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죽음과 징용 간 형의 歸還(귀환)-②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②/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살림살이가 자꾸 기울어져 갔다.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집안 살림과 농사일에 家長 역할을 했다.

[주] 아래 글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나는 반에서 늘 우등생이었고 산수를 제일 잘했다. 1학년 말에는 틀림없이 1등을 할 것이 확실하여 통지표(성적표)를 받으면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리라고 생각했는데 나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슬픈 일이 발생했다.

1943년 가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초상집에 다녀왔고, 그곳에서 전염되어 어머니가 장질부사로 자리에 눕게 됐다. 지독한 열병으로 머리가 다 빠지고 백약이 무효이며 그 당시에는 죽기만을 기다리는 무서운 병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지극한 간병으로 어머니는 장장 두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미라’같이 바짝 마른 몸으로 병석에서 일어나셨는데, 지쳐버린 아버지가 또 자리에 눕게 됐다. 열이 펄펄 나고, 무슨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으며, 자리에 누운 지 나흘 만에 숨을 거두셨다. 그해 음력 12월10일, 54세로 아직 정정한 나이에 떠나셨다. 나의 머리 위에 하늘이 무너졌다. 아버지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앞이 캄캄했다. 그때 징용 간 형은 이 슬픈 소식도 몰랐고, 열 살밖에 안 된 내가 상복을 입고 아버지 상여 뒤를 따라갈 때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신 亡人(망인)보다도 어린 내가 더 측은해 많이 울었다고 한다. 

어쨌건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위로 두 누님이 시집을 갔고, 우리 가족은 늙고 병약한 어머니와 징용 간 형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젊은 형수와 철없는 나, 이렇게 세 사람뿐이었다. 형수는 나보다 12년 연상이었고 참으로 예뻤다.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아버지 생존 시에는 그렇게 어려운 줄 모르고 살았으나, 아버지가 떠나시고 나서 무슨 일인지 모르나 살림살이가 자꾸 기울어져 갔다. 나는 그 어린 나이에 학교를 다니면서 집안 살림과 농사일에 家長(가장) 역할을 했고 힘든 일이 있으면 아랫집 사촌 형이 거들어 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논일과 밭일을 했고, 산에 가서 아궁이에 땔나무감을 해오고, 똥통, 오줌통을 메고 고추밭에 가서 거름을 주고, 지게를 지고 벼 가마니를 나르고, 보리밭 채소밭에 가서 풀을 매고, 밤에는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짜고, 어른 농부들이 할 수 있는 농사일을 모두 따라 했다. 그래도 나는 희망을 품고 열심히 일했다. 형이 귀국하면 그가 아버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형은 1919년생, 나보다 14년 연상이었다.

태평양 전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했고 일본 놈들은 더욱더 날뛰고 조선 사람들을 혹사했다. 놋그릇, 놋대야, 놋수저, 심지어 요강까지 鍮器製品(유기제품)은 모조리 거두어갔다. 우리 어린 학생들까지 산에 가서 관솔을 따다 바치게 하고 ‘칡넝쿨을 벗겨오라’, ‘풀을 베어 퇴비를 만들어오라’, ‘노력동원에 나오라’고 했다. 학교수업은 2차적이었다. 

8·15 해방

1945년 여름에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운동장에서 무엇인가 하고 있을 때 미국 공군 폭격기 B-29가 그 신비한 비행운을 길게 끌면서 아주 높은 상공에 나타났다. 그때 전교 학생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인근 콩밭에 뛰어 들어가 숨었던 일이 생각난다. 일본과 미국과의 전쟁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 후 얼마 지나서, 그러니까 그날이 8월15일이었다. 일본 천황이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한다는 항복 선언이 라디오를 통해 선포됐다. 우리는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고 어리둥절했으나 面民(면민)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모조리 쏟아져 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을 때 비로소 우리나라가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났음을 느꼈다. 어린 나이였지만 우리도 덩달아서 기뻤다. 그러고 나서 학교에서는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일본말은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일본말로 된 교과서는 모조리 운동장에 내놓은 뒤 불태웠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새로운 변화가 눈에 보였다. 일본사람들이 짐을 꾸리고 떠나는 것을 보았고, 마을 앞 신작로로 코가 크고 이상한 모자를 쓴 미군들이 지프차를 타고 지나갔다. 어쩌다 그들이 길가에서 휴식을 하면 마을 아이들이 몰려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초콜릿’과 ‘검’을 얻어먹었다. 우리는 낄낄거리며 ‘헬로’, ‘오케이’, ‘땡큐’를 배웠다. 해방 직후 마을에는 미국의 구호물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각종 통조림, 당과류,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설탕 가루, 어떤 사람들은 커피가루를 물에 개어 고약이라고 상처에 바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코카콜라’는 참으로 신비한 맛을 갖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생사가 묘연했다. 전후 2년이 지나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이런 짧은 소식이 배달됐다. ‘小子客地眠食如前(소자객지면식여전)’-형이 살아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다가 1948년 가을, 아랫집 사촌 형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태수’ 형이 지금 저기에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지고 오던 지게를 벗어 던지고 형이 오고 있는 동구 밖으로 달려갔다. 분명히 형이 오고 있었다. 반가운 눈물인지 무슨 눈물인지 눈물이 쏟아졌다. 형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했기 때문이다. 비쩍 마른 몸매에 다 떨어진 일본 군화 ‘지카다비(地下足袋)’를 신고 추하기 그지없는 작업복에 쿨렁쿨렁한 배낭 하나를 메고 걸어오고 있었다. 틀림없는 일본군 패잔병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과 온 마을이 형의 생환을 기뻐했고 환영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뻐한 사람은 우리 형수였을 것이다. 향후에 형은 이 형수에게서 아들 셋, 딸 셋 6남매를 얻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가난했지만 우리 가족은 새로운 활기를 찾고 행복했다. 아버지가 떠났을 때의 슬픔을 극복할 만큼 큰 희망과 의지를 되찾았다. 든든한 형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꽁보리밥에 짠 김치와 시래깃국을 먹고 살아도 좋기만 했다.

