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동생의 脫北…시시각각으로 조여오는 시선(視線)들

탈북 여성詩人의 手記(5)“언니. 오늘 아침 일찍이 아빠·엄마 산소에 다녀왔어. 떠난다고 말씀드렸어. 무사히 나를 건네달라고 빌었어요”

4. 이제는 떠나는 수밖에



“언니, 나도 떠나갈래”

어렵고 힘들지만 그럭저럭 흘러간다. 다 같은 고달픔 속에서 그래도 신사적으로 돈을 버는 직업인지라 다른 사람들보다는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다. 생활이 평평하게 균형을 맞추며 흘러간다. 남들은 고작 그것조차도 부러워한다. 동네의 유일한 직장일꾼인 내가 그들보다는 육체적, 경제적 고통은 덜하다는 의미에서이다.

내 집 가까이에서 삼촌의 딸인 사촌동생이 살고 있다. 그 애는 죽을 만큼 힘든 생활고를 겪고 있다. 사촌언니인 나한테 의지한다는 것이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할 수 없이 체면을 무릅쓰고 온다. 삼촌의 딸이기에 미워할 수도 없다. 왜 그렇게밖에 못 사느냐고 싫은 소리 퍼붓고는 밥을 먹이고 여유있는것을 조금씩 싸서 보낸다. 언니 집에 올 때마다 그 애의 심경이 얼마나 복잡했으랴. 눈물을 머금고 들어온 애의 눈물을 기어코 터뜨려 놓고야 만다.

그러던 어느날 “언니, 나도 떠나갈래” 하고 이상한 말을 한다.

“어디루 떠나겠다는 거니?”

별 생각없이 물었다.

“언니. 저 큰오빠와 언니한테 이미 연락했어요. 강을 건네달라고”

“그게 무슨 소리니? 너 중국으로 가겠다는 거야?”

내 눈이 커졌다.

“네, 더는 못살겠어요. 언제 굶어죽을지 몰라요.”

“그럼. 네 남편은 알고 있니?”

“몰라요.”

“그럼. 네 딸 연지는 어쩌구?”

“연지와 함께 가기루 했어요.”

가슴이 덜컥거린다. 심장이 쿵쿵 궁둥방아를 찧을 듯이 두근거린다. 얘들이 떠나면 그 불똥이 내 쪽으로 또 튈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노래진다. 내 동생이 떠난 지 10년이 돼오는데 그동안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질타 속에서 견디어냈는데. 동생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고 보위부 보안원의 질타, 내가 속한 직장의 질타, 여러 곳의 뾰족한 시선들. 이제 겨우 잠들락 말락 하고 있는데, 내 심장이 이제 더 받아들일 만큼 든든하지 못한다.


사촌동생 탈북 한 달 후 보위부가 집에 들이닥치다

10년 동안 받은 스트레스만 해도 나를 삼킬 만큼 쌓였다. 또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냐? 심장이 비틀어댄다.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그렇다고 해서 굶어 죽어가는 사촌을 내가 책임도 못져주면서 떠나지 말라고 할 그 어떤 면목도 없다.

그 애의 사정은 누가 말릴 만큼의 사정도 못된다. 어느 순간에 굶어죽을지도 모른다. 할 말을 잃어버렸다.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떠나기 전 사촌이 다시 찾아왔다.

“언니 떠나갈래. 연지와 함께.”

애를 낳고 먹을 것이 없어서 부뚜막에 앉아 눈물을 쉼없이 흘리던 애다. 미우나 고우나 내가 옆에서 잘은 못 지켜줘도 지켜주었다. 그 애는 울고 있다. 이미 굶주림 속에서 제 명(命)을 못살고 돌아간 부모님들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것이다.

“언니. 오늘 아침 일찍이 아빠·엄마 산소에 다녀왔어. 떠난다고 말씀드렸어. 무사히 나를 건네달라고 빌었어요. 흑흑.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고 울고싶어 지는지 모르겠어요.”

가엾어서 그 애를 꼭 그러안아 주었다. 함께 있을 때 좀더 잘 돌봐주지 못한 후회를 내 가슴에 쏟으며. 그래 도망가. 어디 가서든지 먹구 살 수 있는 곳이라면 떠나가. 이 세상보다 더한 세상이야 하늘 아래 있을라구. 그렇게 사촌동생이 연지를 업고 떠나갔다.

다행히도 그때는 겨울이었다. 누구든 밖에 잘 나오지 않는 때여서 눈치채기가 힘들 거라고 생각하며 언제든지 다가올 장래를 기도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때가 왔다. 한 달이 지나자 사촌동생의 동네에서 인민반장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먼저 보위부에 신고했다. 그 애는 인민반장에게 먹거리 구하러 가까운 농촌에 갔다오겠다고 하고 떠났다고 이미 나하고 약속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가까운 농촌에 나간 사람이 오지 않자 동네가 먼저 끓기 시작했고, 이미 탈북(脫北)한 내 친동생이 있고 우리가 사촌끼리인 것을 알고 있는 보위부가 즉각 내 집으로 쳐들어왔다.

그들도 이 나라의 가련한 심부름꾼

나는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사촌이긴 하지만 집이 서로 다른데 그 애의 행처야 남편에게 물어야지 왜 나한테 묻느냐고 좋은 말로 위로했다. 담당보위원도 탈북자가 생기면 대신 그 벌을 받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고 그도 역시 이 사회에서 살아가느라 그리 편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직업이 남다르고 간판이 요란할 뿐이지 그들도 이 나라의 가련한 심부름꾼이었다.

