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전투 참가자 증언

(기사 原題 : 남경공략戰 병사들의 증언(2) '매우 평온했다'…城內에 노점상들 늘어선 '평온한 進駐')
※타당성 각자 판단

2015. 2. 16. 산케이(産經)신문

舊일본군이 1937년 12월 중국의 남경(南京)을 공략한 후,
그곳 城內에 주둔한 前해군 제12항공대 3등항공 병조(兵曹,
하사관) '하라다 가나메'(原田要, 98세, 나가노市 거주)
씨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말했다.

<도저히 전쟁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남경(南京)은
평온하다는 인상이었다>

1937년 12월10일부터 시작된 총공격에서, '하라다'(原田)
씨는 95式 함상전투기 조종간을 잡고, 남경城 南東 광화문
(光華門)을 공략하는 육군을 지원했다. 양쪽 날개에 각 60
킬로그램의 폭탄을 매달고 몇 번이나 남경城을 공격했다.

<남경城壁에 폭탄을 명중시킴과 동시에 敵兵을 향해 기총
소사를 했습니다>

함락 후 城內 비행장에 착륙한 '하라다'(原田)씨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주민들 모습이었다.
노점이 늘어서 있고, 주민들은 日本兵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하라다(原田)씨는 거기서 돼지를 한 마리
샀다.

<다리를 한데 묶은 새끼 돼지를 사서, 동료들과 함께
먹었습니다>

城 밖에 있었던 중국 국민당 창시자 손문(孫文)의 묘지
'중산능'(中山陵)을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공략戰이 본격 개시되자, 城內에 남았던 주민들은,
서양인들로 구성된 '국제위원회'(国際委員会)가 설치한
非무장 중립지대 '안전구'(安全區)로 모두 도망갔었지만,
날이 밝으면서 평온함을 되찾았다>고 '하라다'(原田)
씨는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2007년 12월 도쿄(東京)에서
열린 <남경함락 70주년 국민집회, 참전용사가 말하는
'남경사건'의 진상>에 출석한 前장병들도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입성하고 나서 2~3일 후, 주민들 모습이 보이기 시작해,
손목시계 수리를 위해 시계방에 갔다>
- 1937년 12월16일 입성한 前육군 제16사단 소위, '이나
가키 기요시'(稲垣清)

<노점에서 日本兵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구두
수리점, 이발소 등이 있었다. 노점에서 인감(印鑑)
도장을 팠다. 城內는 아주 평온했다>
- 1937년 12월20일경 城內 모습을 진술한 前육군 제9
사단 보병 제36연대 오장(伍長, 하사) '곤도 헤이타부'
(近藤平太夫)

중국측이 주장하는 <30만 명 대학살>이 정말로 사실이
되려면, 당시 城內는 가는 곳곳마다 처참한 살육이
행해져야 하는데, 前장병들의 증언 내용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 <국민집회 모임>에서 '곤도'(近藤)씨는
남경에서 팠던 인감(印鑑) 도장을 꺼내 들어 보여주며
이렇게 강조했다.

<주민들이 평온한 상태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상황인데,
매일 무수한 사람들이 학살되었다니 있을 수 없는 이야
기입니다>

'하라다'(原田)씨는, 영식(零式,제로센) 함상전투기
파일럿으로서,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습과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가했다. '하라다'(原田)씨는, <전쟁은, 내가
敵을 먼저 쓰러뜨리지 않으면 내가 당하고 마는 극한
상태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남경공략戰 이후, 그곳 주민들에게 평온한 생활이 다시
돌아오게 된 한편으로, <편의병(便衣兵)>의 존재가 큰
위협으로 부상했다. <편의병(便衣兵)>은 민간인으로
위장한 병사를 지칭한다. 그들은, 비무장지대인 안전구
(安全區)로 무기들을 반입한 채 잠복하고 있다가 은밀
하게 출현하여 日本兵들을 습격했다. '하라다'(原田)
씨는, <편의병(便衣兵)은 게릴라입니다. 당시 이들은
은밀하게 다가와 日本兵을 공격했습니다>라고 말한다.

휴가를 얻어 남경城 북쪽을 흐르는 장강(長江, 揚子江)
의 하반(河畔)에 갔을 때, '하라다'(原田)씨는, '편의병'
(便衣兵)을 처형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육군병사들
이 트럭에 태워온 중국인 남자 10명 정도를 총검으로
처형하게 됐다. 체념한 모습의 남자가 있는가 하면,
강물로 도망치다가 사살되거나, 울면서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남자도 있었다.

도쿄(東京)재판에서, 병역연령에 해당하는 중국 남성
약 2만 명을 일본측이 기관총으로 살해했다고 되어
있지만, '하라다'(原田)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형
장면을 목격한 것은 이때 한 번뿐이었기 때문이다.
도쿄(東京)재판에 출정(出廷)한 前장교 증언에
따르면, 城內에서 포로로 잡은 중국 잔존병은
4000명에 달했는데, 그 중 절반은 수용소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나중에 석방했다. 무기를 휴대하고
잠입해 있던 편의병(便衣兵)을 적발하여 군사재판
(軍法会議)을 거쳐 처형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는
국제법에 따른 정당한 대응에 해당한다.

많은 전투를 경험하고, 여러 가지 감정을 가슴에
묻어 둔 '하라다'(原田)씨는 지금도 강연 등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알리고 있다.

<몇십만 명을 대학살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말이
안됩니다. 만약 정말로 대학살이 있었다면 당시 중국의
주민들이 왜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왔겠습니까?>라며
종전 후 부상(浮上)한 <남경대학살>이라는 것을
'하라다'(原田)씨는 납득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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