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하는 슈뢰더
며칠 전 문화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파이낸셜 타임스•뉴욕타임스가 독일대중지 [빌트](Bild) 일요판을 인용 보도한 것을 재인용 보도한 것으로, 독일수상 슈뢰더의 인터뷰기사이다. 68세대 ‘슈뢰더’와 반공 및 자유 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 68학생운동에 비판적이었던 ‘빌트’와의 만남은 그 자체로서 눈길을 끄는 측면이 있다. 더욱이 슈뢰더 수상이 지난 2004년 2월, “빌트는 편파적이고 정부에 불리한 정보만 다룬다”고 비판하며 이 매체와의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명언하자, ‘빌트’의 편집장 디크만은 “슈뢰더? 난 그런 사람 모르는데”하는 냉소를 날려 썰렁한 관계가 지속된 바 있기 때문이다.
‘빌트’는 영국황실스캔들 보도 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황색신문 [Daily Mirror]를 모방, 1952년, 4페이지의 무가지로 출발했다. 반공, 독일인과 유대인과의 화해, 정치적 극단주의 배격, 자유시장경제의 추구 등을 편집방향으로 설정, 정치적으로는 우파노선을 견지해 왔다. 1968년 당시, ‘빌트’의 독자를 자칭하는 한 노동자가 학생운동그룹의 리더를 살해한 적이 있었다. 이에 항의하는 학생데모대가 베를린의 출판사 출입문을 막고 ‘빌트’의 조간발송을 완력으로 저지한 사건은 상징적이다. 68 격동의 한 정점을 이룬 사건이기도 했다.
한편, ‘빌트’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감은 작금 한국에서의 ‘안티조선’과 유사한 구석이 많다. 1999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 등에 의해 1980년부터 서명운동과 함께 안티빌트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하인리히 뵐(1972년 노벨문학상 수상),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초대중적인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등의 저명인과 수백의 노동조합이 동참했다. ‘빌트’는 안티빌트운동으로, 발행부수가 1983년부터 1993에 걸쳐 540만부에서 440만부로 떨어졌고, 현재 436만부가 발행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비록 발행부수가 과거에 비해 떨어졌다고는 하나, 권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FAZ)가 40여만 부, '빌트'와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타게스슈피겔’(Tagesspiegel)이 15만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에 비교하면, 여론형성에 미치는 ‘빌트’의 영향력은 만만치 않다. 평일판은 일면에 여성의 나체사진이 게재되는 등 섹스, 범죄, 전쟁, 유명인의 사생활 등이 주로 다루어지는 데 비해, 일요판은 가족이 함께 읽을 수 있는 내용이 많다. 정치적 보수경향에도 불구하고 간명한 문체와 선정적인 내용의 기사로 노동자와 중산층이 주요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어서, 정치인 특히 좌파정당 사민당의 정치인도 무시할 수는 없는 입장인 것이다. 슈뢰더 수상의 이번 인터뷰도 이런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계속적으로 일자리를 해외로 옮기겠다는 소리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는 표제로 소개된 이 인터뷰에서 슈뢰더는, 아젠다 2010을 통한 독일의 기업환경개선 노력에 자신감을 표시했다. 법인세 및 임금외비용도 낮추었고 새로운 고용에 방해가 되는 요소도 없앴다면서 슈뢰더는, “그 결과 독일기업은 유래 없이 경쟁력 있는 회사로 거듭났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타게스슈피겔’에 따르면 사정은 다르다. 상장된 독일 30대기업의 작년 순이익은 357억 유로로 전년도에 비해 약 2배 증가했음에도, 독일 내에서는 35,000개에 이르는 일자리가 줄어든 반면 9,600개의 일자리를 해외에서 창출했다.
올해에도 텔레콤, BASF, 독일은행 등 5개 대기업에서만 15,700개의 일자리를 줄일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다고 한다.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작년,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지멘스 VDO 뷔르쯔브르크(Würzburg)공장이 흑자에도 불구하고 고임금을 이유로 생산기지를 체코로 이전하려 했을 때, 이 공장의 노동조합과 상급단체인 철강노조는 35시간에서 40시간으로 노동시간연장 및 임금동결이라는 회사안에 동의하고 말았다. 벤츠도 독일 내 공장 중에서 작업효율이 낮은 곳의 일자리를 효율성이 좋은 다른 독일 내 공장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해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샀다. 이런 현상들은 실업률12.6%를 기록하고 있는 독일에서, 실업 및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 얼마나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다.
독일정부는, 미국보다 해고는 2배 어렵고 일자리 찾기는 12배 어렵다는 국내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2002년 8월, 하르츠(Hartz)위원회의 보고서 ‘노동시장개혁안’ 을 바탕으로 아젠다 2010을 수립한 바 있다. 이는, 기업에 대한 법인세 인하는 물론, 해고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기업이 새로운 고용에 보다 적극적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또한 실업수당과 사회보장비를 통합하여 사회보장에 들어가는 예산을 줄임으로써, 개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는 노력을 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정부의 이러한 혼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정리해고와 공장들의 해외이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기록적인 실업률도 여전하다.
인터뷰에서 슈뢰더 수상은, 정부는 “기업을 위해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기업도 계속 여기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기업의 이익을 신규투자, 인재육성과 연구개발에 재투자해 달라는 것이다. 슈뢰더가 추진해온 일련의 조치는 이른바 제3의 길로서의 우파적 개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1999년 영국의 블레어 수상과 발표한 ‘슈뢰더• 블레어문서’에서 밝혔듯이, “국가가 시장 메커니즘에 방해되지 않는 정치시스템을 구축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를 위해, 정부의 역할을 줄이고 기업과 개인의 동기부여를 존중하며, 민간부문에의 국가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노동시장의 개혁이 대처前수상이래 20년 이상 추진되어 온 영국에서는 성과를 발휘하는데 비해, 독일에서는 아직 가시적인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독일은 현재의 개혁노력과는 다른 방향의 시스템에 워낙 오래 익숙해온 탓일까. 한번 굳어진 흐름의 방향전환이란 이렇게 지난한 일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독일 상황은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내용이다. 큰 정부를 지향하는 가운데, 기업가의 의욕이 사라져 버리고 기업의 해외진출을 아무런 대책 없이 지켜만 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한국기업이 중국에서만 100 만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는데도, 국내의 실업률은 심각한 수준이다. 독일정부가 해온 정도의 노력을 한다면,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독일에 비해 그 가시적 효과가 빨리 나타날 수도 있다.
독일 자유당(FDP)당수 베스터벨레(Guido Westerwelle)가 작년 어느 인터뷰에서 탄식한 바 있다. “유럽국가 중에서 가장 좋았던 우리 경제가 이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보다 못한 상황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머지않아 우리 입에서 이런 뼈아픈 자탄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결단해야 할 때이다.
하만주 (한중일 연구소장)
* 이 글은 www.new-right.com에서 전재한 것이다.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