담당관할하에서 탈북자가 생기면 그들은 자리를 내놔야 한다. 보위부는 단순히 배급을 준다는 의미에서 밥줄을 쥐고 있는 그들이 그 직업에서 밀리면 가련한 백성의 신세와 다를 바 없다. 그걸 생각하니 한편 가엾기도 하다. 보위원의 얼굴은 사색(死色)이 되어있었다.

미안하다. 고급담배 한 갑을 사서 피우라고 손에 쥐어주었다. 위로해줄 수 있는건 그것밖에 없다. 우리 동네도 보위원과 같이 들끓는 것 같았다. 동네의 가까운 늙은이가 몰래 나한테 전해왔다.

“알고 있니? 네 사촌동생 연지 애미가 중국으로 뛰었다구 난리도 아니다. 요즘 힘들겠다.”

위로하는 말이지만 그것을 통해 모든 시선이 내 집으로 쏠렸다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소문이 나기 시작해서 한 달 후 직장의 책임자와 비서가 날 좀 보자고 했다. 사촌동생 때문인 것이라는 것을 이미 각오하고 만났다. 책임자가 먼저 말했다.

“수진 동무, 사촌동생이 없어졌다는 게 사실이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탈북했다고 추측하고 있던데. 사실이 맞아요?”

“아, 글쎄요. 사실 그건 제 몫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이 떠돌고 있긴 한데 장사 간 사람이 요즘 세월에 몇 달씩 떠도는 건 예상사가 아닙니까?“ 하고 철면피하게 딱 잡아뗐다.

“그래두 몇 달이 지나서도 안들어선다면 그건 딱한 일일 것 같은데?”

그들의 말의 의미는 해석하기 간단했다. 만약 그런 경우 너도 배제할 순 없다. 너 역시 그 길을 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느냐 하는 말이 곁들여 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정곡을 찔러 말했다.

“사촌은 사촌이고 나는 납니다. 그런 걸로 날 제발 흔들지 마십시오.”


“갈 곳이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워하기도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반장이 보기 바쁘게 달려온다. 오늘 보위부 보안서에서 사람들이 나왔다가 가버렸다고 한다. 그러지 않아도 직장의 담당보안원도 만나자고 여러 번 독촉해 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지 않았다. 이제 엎지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도 없는데 나더러 어쩌라구. 담당보위원은 매일이다시피 집에 찾아왔었다. 나까지 떠날가봐 초조해 하는 눈치였다. 보안서 역시 미해명(未解明) 처리 때문에 계속 들락날락거렸다.

동네 여기저기서 쑥덕거리는 것이 보인다. 그러겠으면 그러든지 하고 양철판을 뒤집어 쓴 듯이 행동한다. 국경과 떨어진 곳이라 한두 사람이 뛴 것이 마치도 끔찍한 파문이 되어 시끌시끌 끓는다. 고요한 우물 안에 돌덩이를 던진것만큼 파장이 크다. 어디를 가든 이미 노출된 인물이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나만 지나가면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쑥덕거린다. 그러면서도 일부는 부러워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나라가 얄미워 고소해 하기도 한다. 누구는 갈 곳이 있어서 좋겠다, 떠나고 싶어도 잡아주는 손길이 없어서 못 떠난다, 하고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붙여오는 사람도 있다. 피식 웃어버리고 지나간다. 소문이 날 대로 다 났다.

시내 안의 간부들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도 누구의 사촌이 또 뛰었다면 날 어떻게 보랴 하는 위구심(危懼心)도 없지않아 있다. 그들 속에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도와준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외면을 받기란 참 힘들다.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되다

이렇게 거의 1년이 돼오자 사건처리를 하러 보안서에서 내려왔다. 다 헐어빠진 보안복을 입은 보안원은 가난 티가 물씬 풍겼다. 한겨울에 발가락이 삐죽이 나온 해진 양말에 허름한 운동화를 신은 보안원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배급을 하는 사람이지만 배급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방안을 덥혀야 살 수 있고, 쌀알을 끓여야 입으로 들어간다. 옷도 사시장철 갈아입어야 한다. 그리고 자식들의 학교 부담은 얼마나 크고, 그런 것들을 계산할 때 배급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보위원도 가난하기는 보안원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다 같은 인민이고 굶주림은 다를 바 없다. 그들도 나에게 자기들의 가난을 남김없이 이야기한다. 좀 도와줬으면 하는 속마음까지도 은근히 내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흔들리면 안된다. 그들에게 쌀 1킬로, 돈 1원짜리 하나 건네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오히려 그것으로 그들이 내 꼬리를 흔들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잘 아는 선배의 남편이 별로 대단치 않은 말 한 마디에 정치범 수용소에 묶이어 갔다. 누구나 흔히 하는 말이었는데. 서로 경계심을 두고 지켜보는 보위부의 낚시에 걸린 것이다. 부모가 둘 다 간부였고 너무 좋은 선배였는데 한순간에 강제 이혼당하고 남편과 갈라졌던 것이다. 시퍼런 대낮의 강도같은 무서운 세상이다. 흔들리던 내 마음이 완전히 돌변하기 시작했다.

허수아비 같은 내 목숨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어느 순간에 꺼질지 모르는 것이었다. 이제는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 탈북을 실행했다. 성공했다. 동생이 있기에 모든 것이 계획에 들어맞았고 국경에 도착하자 바래다 준 두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보위부가 지금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빨리 탈북하라는 신호였다. 지금도 그들이 고맙다. 어려운 순간에 함께 있어준 친구들. 시간이 흐르고 행복한 순간들이 나를 잃게 해도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추억, 친구들에 대한 추억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한국행(韓國行)이 시작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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