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 날의 박정희

1973년8월8일 朴대통령은 오전에 鄭韶永 신임 농수산부장관에게 임명장을 주었다. 金鍾泌 총리, 金正濂 실장 등이 배석했다. 朴대통령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집무실에 들어가자말자 金正濂 비서실장이 황급히 들어왔다. 외국통신의 영문기사를 들고 온 그는 '김대중씨가 도쿄에서 납치되었답니다'라고 보고했다. 바로 전에 金聖鎭 공보수석이 그 외신자료를 가지고 金실장 방에 뛰어들어왔던 것이다.

'정말이야! 무슨 일일까?'
朴대통령의 반응도 놀라움이었다고 한다. 金실장이 사무실에 돌아와 한 30분 정도 있으니 대통령이 인터폰으로 '무슨 새로운 소식이 있느냐'고 물었다. 金실장은 외국 통신으로 들어온 속보를 보고했다. 대통령은 집무실로 오라고 했다. 대통령은 金실장에게 '만약 김대중 납치가 사실이라면 네 가지가 상정된다'고 말했다.
'첫째, 중앙정보부의 공작일지 모른다. 둘째, 일본 우익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다. 셋째, 재일거류민단의 과잉충성이 일으킨 사건일지도 모른다. 넷째, 金大中씨의 자작극일 가능성이다. 실장은 즉시 정보부장과 경호실장, 그리고 재일거류민단을 관리하는 부서를 체크하여 보고하라'

대통령 집무실을 물러난 金실장은 李厚洛 정보부장, 朴鐘圭 경호실장, 그리고 유관부서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관련 여부를 물었다. 朴실장은 일본의 우익단체 사람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朴대통령은 그런 朴실장이 몰래 우익인사들을 시켜 金大中씨를 혼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다. 金실장은 대통령에게 '우리 쪽에서는 아무도 관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그렇다면 金大中씨의 하부조직이 자작극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이날 신관회의실에서 週例안보회의를 소집했다. 李厚洛 정보부장도 참석했다.

다음날 朴대통령은 신임 유엔군 사령관 스틸웰 대장을 접견하고 오후엔 정부 여당 연석회의를 주재했다. 8월10일에는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朴대통령은 8월11일엔 오전 11시15분부터 55분까지 李厚洛정보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李부장이, 지금 정보부 공작선이 金大中씨를 납치하여 데리고 오는 중이란 보고를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뒤의 朴대통령 행동으로 미뤄서는 그런 보고가 있었던 같지가 않다.

이날은 토요일이었는데 朴대통령은 오후 2시30분부터 밤10시까지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金振晩 공화당 의원, 조선공사사장 南宮鍊씨와 골프를 함께 친 뒤 식사를 했다. 다음날에도 朴대통령은 오전 11시25분부터 밤10시까지 뉴 코리아 골프장에서 金振晩, 南宮鍊씨와 함께 골프를 쳤다.
8월13일 월요일 오후 3시8분부터 4시37분까지 李厚洛 정보부장이 집무실에서 朴대통령에게 金大中 납치를 실토한 것으로 보인다. 李부장은 '이미 金씨가 한국 땅에 와 있고 오늘 밤에 귀가시킬 작정이다'라고 보고했을 것이다. 金正濂 비서실장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이날 오후 자신을 부르더니 '김대중이가 서울에 와 있대. 놀랍고 엄청난 일이야. 조금이라고 위해가 가해져서는 안되는데...'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한편 金鍾泌 국무총리는 이날 밤 鄭韶永 농수산부장관과 함께 전국의 목장실태를 살펴보고 광주에 들렀다가 金大中씨가 괴한들에게 이끌려 집앞까지 와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朴대통령은 다음날 오전 9시30분부터 20분간 집무실에서 金大中 납치 관련대책회의를 가졌다. 申稙秀 법무장관, 尹胄榮 문공장관, 鄭相千 내부차관, 尹錫憲 외무차관, 李厚洛 정보부장, 金正濂 비서실장이 참석했다. 이날 오후 4시 金鍾泌 총리가 朴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집무실에 들어가니 대통령은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임잔 몰랐어?'
'아,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후락, 이자가 그를 옆에다 갖다놓고나서야 나한테 이야기를 하는 거야'
다음날 朴대통령은 오전 10시45분부터 정오까지 申稙秀 법무장관과 李厚洛 정보부장을 불러 金大中 납치 사건 대책을 논의했다. 朴대통령은 형식적으로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는, 일본에서의 수사를 지켜보기로 했다. 朴대통령은 한편으로 정보부의 李龍澤 국장을 불러 진상조사 특명을 내렸다.

