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日本兵 추도

<기사 原題 : 대만의 사당(祠堂), 70년 이어온 日本兵 추도 '함께 했던 유대 지금도 소중히'>
2015. 2. 14. 산케이(産經)신문


전후 70년, 2차 대전 당시 전사한 日本兵을 추도하고
있는 작은 사당(祠堂)이 대만 신죽(新竹)市에 있다.
日本兵과 유대를 가진 주민들이, 전쟁 당시에는
美軍에 의한 공습 희생자를 추도했고, 종전 이후
계엄령에 의해 親日的 행동이 일체 허락이 되지
않던 시대에도 추도를 계속 이어왔다.

현지 주민은, <전쟁 당시 日本人과 함께 싸웠다는
생각에서 지금까지 추도가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선명한 주색(朱色) 문을
통과하자, 향내음이 돈다. 토박이 주민이 손을
모으고 있는 제단(祭壇)에는 높이 20~4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크기지만 군도(軍刀)를 휴대한 3체
(體)의 日本兵 상(像)이 종렬로 진좌(鎮座)되어
있다.

대만 해협으로부터의 강풍이 불어오는 관계로
'바람의 거리'라고도 불리는 신죽(新竹)市. 그 해안
가까이에 위치한 도교(道教) 사원(寺院) '신죽대천부'
(新竹代天府) 경내에는, 이렇게 日本兵을 추도하는
'성군당'(聖軍堂)이라는 곳이 있다.

日本이 통치하던 시대, 신죽(新竹)市의 시내에는
日本軍 비행기지가 있었다. 예외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日本兵은 규율을 잘 지키며 행동했기
때문에, 주민들과의 유대관계가 좋았다. 큰 비가
내렸을 때, 주민들이 사는 마을의 다리(橋)가
유실되지 않을까 해서 日本兵이 경계를 서주다가
한 명이 탁류에 휩쓸려 사망한 일도 있었다.

日本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1943년 11월에는
신죽(新竹)市 비행기지도 美軍에 의해 공습을
받아 25명의 日本兵이 전사하게 된다. 아울러,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막 종전이 된 당시에도
폭격이 실시되어 日本兵뿐 아니라 주민들의 희생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도교(道教) 사원(寺院)
'신죽대천부'(新竹代天府)의 책임자로 있는 '팽덕림'
(彭德林, 63세) 주임위원에 따르면, 종전 직후부터
日本兵에 대한 추도가 시작됐다고 한다. 국민당
정부가 계엄령을 실시하고 親日的 행동을 일체
금지시켰지만 주민들의 추도는 중단되지 않았다.
정부 관리로부터 <日本兵 추도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만인을 추도하는 것>이라고
둘러대고 추도를 이어왔다고 한다.

전쟁 당시 해군순사대(海軍巡査隊)에 소속하여
루손섬(島)에서 싸운 한 대만인은 1975년경에,
日本人 부대장을 추도하기 위해, 대만 '묘율'(苗栗)
지역에 있는 사원(寺院)에 위패를 봉납하고 2013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추도를 계속해 온 사례가 있다.
아울러, 日本 통치시대 당시, 대남(台南)市에서
댐을 쌓아 올리는 등 근대화에 공헌한 日本人
기사(技師) '하타 요이치'(八田與一, 1886~1942)
씨는, 필리핀으로 이동하기 위해 올라 탄 배(船)가
美軍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어 사망하게 된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타'(八田)씨가 남긴 공적은 지금도 대만
현지에서 칭송되고 있으며 기념공원(記念公園)이
만들어지는 外에, 교과서나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서도 알려지고 있다.

1944년, 대만 상공을 비행하던 중 美軍의 공격을
받아 추락하여 전사한 비행사 '나가타니 료타쿠'
(長谷諒卓, 당시 29세)씨는, 기체가 집락촌으로
추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선회를 시도하여 밭
(畑)으로 추락했다. '나가타니'氏 유족에 따르면,
당시 집락촌의 주민들은 기념비를 세우고 헌화하며
유가족 앞으로 감사의 뜻을 담은 편지들을 보내왔다.

국민당 정부를 이끈 장개석(蒋介石, 1887~1975)이
사망한 후에, 신죽(新竹)市 사원(寺院) '신죽대천부'
(新竹代天府) 경내에 日本兵의 상(像)이 안치되고,
'성군당'(聖軍堂)으로 명명되었다. 신죽(新竹)시에
사는 '요수장'(廖受章, 84세)씨는, 지금까지 이곳에
서 日本兵 추도를 해오고 있는 주민 중 한 사람이다.
13세 때 부모곁을 떠나 日本으로 건너가 '가나가와'
(神奈川)현에 있는 '고자'(高座) 해군공창(海軍工廠)에서
소년공(少年工)으로 전투기 제조 라인 등에서 일했다.
늘 공습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작업을 했는데, <자식이나
남편을 전지(戰地)로 떠나보낸 日本人들이, 식사 대접도
많이 해주고 많이 귀여워해 줬다>고 '요수장'(廖受章)
씨는 과거를 회상한다. 종전 이후, 대만으로 돌아와 같은
소년공(少年工)으로 일했던 대만인들끼리 모여 만든
'대만 고좌(高座) 모임'을 통해, 요(廖)씨는 성군당
(聖軍堂)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요(廖)씨는, 어려서 배운 유창한 日本語로 <전쟁
당시 日本人과 함께 싸웠다는 생각에서 지금까지
추도가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日本人을 대만인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아울러 日本과 대만간의 유대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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