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事) 中國 실상을 日本 독자에게 전하지 않은 아사히 신문

2014. 12. 27. 산케이(産經)신문

나는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를 오려내는 일(스크랩)을 50년
이상 해 왔다. 그 중에서도 산케이 신문이 보도하는, 위안부
문제나 야스쿠니 참배 관련 기사들은 많이 오려냈다. 이들
기사는 주로 아사히 신문 기사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9월 11일, 아사히 신문사의 '기무라 다다카즈'(木村伊量)
사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도쿄(東京)전력의 요시다(吉田)
소장 관련 오보를 인정하고 사죄를 함과 동시에, 편집장을
물러나게 하고 자신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뒤이어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씨의 위안부 증언과
관련해서도 32년 만에 겨우 오보를 인정하고 사죄를 했다.

나는 훨씬 이전부터 이 건과 관련한 아사히 신문의 보도에
의문을 가져 왔다. 의문의 배경에는 아사히 신문 특유의
뿌리깊은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1964년 日本과 中国
사이에는, <언론기자의 상호 주재에 관한 협정>이라는
것이 맺어졌다. 그리고 양국 사이에 <일본과 중국 쌍방의
신문기자 교환에 관한 메모>가 교환됐다. 日中평화우호
조약에 따라, 1978년에는 <정치경제 불가분(不可分)의
원칙>(정치 3원칙)이 추가됐다. 이 원칙에 따라, 산케이
신문을 제외한,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 NHK 등
각사는 대만 지국의 폐쇄를 요구받았고 북경지국을
개설하게 된다. 1966년부터 10년간 전개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이 조약에 의거하여 日本 국민에게 그
실상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1972년 日中 국교
정상화로 <언론기자의 상호 주재에 관한 협정>은
폐기되고 그 후에는 <日中정부간 기자교환에 관한 교환
문서>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문화대혁명 당시 이런 일이 있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아사히 신문 기자로 있다가 나중에 작가가 된 '도모노 로'
(伴野朗)씨가 말한 내용이다. 그는 강의 상류로부터
시체가 다수 떠내려 오는 문화대혁명 현장의 실상을 그대로
써서 본사로 송고했는데, 한 줄도 보도가 안됐다. 그래서,
데스크에 이유를 물어 보니, '사장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사장이, 이웃 나라가 혼란중에 있으면 주변에서는
그저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것이 日中우호를
위한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임표'(林彪, 모택동 대항
쿠데타 시도했던 인물)의 사망 소식도 아사히는 1년 반이나
지나서야 보도했다. 기자가 사실을 써서 송고를 해도 데스크는
상부의 지시라며 묵살하는 식이었다> (2012년 月刊誌 WiLL
8월호 中).

日本을 '성노예의 나라'로 선전하며, 日韓관계를 파탄시키고,
미국에 위안부상을 만들게 하고, 유엔인권위원회로 하여금
오해하도록 만드는 등 일본 폄하를 해 온 아사히의 책임은,
사장의 사임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아다치 가쓰미'(足立勝美)
효고(兵庫) 県立高校教諭, 県立'但馬文教府'의 長, 도미오카
(豊岡) 高校長 등을 맡은 후 1998年 退職. 2012年, 瑞宝小綬章
(정부훈장) 受章. <教育의 座標軸> 등 著書 多数. 個人通信
<座標>를 홈페이지로 発信. 돗토리(鳥取)大 農学部卒. 76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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