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19. 산케이(産經)신문
(기사 原題 : 日本史上 보기 드문 '행운의 敗者',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學識' 덕분)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1836~1908)
에도(江戸, 현재 東京) 출생. 네덜란드 유학후, 막부
(幕府)해군 副총재에 취임. 에도개성(江戸開城, 1868
년 舊막부가 明治新정부軍에게 체제 이양한 것) 당시, 
막부(幕府)함대를 明治新정부軍으로 인도(이양)하기
를 거부하고 항명하여, 홋카이도 지역에 에조공화국
(蝦夷共和国, 1868~1869)을 선포하고 총재가 되어
新정부軍에 맞서 싸움.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1836~1908)는 막부 가신
의 차남으로 에도(江戸)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출중
하여 15세에 쇼헤코(昌平黌, 東京大 원류)에 입학하고
18세에 졸업했다. 주로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익히는 등
양학(洋学)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유학(儒学)과 한학
(漢学)을 주요과목으로 하는 쇼헤코(昌平黌)에서의 학
업성적은 좋지 않았다. 때문에 엘리트로서 막부(幕府)
의 관리로 등용되지는 못했다. 
전기(転機)가 된 것은, 1854년 19세 때, 호리에노 베노쇼
(堀織部正)라는 홋카이도 하코다테(箱館) 지방관리를 수
행하면서 에조(蝦夷)지역을 둘러보게 된 일이었다. 이때
에노모토(榎本)는 에조(蝦夷)지역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
게 되었고, 나중에 하코다테(箱館)전쟁을 이르키게 되는
원인(遠因)이 된다.
1855년 에도(江戸)로 돌아온 에노모토(榎本)는, 나가사키
(長崎)해군전습소(海軍伝習所)에 입학하여 네덜란드人
강사로부터 항해술과 해군전술 등을 배운다. 1862년, 막부
(幕府)는 최신예 군함 가이요마루(開陽丸)를 네덜란드에 
발주함과 동시에 에노모토(榎本) 등 15명의 유학생을 파
견한다. 에노모토(榎本)는 항해술, 증기기관학, 기계공학,
전신기술, 국제법 등 많은 분야의 학문을 습득하게 된다. 
1867년 3월, 에노모토(榎本)는 네덜란드에서 진수식을 마
친 군함 가이요마루(開陽丸)에 승선하여 요코하마(横浜)에
도착한다. 그런데, 당시 日本內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이고쿠유반(西国雄藩) 세력이 급부상한 것이다. 
특히, 영국과 손잡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사쓰마번(薩摩藩)
과, 조슈번(長州藩)의 힘은 대단했다. 이러한 때에 귀국한
에노모토(榎本)는, 막부(幕府)의 기대를 받으며 이례적으
로 출세를 거듭하며 해군副총재 자리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런데 1867년 10월, 쇼군(将軍)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徳
川慶喜, 막부 마지막 쇼군)가, 모든 권력을 조정(明治천황)
으로 반환하는 왕정복귀(王政復古) 선언을 전격 하게 된다.
비록 정권은 조정에 반납했지만, 요시노부(慶喜)는 제후회
의 의장 자리에 취임하여 도쿠가와(徳川) 가문의 권익을
지키려 시도한다. 하지만, 新정부는 가차없이 요시노부(慶
喜)를 향해, 모든 관직과 영지(토지)의 몰수 조치(辞官納
地)를 내린다. 이에 격분한 요시노부(慶喜)는, 1868년 1월,
군사력을 동원하여 몰수 조치를 취소할 것을 요구하게 되
고 양측은 결국 군사적 충돌을 빚게 된다. 그리고 막부군
(幕府軍)은 여기서 참패를 맛보게 된다.
이 당시, 에노모토(榎本)는 막부해군(幕府海軍)을 이끌고
오사카(大坂)만(灣)에 있었다. 1월4일, 에노모토(榎本)가
타고 있던 군함 가이요마루(開陽丸)는, 정선명령을 무시한
사쓰마번(薩摩藩)의 군함 가스가마루(春日丸)와 쇼호마루
(翔鳳丸)를 향해 함포사격을 가한다. 이것이 바로, 日本 최
초의 양식군함(洋式軍艦)에 의한 포격戰으로 기록된 아와
(阿波)해전이다. 당시 서로간에 명중탄은 발생하지 않았고  
에노모토(榎本)는, 가스가마루(春日丸)를 놓치고 만다. 하
지만, 기관 고장을 일으킨 쇼호마루(翔鳳丸)를 추격하여,
암초에 걸리게 한 후 자폭(自焼)하도록 했다. 이로써 에노
모토(榎本)는 데뷰戰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런데 오사카(大坂)만(灣)으로 돌아 왔을 때, 에노모토
(榎本)는 막부군(幕府軍)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다. 에노모토(榎本)는 오사카성(大坂城)으로 가서 요시노
부(慶喜)에게 결사항쟁을 권유하고자 했으나, 서로 길이
엇갈려 요시노부(慶喜)는 이미 성(城)을 빠져나가 가이요
마루(開陽丸)에 승선하여 에도(江戸)까지 피신해 버리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그곳의 패잔병을 모아 에도(江戸)로
돌아온 에노모토(榎本)는, 철저항쟁을 주장했지만 요시
노부(慶喜)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3월에 에도성(江戸城)
은 新정부軍에 의해 무혈(無血) 함락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에노모토(榎本)의 의지는 결
연했다. 에노모토(榎本)가 보여준 자신감의 원천은 해군
력에 있었다. 특히 기함(旗艦)인 가이요마루(開陽丸)는
당대 무적의 군함이었다. 이러한 억지력(해군력)을 바탕
으로 에조(蝦夷, 홋카이도) 지역에 산재한 무한한 자원을
활용하면, 新정부軍에 대항할 수 있다는 확신을 에노모토
(榎本)는 하게 된 것이다.
