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後 평양은 생지옥 (귀환 일본인 증언)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 등으로 약 3만 5000명의 日本人이 당시 北韓 땅에서 사망.
2014. 11. 4. 마이니치(每日)신문

굶어 죽고 병으로 죽은 동포(일본인)를 수도 없이 묘지로
운반했다. 
종전 후 北韓의 평양에서였다. 땅이 얼어붙어
시체를 묻을 수 없는
날도 많았다. <정말 생지옥이었다>며
도쿄(東京)都内의 한 남성이
이같은 증언을 편지로 써서
보내왔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당시
소련 땅에서 억류
생활을
했는데 생전에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소련 억류 당시 아버지가,
압수
를 피해 몸 깊숙이 지녔던 관음상(観音像)만이
유품으로 남겨졌다.

남성을 만나 그 체험을 듣게 되었다. <아버지가 남긴
관음상을 소중
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도쿄(東京)都
에도가와(江戸川)区에 사는 
'가토 마사키'(加藤正喜, 83세)
씨가
자택의 불단에 안치해 놓은 관음상을 가리켰다. 쇠로
된 관음상은 10 센티미터 정도의 높이를 하고
있다. 
가토(加藤) 씨의 아버지는 수의사(獣医)로 군마(軍馬)를
관리
하는 직업군인이었다. 당시 국내외 전근이 많아
1940년 경에는 아
이치(愛知)県에서 중국 북동부(舊만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어
머니는 1943년에, 열두 살이던
가토(加藤)씨와 누나 둘, 남동생 둘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가게 된다.
그런데, 1945년 8월 초 아버지는
<위험하니까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소련 참전을
계기로 
여성이나 어린이, 노인들은 열차를 이용해
남쪽으로 피신하기 시작
했다. 거기에 섞여 어머니와
형제들 모두 일본을 목적지로 하여 남하
(南下)하면서
아버지와는 헤어지게 되었다. 

北韓의 평양에 도착한 것은 종전 바로 직전이었다.
日本의 통치는
이미 붕괴하여, 거리에는 해방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식구들 모두는 유곽(遊郭)이었던
건물에 수용되고 말았다.
종전 당시,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오고 한반도
중앙의 38선은 폐쇄되어 많은 日本人들의 남
하(南下)가
좌절되어
어쩔 수 없이 北韓 땅에 남겨지게 되었다.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 등으로 약 3만 5000명의 日本人이 당시
北韓 땅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평양 시내의 용산(竜山) 묘지에는 2400명
이상의 日本人이 매장
되어 있는 것으로 현재 알려지고
있다.

당시, 동포(일본인)들 중에는 北韓 땅에 진주한 소련군에게
모진
일을 당해 자살한 女性도 있었고, 가토(加藤)씨의
누나들은 머리
를 박박 깎았다. 먹을 것이 없어 허옇게 묽은
죽을 나누어 먹어야
했고, 소련군이 먹다 버린 음식을
주워 와 먹기도 했다.
영양실조와 발진티프스로 끝내 숨을
거두어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가는 사람
들이 속출했다. 
가토(加藤)씨는 소련군 막사의 청소와 석탄을 운반하는
일을 할당받았다. 매일 같이 주위 동포 중 누군가가 죽어
나
가는 경우가 발생하여 하루종일 힘든 사역(使役)을
마치고 와서도
또 평양시내에 있는 용산(竜山)묘지로
시체를 운반했다. 성인 시체
는 2명 이상이 달라붙어
운반해야 했다. 
간난아이 시체를, 슬퍼하는 그의 엄마가
배웅하는 가운데 운반한 일도 있다. 겨울이 너무 추워
아침이 되면 시체로 변해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생지옥 그 자체>라고 가토(加藤)씨는
말한다. 1946년
2월에는 김일성(金日成)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 때 열다섯 살이던 가토(加藤)
씨는 김일성(金日成) 실물을
직접 본 기억이 난다. 그 해 여름에,
어머니와 형제들은
평양을 출발한다. 그리고, 1주일을 꼬박 걸어 고생
끝에 겨우 
38선을 넘어 한국 인천(仁川)을 경유하여
야마구치(山口)
県
어머니 친정집(외가)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그 힘든
여정 가운데 다섯
남매 모두를 꼬박 지키느라 어머니는
많은 무리를 해서인지
1949년에 세상을 뜨게 된다. 그리고
그 즈음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는 만주
에서 소련군에게
붙잡혀 모스크바 남동쪽 약 40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마르샨스크' 수용소에 수용됐었다.

가토(加藤)씨는 귀국 후, 야마구치(山口)県에 주둔한
뉴질랜드군(연합군)
병사의 구두를 닦아 생계를 도우며, 
장학금으로 도쿄(東京)에 있는 대학
에도 진학하고 나중에
고등학교 체육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아버지는
만년에
가토(加藤)씨가 있는 도쿄(東京)로 거처를 옮기는데,
이전의 군
대생활과 소련 수용소에서의 참상에 대해서는
거의 입 밖에 내지를 않
았다.  아버지는 <포로가 되었을
때의 치욕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이 
군인의 자세>라며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가토(加藤)씨가
들은 것은, <토마토는 그리 먹고 싶지 않다>는 말 뿐이었다. 
아버
지는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으로 토마토를 재배한 듯했다.

관음상(観音像)은 평소 양친(両親)의 위패 옆에 둔다. 가토
(加藤)씨는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과거의 이런 체험을
조금이라도 후대에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가토(加藤)씨는, 끝으로 이런 말을 했다. <부친 생전에 여러
가지를 좀 자세히 물어봐 둘 것을 그랬다.>



관음상(観音像)을 꺼내 만지는 가토(加藤, 83세)씨
= 도쿄(東京)都 에도가와(江戸川)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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