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제69조는 대통령의 취임선서이다. 대통령이 임의로 선서하지 못하게 헌법으로 아예 못을 박았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이것은 헌법 제66조 중 대통령의 책무를 다시 한 번 엄숙히 상기시킨 것이다.
[②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영토의 보전·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③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
왜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통령에게 자유로운 취임선서를 허락하지 않았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청와대의 대통령이나 서울역의 노숙자나 똑같이 법 아래 있다는 것을, 헌법에 따라 국민으로부터 최고의 권력을 잠시 위임받았음을 대통령 당선자가 어느새 잊어 버리고 하늘의 점지를 받거나 전생에 큰 덕을 쌓아 용상에 오른 것으로 착각하고서 헌법 위에 올라서려고 하는 망상을 전국민이 보는 데서 무참히 꺾기 위해서이다.
과연, 1987년 이래 절차적 민주주의에 따르면 한 점 부끄럼 없는,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정통성을 확보한 6공화국의 4대통령들은 헌법을 잘 수호하였는가. 국가를 잘 보위하였는가. 대한민국의 빛나는 전통을 잘 계승했는가.
2004년은 대한민국 역사상 치욕의 한 해라고 본다. 헌법이 청와대에서나 서울역에서나 방송국에서나 길거리에서나 만주의 탈북자처럼 유린되었기 때문이다. 6공화국 제1기부터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5공 청문회'니, '역사 바로 세우기'니, '제2의 건국'이니, '과거사 청산'이니, 하면서 UN이 보장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죽기살기로 부정하고 스스로 정통성(正統性)의 왕관을 쓴 후 다이너마이트를 곳곳에 설치하여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강의 기적을, 대한민국의 빛나는 전통(傳統)을 보이는 족족 파괴하여 김포 매립지로 5년 임기 내내 실어 나르며 헌법 제66조 제2항의 대통령의 책무 중 '국가의 계속성'에 대한 책무를 여지없이 조롱했지만, 2004년처럼 헌법을 법의 전당에서 끌어내어 박물관의 칼집에 집어넣은 적은 없었다.
2004년 헌법 유린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대통령 탄핵 건. 또 한 번은 행정수도 위헌 건.
헌법의 최고 해석 기관이자 대통령이나 국회처럼 당당한 헌법 기관인 헌법재판소는 국회에서 탄핵소추의결한 대통령에 대해 탄핵심판을 진행하는 동안 불난 집의 골방에 갇혀 지내야 했다. 9·11 테러를 CNN이 24시간 내내 속보로 전하듯 탄핵 반대 '올인' 방송으로 지펴진 여론의 불은 용암처럼 뜨거웠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피워대는 노골적인 협박의 연기는 최루탄처럼 매캐했다. 국회도 헌재도 헌법에 따라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무거운 책무를 수행했지만, 법을 어긴 대통령을 탄핵 소추하는 순간 대한민국은 무법 천지가 되었다. 순식간에 '떼법'이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을 접수했다.
역사적 순간에 헌재가 뜨거운 불과 매캐한 연기 속에 갇혀서도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여 일부 죄를 인정하여 대통령에게 '집행유예' 선언을 내리자, 당장이라도 헌재를 불태우거나 질식시킬 것 같던 여론의 불은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다행히 국회도 야당도 국민도 헌법을 존중하여 고개를 숙이며 돌아오는 대통령을 잔잔한 박수로 환영했다.
그러나 또 한 고비가 있었다. 단지 표를 얻기 위한 즉흥적 공약이었던 행정수도 건설안은 때는 봄비 촉촉이 내리는 춘사월 다시 선거철을 맞아 갈등의 씨앗으로 전국의 산과 들에 뿌려졌다. 계획과 착공과 건설까지는 최소한 한 번의 대선과 또 한 번의 총선이 있기 때문에 권력의 단맛을 맛본 새 정부와 그 지지세력이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은 포기하기 힘든 여의봉이다. 아이디어가 고갈된 그들은 어찌 보면 측은하다.
다행히 미라 같던 헌법이 부활했다. 이번에는 헌재가 위헌 여부를 가리는 동안 여론의 불도 없었고 협박의 연기도 없었다. 여당은 다수당이 되자 헌재가 알아서 눈치를 슬슬 살필 줄 알았던 모양이다. 문제는 그 다음! 행정수도 건설이 위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지자, 언제는 헌재의 결정을 기꺼이 받아들이더니, 이제는 아예 자신을 살려 준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여당과 방송과 친여 시민단체가 헌재에 침을 뱉고 낚싯대를 던지고 화염병으로 위협했다. 감히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들의 결정을 무시한다며! 언제는 국회의 결정을 역사를 더럽힐 정치 쿠데타라고 하더니만.
