 한 가지
요인으로 보인다>고 指摘(지적)했다.


'終戰결단'을 둘러 싼 昭和天皇과 측근들(1945. 4. 7 ~ 8. 15)

終戦の「ご聖断」をめぐる昭和天皇と側近ら(昭和20年4月7日~8月15日)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