그 전에 李厚洛 정보부장은 金大中씨와 친숙한 李龍澤 수사국장에게 金大中씨를 데려오라는 임무를 부여한 적도 있었다.
李부장은 金大中씨가 외국에 오래 나가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李厚洛 부장은 나에게 직접 가서 설득해 동반 귀국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李부장은, 김대중씨의 일체의 언동에 대해 불문에 부치고 적절한 시기에 정치를 재개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겠다는 조건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갈 준비를 했습니다』
李국장이 李姬鎬 여사에게 전화를 했더니 李여사는 『李국장이 가서 설득해도 그분은 귀국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침 그 무렵 미국에 살고 있던 李여사의 친척이 한국에 왔다. 이 친척을 통해 李국장의 편지와 함께 李여사도 편지를 써서 DJ에게 보냈다. 金大中씨로부터 『나도 이제부터 일절 정치활동은 안 하겠다. 가능하면 미국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답장이 왔다고 한다.
그러자 李여사가 먼저 李국장에게 같이 가자고 제의해 왔다. 李여사는 『내 말은 듣지 않는데, 李국장이 직접 가서 해외 언동에 대해서 불문에 부친다는 보장을 직접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李국장은 李여사의 제의를 李부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李여사에 대한 여권 발급이 자꾸 늦어졌다. 李국장은 『당시 朴대통령이 國法을 어긴 사람을 그냥 두면 안 된다고 반대해 李여사가 가지 못하게 된 것』으로 추측했다.


朴대통령, DJ 납치 사건 지휘자 조사 지시

그런 상황에 1973년 8월8일 金大中씨가 東京에서 납치돼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李姬鎬 여사가 李국장을 잔뜩 의심하게 됐다. 李국장은 『내가 여기에 있는데 언제 내가 납치를 하러 갔겠느냐』고 했더니 李여사는 『본인이 안 가고 아랫사람을 시킨 것』이라고 비난했다. 李국장은 『이것은 내 직위와 직명을 걸고 밝힌다. 내가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없다. 시간을 좀 달라』고 했는데, 金大中씨가 살아서 극적으로 TV화면에 나타난 것이다.
『그 다음날일 거예요. 청와대에서 극비로 즉시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朴대통령은 처음에 「자네가 했나」라고 바로 물었습니다. 아니라고 했더니 동백림 사건 때는 어떻게 잡아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그때는 국내부서에서 수사를 다해서 해외담당차장에게 자료를 넘겼다고 말했습니다. 朴대통령은 「KT(당시 대통령은 김대중씨를 그렇게 불렀다) 건에 대해서 누가 했는지 자네가 한번 조사해봐」라고 지시하면서 「누구한테도 보고하지 말고 은밀히 하라. 자네가 조사하고 있는 것을 알려고 하거나 압력을 넣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보고하라」고 말했습니다. 朴대통령은 그런 면에서는 아주 섬세해요. 저는 그 순간, 朴대통령이 DJ 납치에 개입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李龍澤씨의 증언에 따른다면 그 전날 李厚洛부장은 김대중 납치를 어떻게 수행했느냐에 대해서는 자세한 보고를 대통령에게 하지 않은 듯하다.
李국장은 아무리 그래도 李厚洛 부장에게는 보고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궁정동의 부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李부장은 이미 李국장이 대통령을 만나고 나온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李부장은 말을 더 더듬었고 커피를 연거푸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는 손을 떨었다. 李부장은 「金大中씨가 망명정부를 만들어 首班(수반)으로 취임한다고 해서 급히 데리고 오도록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잘 좀 수습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때서야 李국장은 청와대에 다녀온 것과 대통령으로부터 조사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李부장에게 말해 주었다.
李국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데레왔습니까'
李부장이 설명한 요지는 이러했다.

<金大中씨가 한민통을 만들어 그 의장으로 취임하면 망명정부 수반 행세를 할 것이란 정보가 들어왔다. 망명정부 수반 자격으로서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만나면 연방제 통일에 합의할 것이고 북한측은 한국 정부를 괴뢰시하게 될 것이다. 진행중인 남북대화도 중단될 것이다. 김대중을 평양으로 데리고 가려는 북한의 공작이 진행중이고 김대중씨도 주변 인물들에게 의견을 묻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한민통 결성 대회를 하기 전에, 북한이 손을 쓰기 전에 그를 잡아온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한 뒤 李厚洛 부장은 '장일훈 치안국장을 잘 알지요. 그쪽에서 냄새를 맡은 것 같으니 李국장이 손을 써 신문에 나지 않도록 해줘요'라고 부탁했다. 물러난 李국장은 장일훈 치안국장을 만나 물어보았다. 張국장은 부산 4부두를 관할하는 경찰부서에서 정보가 올라왔다고 했다. 경찰이 오래 전부터 정보부의 공작선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용금호가 며칠 전 밤에 부산 4부두에 닿았다는 것이다. 선원들이 술에 잔뜩 취한 것 같은 사람을 부축하여 내렸다. 선원들은 그 사람의 머리를 웃옷으로 덮어씌웠다. 초소 경찰관이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용금호 선원인데, 술에 취했다'
용금호 선원들은 그 사람을 데리고 앰뷸런스에 탔다. 이를 본 경찰관이 앰뷸런스 차의 번호를 적어두었다가 상부에 보고한 것이다. 李龍澤 국장은 그 번호를 받아 정보부로 돌아와 운송부서에 확인하니 정보부가 운영하는 앰뷸런스임이 밝혀졌다. 李국장은 바로 앰뷸런스의 운전사를 불렀다.
'부산 4부두에서 태운 술취한 사람이 누구였지?'
'KT였습니다'
'태우고 어디로 갔나'
'충청도에 있는 우리 安家로 갔습니다'
'누가 한 것 같애'
'공작단이지 누구이겠습니까'
'밖으로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게'
李龍澤 국장은 H 해외공작국장을 만났다. H국장은 김대중 납치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망명정부의 수반으로 취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데려왔다. 그를 죽이라는 명령은 받은 적이 없다. 비행기가 왔기 때문에 그를 살려주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 해상보안청 비행기가 순찰중 상공을 지나간 정도이다. 김대중씨를 기관실에 묶어놓았는데 갑판으로 데리고 올라온 것은 바깥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쪼이게 하려는 목적이었지 죽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칼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끈을 가지고 간 것은 그를 마취시켜 묶어서 내리려고 했던 것인데 호텔이 너무 높고 대낮이어서 엘리베이터로 내려온 것이다'