1868년 8월, 에노모토(榎本)는 에도(江戸)를 탈출하기로
마음 먹는다. 애초 가이요마루(開陽丸)를 비롯한 막부함
대(幕府艦隊)가 당시 에도(江戸)만(灣)에 자리잡고 있었
던 것에는 별도의 이유가 있었다. 일찍이 막부(幕府)가
미국에 발주해 놓은 군함 스톤 월號를 미국측이 운항하
여 요코하마(横浜)항으로 들어 와 있는 상태였는데, 에
노모토(榎本)는 미국측에게 스톤 월號를 막부 함대쪽으
로 인도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톤 월號
를 확보하게 되면 막부함대(幕府艦隊)의 우위는 절대적
인 것이 되어, 에조(蝦夷) 지역에 굳건한 기반을 확보하
는 것은 수월해진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미국측이 중립을 선언하면서 스톤 월號를 인도
해 주지 않았다. 그 사이, 동맹을 맺고 있던 오우에쓰 열
번(奥羽越 列藩)으로부터 급히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에노모토(榎本)는 결국 스톤 월號를 포기할 수 밖
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1868년 8월19일 에노모토(榎本) 함대는 센다이(仙台)를
향해 출발했는데, 보소반도(房総半島, 지바현) 앞 바다
에서 폭풍우를 만나, 함대의 군함들이 사방으로 흩어지
는 어려움을 겪는다. 우여곡절 끝에 함대는 겨우 센다이
번(仙台藩)에 결집은 하게 되지만, 그곳 현지 전황은 이
미 비관적인 상태였다. 더구나, 스톤 월號를 인도받지
못한 상태에서, 도중에 폭풍우로 인해 많은 군함들이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렇더라도 에노모토(榎本)는,
여전히 해군력(陸軍力)을 신뢰하며 함대를 이끌고 에
조(蝦夷, 홋카이도)로 향한다.
1868년 10월, 에노모토(榎本)는 에조(蝦夷) 지역에 상
륙하고, 11월에는 신정부군이 장악하고 있던 하코다테
(箱館)와 마쓰마에번(松前藩)을 정복하며 에조(蝦夷)
지역 전역을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비극은 막 시작되
는 중이었다.
에조(蝦夷)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신정부측
마쓰마에번(松前藩)을 완전 소탕하기 위해, 에사시
(江差, 홋카이도 동쪽끝 항구)로 출항한 가이요마루
(開陽丸)가, 에사시(江差) 앞 바다 근처에서 정박하
던 중, 폭풍우를 만나 좌초되어 버린 것이다. 함대의
기함(旗艦)인 가이요마루(開陽丸)의 상실은 실질적
전력의 손실보다는 전체 해군사관들로 하여금 정신
적 타격을 받게 만들었다. 
여기서 에노모토(榎本)는, 일찍이 생각해 오던 계획
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에조공화국(蝦夷共和国)의
설립이다. 에노모토(榎本)는, 이러한 에조(蝦夷) 정
권을 국제법상의 국가로서 대외 여러나라로부터 승
인받고, 교전권(交戦権)을 갖는 독립국 자격으로서, 
신정부(명치정부)군에 대항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리고 이때, 일본 최초의 선거(투표 방식)가 실시되
었고, 에노모토(榎本)가 총재로 선출된다. 
아울러, 이때쯤 비로소 체제를 정비한 신정부는 비
로소 에조(蝦夷) 지역으로 토벌군을 파견하게 된다. 
1869년 4월, 신정부군은 에조(蝦夷)에 상륙하게 되고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그리고 에조공화국(蝦夷
共和国)은 그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최대의 패인 중
하나는, 곧바로 현금화할 수 없는 에조(蝦夷)의 자원
을 에노모토(榎本)가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결국, 금
(金, Gold)을 보유하지 못한 에조(蝦夷) 정부는 외국
으로부터 군함 등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석탄 등을
수입할 수 없었고 결국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어
항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항복후, 에노모토(榎本)를 비롯한 간부級들은 東京
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에노모토(榎本)는 자신
이 당연히 처형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
에도 적(敵)이었던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明治
정치가)가, 에노모토(榎本)의 구명을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닌 끝에, 1872년 에노모토(榎本) 등은 사면
(赦免)된다.
그리고 그후 에노모토(榎本)는 신정부로부터 요청을
받아 다섯 차례나 대신(大臣, 각료)으로 지내며 明治
정부의 중진으로서 활약했다. 에노모토(榎本)의 행운
은, 그의 학식을 알아보고 아깝게 여긴 구로다(黑田,  
明治 정치가) 같은 인물들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명치 정부의 주요 인물들은 뜻을 세운 지사(志
士)의 성격은 비록 강했지만, 과학이나 공학 등 지식
측면은 상대적으로 필요한 상태였다. 에노모토(榎本)
가 보유한 지식과 기술들이 신국가 건설에 요긴하게
쓰이게 된 배경이 되는 셈이다.
이 정도로 행운이 따른 패자(敗者)는 역사상 드물다.
에노모토(榎本)의 좌우명은, '배운 후라야 비로소 자
신의 부족함을 안다'는 것이었다. 역시 에노모토(榎
本)는 근본부터가 학구(學究)의 도(徒)였다. 

  네덜란드 유학시절(1862~1867)의 에노모토 다케아키
  (榎本武揚, 1836~1908)

  정부 고관이 된 말년의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