그러나 세상 일은 우리가 맘먹은 대로 기대했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형은 내가 상상했던 그리고 기대했던 그런 형이 아니었다. 형은 형수와 어울려 참으로 행복했지만 늙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했다. 우리는 노랫말 그대로 부엌 하나, 방 두 개짜리 초가삼간에 살았는데 형 내외는 안방에서 기거했고, 어머니와 나는 건넌방에서 기거했다. 어머니는 모시 길쌈을 하여 살림에 보탰고 나는 들에 나가 참게를 잡아다 팔고 형을 도왔다. 그리고 밤에 우리 모자는 이불 속에서 소리 나지 않게 많이 울었다. 아무도 모르게 우리 모자는 불연속선의 기후 밑에서 살았다.

1945년 8·15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는 북위 38도선으로 남북이 분단됐다.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주둔하여 일본군 무장해제를 실시했다. 우리는 이것이 잠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으나 결국은 끝내 통일된 독립국가가 못되었다. 후에 남북분단의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리고 한반도 전체가 공산국가가 되지 않고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국민국가가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을 군정장관으로 하고 승전국인 미국이 서울에 군정청을 두고 대한민국이 탄생할 때까지 산파 역할을 했다. 1925년에 박헌영이 창당한 조선공산당이 일정 때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지하에 잠복해 있다가 8·15 해방이 되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북한 김일성의 사주에 의해 1946년 11월 당명을 ‘남조선로동당’ 즉 ‘남로당’으로 바꾸었다. 이 남로당 세력이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제주도 4·3폭동, 여수·순천 반란사건 등을 주도해 국내 정세는 극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倭政(왜정) 36년 동안 우리나라는 국내외에서 독립투쟁을 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김구 선생이 주도한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중국에서 피나는 독립투쟁을 했지만,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결정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해방은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다.

그러면 왜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었는가.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국무장관을 역임한 딘 러스크(Dean Rusk)의 회고록《As I Saw It》에서 밝혀진 역사적 진실은 이런 것이었다. 독일을 상대로 싸웠던 대서양전쟁과 일본을 상대로 싸웠던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은 지쳐있었다. 1945년 2월12일 얄타 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연합군의 자격으로 對日(대일)선전포고 할 것을 권유했다.

그 당시 확실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소련은 1945년 4월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거하고, 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일본의 패전이 거의 확실시 되자, 8월8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불과 일주일 동안 참전하고서 연합군 행세를 하게 됐다.

얄타 회담에서 제안했던 대로 전쟁이 끝나면 양국은 지상군 최전방에서 반경을 긋고 일본군 무장해제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 미군은 오키나와까지 와 있었고 소련군은 함경북도 청진까지 진주해 있었다. 약속대로라면 일본 본토는 미군의 관할구역이 되고 한반도는 제주도까지 소련군의 관할구역이 된 셈이다. 일본이 항복한 직후 워싱턴의 백악관에서는 대통령 주재로 국무장관과 해군장관 등 국가 수뇌들이 전후 한반도 문제를 숙고하고 있을 때 당시 육군 작전국 정책과 과장이었던 찰스 본스틸(Charles Bonesteel) 대령과 선임 장교 딘 러스크(Dean Rusk)가 회의장에 급히 뛰어들어가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을 극구 반대했다.

만일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을 허용한다면 한반도는 틀림없이 공산국가가 될 것이며, 소련의 위성국이 되고, 不凍港(부동항)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된 소련은 세계 2차대전에서 최고의 전리품을 획득하게 되는 셈이며, 이미 공산화된 중국과 합세해 지구상에서 대적이 없는 패권국이 되고, 미국은 죽 쑤어 개에게 주는 것이 된다. 이런 것을 蚌鷸之勢(방휼지세))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미국정부는 이 두 젊은 장교의 주장을 인정하고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을 저지하기 위한 대책을 심사숙고한 끝에 이미 함경북도에 와 있는 그들을 몰아낼 구실이 없어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설정한 것이 바로 북위 38도선, 즉 38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모르는 대다수 국민은 무조건 미소 양대 강국이 우리나라를 분단시킨 원수로 생각하고 있다. 사실은 우리가 미국을, 특히 위에서 언급한 두 장교를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때 38선이 설정이 안 되었더라면 대한민국은 탄생하지도 못했고 우리는 그동안 김일성과 김정일의 통치를 받았을 것이며 생지옥에서 시달렸을 것이다. <계속>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