李국장은 朴대통령을 찾아가 조사결과를 보고했다. 대통령은 낙담한 모습이었다.
'李국장, 옛날 말에 조선 망하고 대국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자가 완전히 나를 망칠 작정을 한 것이구먼'


'朴대통령은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라면서 걱정했어요. 진상을 그대로 밝히면 일본에서 원상회복과 함께 국가배상을 요구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각하, 일본을 잘 아는 金鍾泌 총리와 의논해 보면 어떻겠습니까」고 건의했습니다. JP는 그해 11월 진사사절로 일본에 가서 사과하고 돌아와 정치적 타결을 이뤄 냈습니다'

―DJ를 죽이려 했다는 말도 그 당시에 나왔습니다.

『DJ가 배에 납치된 뒤 팔, 다리에 무거운 돌을 달아 바다에 던지려고 했다는 말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납치에 가담했던 中情 요원들 얘기로는 도망을 염려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도망가려면 바다로 뛰어들어야 하는데, 돌 때문에 죽는다는 점을 알게 하기 위해 그랬다는 설명이었죠. 또 모든 관련자들이, DJ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는 점도 조사 때 확인된 것입니다. DJ 쪽에서는 큰 자루를 갖고 온 것은 살해 후 死體를 토막을 내 넣어 오려고 한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死體를 자르기 위한 대형 칼이나 톱을 준비한 사실도 없었습니다.
中情 멤버들이 총을 가지고 간 것은 사실이지만, 東京 시내 호텔에서 총을 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위협을 하기 위해서 가져갔다는 주장입니다. 큰 자루에 넣어 납치하려 했으나 호텔에 가 보니까 바로 옆이 큰 도로변이라 안 되겠다 싶어 마취제를 사용해 납치했다고 합니다』

1973년8월28일 오후 6시 평양방송은 남북조절위원회 평양측 金英柱 공동위원장 명의로 된 성명서를 발표했다. 金英柱는 이 성명에서 중앙정보부가 金大中 납치를 주도했고 李厚洛정보부장이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애국적 민주인사를 체포, 탄압하고 있으므로 남북회담을 계속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북한측 성명서를 분석해보면 이들이 남북회담을 일방적으로 중단시킨 것은, 朴대통령의 6.23 선언임을 알 수 있다.
다음날 李厚洛 부장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평양측의 대화중단 선언을 비판했다.
'북한측의 일방적인 대화중단 선언은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가장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정책인 6.23 선언에 대한 국내외의 높은 평가와 지지에 당황한 나머지 대화를 깸으로써 평화통일 노력 자체를 파탄시키려는 것이다'
북한측은 남북적십자회담도 중단시켰다. 이로써 만2년간의 남북대화 시기는 문을 닫게 되었다(의례적인 실무자급의 남북접촉은 계속되었다).
李厚洛의 중앙정보부가 주도권을 잡고 진행한 이 남북회담을 거치면서 朴正熙 대통령과 金日成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金正濂 당시 비서실장이 정확히 토로한대로 李厚洛은 7.4 공동성명 이후의 드라마틱한 상황전개를 기회로 삼아 朴正熙 대통령에게 유신조치를 건의했고 朴대통령은 자신의 평소 소신에 부합하는 李부장의 발상을 받아들였다. 朴대통령은 '이후락은 내 생각을 한 발 앞서 정확히 읽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5.16 군사혁명이 박정희 사령관-김종필 작전참모 체제로 이뤄졌던 데 비해서 10.17 유신쿠데타는 박정희 사령관-이후락 작전참모 체제로 성사되었다. 김종필, 이후락은 각각의 쿠데타 성공 이후 권력투쟁에 휘말려 밀려나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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