마침내 2005년 2월 23일, 여야 합의로 '행정중심 복합도시'안이 확정되었다. 헌재의 위헌 결정이라는 명분과 호서의 표심이라는 실리 사이에서 여야가 곡예를 부려, 호남과 영남에 이어 이리저리 흩어지던 모래에서 행정수도란 미끼 하나에 단번에 콘크리트로 변한 호서에 '돈 될만한 부서'들은 대부분 안겨 준다는 계획이다. 정치인의 권력욕과 일부 지방의 재물욕이 야합하여 이미 박물관에 들어간 헌법이 다시는 밖으로 기어 나오지 못하도록 말로는 도난 방지를 위해서라며 방탄 유리를 설치해 준 셈이다.
지역균형개발과 수도권비대화 방지가 헌법을 유린하면서까지 정략적(政略的)이고 미신적이고 단기적인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갈기갈기 찢음으로써만 달성될까. 헌법을 한결 존중하면서 전략적(戰略的)이고 과학적이고 장기적인 방식으로 대한민국의 동서남북을 화기애애하게 똘똘 뭉치게 하면서 달성할 수는 없을까.
터널 하나 뚫는 데 몇 년씩 걸리고 방조제 하나 쌓는 데 부지하세월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영원히 쌓지 못할지 모르는데, 행정도시를 과연 착공이나 할 수 있을까. 설령 행정도시를 건설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의 말 한 마디면 10년 공사도 당장 중지하는 나라에서 과연 대통령과 500리나 떨어진 곳에 집무하는 장관들이 두 집 살림하면서 무얼 할 수 있을까. 차안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낼 코드 장관들이, 길어야 1년 짜리 예스맨 장관들이 무얼 할 수 있을까.
어떤 형식이든 조만간에 통일이 될 건데, 그러면 대통령이 개성 근방에 또 통일행정수도를 만든다고 했는데, 2000억 달러를 돌파한 외환보유고도 초근목피마저 말라 버린 북한에 쏟아 붓다 보면 6개월도 안 되어 바닥 날 건데, 과연 한가하게 행정도시를 건설할 수 있을까.
문제는 하드웨어가 아니다. 각 행정 부서를 지방마다 하나씩 이관한다고 해서 균형발전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문제는 소프트웨어다. 지금처럼 소프트웨어는 그대로 두고 하드웨어를 괴상망측하게 바꾸면 조선시대보다도 못할 게 뻔하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움켜쥐고 있는 권한을 대폭 지방으로 이양하면 절로 해결된다. 행정만이 아니라 국세를 대대적으로 지방세로 바꾸어 지방자치단체가 스스로 재정자립을 달성하고 다투어 기업을 유치하도록 경쟁을 붙여야 한다. 단, 중앙정부는 환경과 개발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지속 가능한 개발 sustainable development) 자치단체를 때로는 감시하고 때로는 후원해야 한다. 악한 자치단체가 돈에 눈이 멀어 환경을 마구 파괴하는 것은 암행어사처럼 감시하되, 환경 근본주의자들이 구석기시대로 돌아가려고 '뗑깡'을 부리면서 실은 새로운 이권 집단과 권력 집단으로 군림하려는 작태는 회초리를 쳐서 선한 자치단체를 수호천사처럼 후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제발 이제 그만 솔직해지자. 충청도 표 얻기, 이제 이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충청도 유치생만이 아니라 강원도 유치원생도 안다. 눈 가리고 아옹하면 이제 [말아톤]의 윤초원이도 안 속는다. 영 재미없어 한다. 이왕 표를 얻으려면 정정당당히 얻자.
무엇보다 민주주의 좀 하자.
민주주의의 첫걸음은 법을 지키는 것! 특히 법의 법인 헌법을 지키는 것! 법이 시대에 뒤떨어졌으면, 국회에서 침과 주먹과 어깨 대신 농담과 논리와 감동으로 새 법을 제정하여 그 법을 지키되, '새' 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헌' 법을 칼같이 지키자.
제발 민주주의 좀 하자.
껍데기는 가라! 법치(法治)의 알맹이는 오고 인치(人治)의 껍데기는 가라!
(2005.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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