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대통령의 면담일지를 읽다가 보면 재미 있는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누구와 만나는가이기 때문이다. 1973년1월7일은 일요일인데, 이날 朴대통령은 首警司 참모장 孫永吉 준장과 공수특전단장 全斗煥 준장을 청와대 집무실로 불렀다. 면담기록엔 낮 12시24분부터 오후 2시41분까지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점심식사를 함께 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40대 초반의 젊은 준장을 이렇게 대우하니 이들이 군내에서 하나회를 만들어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孫, 全 두 준장은 육사 11기 출신이었다. 孫준장은 위관장교 시절 朴正熙장군의 전속부관으로 따라다녔고, 全준장은 최고회의 의장비서실에서 근무했다. 朴대통령은 장군시절부터 정규육사출신 장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한국군의 미래가 이들에게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격려했다.
盧泰愚 전 대통령은 1955년에 육사를 졸업하고(11기) 朴正熙준장이 사단장으로 있던 5사단에 배치되었다. 중위 시절 朴사단장이 사격장 공사를 지휘하던 그를 불러 점심을 함께 했다. 부대에 돌아가려고 경례를 하는 盧중위에게 朴사단장이 '내가 바닷가로 오리사냥을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盧중위는 '저는 임무가 있어 못가겠습니다'라고 했다.
'무슨 임무?'
'사격장을 닦다가 왔습니다. 그래서 못가겠습니다'
'할 수 없지. 잘 가게'
盧중위가 돌아서는데 朴사단장이 다시 부르더니 '내가 사단을 떠나게 되었어'라고 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아마도 陸大로 갈 거야'
盧중위는 착잡했지만 할 말도 없어서 '잘 가십시오'하고 경례를 붙이고 나왔다. 5.16 군사혁명 뒤 盧소령을 만난 朴의장은 '야 임마, 그때 내가 서운했다'고 했다.
孫, 全 두 사람은 일찍부터 정치장교의 역할을 했다. 1963년2월18일 朴正熙 의장이 민정불참-원대복귀를 선언하자 두 사람은 동기생들과 함께 장충동 의장 공관을 찾아갔다. 이들이 응접실에서 기다리는데 陸英修 여사가 나왔다.
'이 양반이 일을 저질러놓고 다시 군에 돌아가겠다니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이미 내친 발걸음인데 정치를 하셔야지요. 여러분들이 생각을 바꾸시도록 건의 점 해주세요'
朴의장에게 청년장교들이 건의를 하자 의장은 '여러분의 뜻을 잘 알아요. 그러나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라고 했다. 민정불참 선언이 하나의 전술이라는 말투였다.
朴대통령은 全斗煥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하나회를 후원했다. 정보부가 군내 사조직을 소탕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자 방첩대를 시켜 형식적인 조사를 하고 끝내도록 했다. 육사11기의 선두주자였던 全, 孫 두 사람은 중령 시절 청와대 경호를 맡은 수경사 30대대장으로 근무했다. 孫永吉이 먼저였고 그가 全斗煥을 후임으로 추천했다. 朴대통령은 두 사람을 식사자리에 초청하기도 했다.
朴대통령이 키운 하나회 중심의 정규육사출신들은 그 報恩을 10.26 사건 이후에 하게 된다. 全斗煥 국군보안사령관은 합수본부장으로서 朴대통령 시해범 金載圭 일당을 단죄하는 것이 서거한 朴대통령에 대한 의리라고 믿었다. 이들은 국가원수 시해사건은 성역 없이 수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鄭昇和 계엄사령관까지 연행하려다가 12.12사건을 일으키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정권을 향해 진격했다.
朴대통령이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키운 하나회와 정규육사출신 장교단은 10.26 사건 이후에 유신이 매도당하는 분위기에서도 유신의 당위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들은 朴正熙의 죽음을 민주화의 好機로 보고 있었던 정치인들과는 달리 그의 죽음을 국가안보의 위기라고 해석했다. 정규육사출신 장교단에 대한 朴대통령의 오랜 투자는 그의 死後 그의 격하를 막았다.
朴대통령이 키운 하나회 출신들이 그의 사망 후 13년간 한국을 이끌고 가면서 朴正熙에 대한 흠집내기를 잘 막았기 때문이다. 제5공화국 시절 안기부와 문공부의 중요한 일중의 하나는 月刊朝鮮과 신동아에 朴대통령에 대한 폭로기사가 못나오게 하는 막는 일이었다.
손영길과 전두환과 노태우
-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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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3-05, 1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