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日誌(유신 직후)

1972년10월18일 朴대통령은 바빴다. 전날 국회를 해산하고 헌정을 중단시킨 뒤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5.16에 이어 제2의 쿠데타를 감행한 그는 11년 전 한강을 건너온 기분으로 임했다. 비상사태 선포 전후하여 朴대통령을 만난 사람들은 찬 바람이 돌 정도로 결의에 차 있던 朴대통령이 야전사령관처럼 보였다고 기억한다.
朴대통령은 대충 네 가지 얼굴을 갖고 있었다. 국가경영자, 즉 CEO로서의 얼굴, 교사로서의 얼굴, 전략가로서의 얼굴, 그리고 권력자로서의 얼굴이 그것이었다. CEO 朴正熙는 치밀한 사람이고, 교사로서의 朴正熙는 엄격하되 자상했고, 전략가로서의 그는 深謀遠慮(심모원려)의 사색가였으며, 권력자로서의 朴대통령은 냉엄하고 냉혹했다. 이해 10월 하순의 朴正熙는 바로 권력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18일 아침 朴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연구하고 있었던 헌법학회장 韓泰淵 교수를 불러 20분간 의견을 들었다. 10시5분부터 1시간20분 동안 그는 중앙대책협의회의를 소접견실에서 주재했다. 이 자리에는 당시 한국의 국가핵심지도부가 전원 참석했다.
金鍾泌국무총리, 丁一權 공화당 의장, 金溶植 외무장관, 金玄玉 내무, 申稙秀 법무, 劉載興 국방, 閔寬植 문교, 尹胄榮 문공장관, 李厚洛정보부장, 李敏雨 계엄부사령관, 金正濂 비서실장, 朴鐘圭 경호실장, 洪性澈 정무수석, 金聖鎭 공보수석, 金詩珍 민정수석.

유신 쿠데타의 사령관은 朴대통령, 작전참모는 李厚洛부장이었고, 사령부는 사실상 정보부였다. 이때의 정보부는 정부위에 군림하고 있던 권력자 박정희의 채찍이요 고삐였다. 정보부의 힘은 朴대통령의 신임과 부장의 대통령에 대한 접근권에서 나오고 있었다.
따라서 이날 회의도 李厚洛 부장이 주재하다시피하면서 각 부처의 대책을 점검했다. 회의가 끝난 뒤 朴대통령은 李부장, 金총리, 丁의장을 따로 만나 은밀한 이야기를 25분간 나누었다. 金비서실장의 배석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날 오후 4시부터 약30분간 朴대통령은 全軍의 주요지휘관 53명과 劉載興국방장관, 盧載鉉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崔世寅 1군사령관, 朴元根 2군 사령관을 불러 비상조치의 배경을 설명했다. 총구로써 張勉정부를 뒤엎고 정권을 잡았던 朴대통령은 권력의 기본은 군대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朴대통령은 이날 저녁 6시47분부터 9시까지 궁정동 中情사무실, 즉 10.26의 무대가 되는 安家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참석자들은 白斗鎭 국회의장, 金鍾泌 총리, 丁一權 공화당의장, 張坰淳 국회부의장, 金溶植 외무, 李秉禧 의원, 李厚洛 부장, 金正濂 실장이었다.

朴대통령은 다음날(19일)에도 중앙대책회의를 주재했다. 그는 後宮 일본대사를 초치하여 비상조치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주었다. 오후 네시 사위인 韓丙起의원이 찾아와 50분간 장인을 만나고 갔다. 韓의원의 부인은 朴대통령과 첫부인 김호남 여사 사이에서 난 朴在玉씨였다.

유신 선포 나흘째인 10월20일 朴대통령은 중앙대책회의를 주재한 뒤에 언론계 인사들을 불러 비상조치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합통신 사장 李源京, 원로 언론인 薛國煥, 기자 출신 정치인 徐仁錫, 동양통신 기자 沈鍊燮, 그리고 李桓儀 문화방송 사장이 불려왔다. 대통령은 또 내무장관, 서울 부산시장과 지방의 지사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놓고 비상조치를 설명해주었다.
10월21일 필립 C. 하비브 미국대사가 저녁7시에 朴대통령을 찾아와 닉슨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닉슨 대통령은 이 편지에서 내정불간섭 원칙을 천명하면서도 한미동맹관계상 이번 조치에 대한 양국간의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점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하비브 대사는 세 시간 동안 朴대통령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金正濂비서실장과 曺相鎬 의전수석(통역)이 배석했다.
10월22일 朴대통령은 金鍾泌총리를 불러 미국대사가 전해준 닉슨의 친서에 대한 답신에 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金총리가 금명간 워싱턴을 방문하여 닉슨 대통령에게 朴대통령의 친서를 전하고 유신에 대한 설명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朴대통령은 군부의 두 실세인 尹必鏞 수경사령관과 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을 불러 약4시간 요담했다. 수도방위를 책임진 尹장군과 군부의 동향을 감시하는 것이 임무인 姜장군은 육사 8기 동기였으나 직무상 상호감시, 견제해야 하는 처지였다.

朴대통령이 유신선포 넉달 전인 6월에 徐鐘喆 육군참모총장 후임에 盧載鉉 대장을 임명하였을 때 李厚洛 부장은 劉載興국방장관에게 '이 인사를 보면 각하께서 조만간에 계엄령을 펴실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劉載興 회고록-'격동의 세월').
劉장관은 徐총장 후임에 韓信 대장을 대통령에게 추천하고 있었다. 朴대통령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李부장도 韓대장을 밀었다. 6.25 전쟁의 영웅인 韓信 대장은 깨끗하고 강직한 성격으로 해서 군에서 가장 신망이 높았다. 朴대통령은 유신선포에 따른 계엄령을 펼 경우 韓信 대장이 계엄사령관이 되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판단한 듯하다. 계엄령을 펴면 사령관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대통령 다음 가는 강자가 된다. 만약 그 계엄사령관이 정치를 싫어하고 쿠데타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으로서는 불안해진다. 朴대통령은 군인으로서는 韓信을 높게 평가했으나 계엄사령관으로서는 거북했다. 대통령은 그래서 부담이 적은 盧載鉉장군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朴대통령은 수줍어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권력 관리에 관한 한 어떤 도전이나 위험도 허용하지 않았다. 권력을 관리하는 측근들, 즉 정보부장, 수경사령관, 보안사령관, 군요직 인사들에게 朴대통령은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劉載興 국방장관이 유신조치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통보를 받은 것은 金鍾泌총리가 劉장관을 총리실로 오게 한 뒤 곧 발표될 비상조치를 설명해줄 때였다. 金총리는 劉장관에게 동의 여부를 물었다. 劉장관은 '북한과 대화하는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서라도 체제정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군부의 책임자가 비상조치에 동의해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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