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22. 산케이(産經)신문
다섯 명의 조슈(長州, 現야마구치현) 사무라이는 청운
의 꿈을 안고 영국으로 유학갔다. 이들은 '조슈(長州)
五傑'로 불린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엔도 긴스
케(遠藤謹助), 야마오 요조(山尾庸三)는 당시 거의 알
려지지 않은 인물들이다. 유학중 이들이 찍은 사진이
있다. 영국에 도착해 1개월 후 양복차림으로 사진관
에서 찍은 것이다. 사진 속의 청년들 모습은 대단해
보이기보다는 평범해 보인다.  
이 유학(留学)은 日本이 근대화를 지향하면서 내딛은
발걸음이자, 특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있어
서는 그의 스승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뜻을 계승
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경
우, 번(藩, 쇼군 휘하 各다이묘<제후>가 통치하는 지
방영토)의 근대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서양식 해군
이 필요하다고 조슈번(長州藩, 現야마구치현)에 건
의했는데 이것이 실현된 것이었다. 
이들 다섯 명을 뒷바라지 해준 것은, 일본 근대 군
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무라타 조로쿠(村田"101六=오
무라 마쓰지로 大村益次郎)였다. 다섯 명이 유학길
에 오르기 직전, 무라타(村田)는 요코하마(横浜)의
요정(料亭) 사노시게루(佐野茂)에서 이들을 위한
연회를 열어주었다. 여기서 다섯 명은 머리를 깎고
양복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이들은 무라타(村田)의 알선으로 '저지 매디슨 상
회'(商会)가 수배한 작은 증기선을 타고 상해(上海)
로 출발했다. 조슈번(長州藩)이 다섯 명의 유학비
용으로 '저지 매디슨 상회'(商会)에 지불한 금액은
5억엔(億円)이었다. 
영국에서는, 런던대학UCL의 윌리엄 교수가 이들
다섯 명을 케어해 주었다. 윌리엄 교수는 런던과학
협회 회장이었다. 교수의 집은 방이 비좁아 다섯 명
모두가 기숙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노누에 가오
루(井上馨)와 야마오 요조(山尾庸三)는 화가인 쿠
퍼氏 집에 기거했다. 런던대학UCL은 다른 대학에
서 흔히 보이는 종교적 색채가 없었다. 종교가 가
미되면 아무래도 차별(선입관)이 생기기 마련이었
지만, 이곳에서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과학과 기술
을 익힐 수 있었다.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에 관한 책 '井上勝'(老川
慶喜 著)에는
을 전공했다>고 나와 있으며, 관련 수료증을 통해,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가 지질학 글래스에도 적
(籍)을 두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나와 있다. '저
지 매디슨 상회'(商会)의 소개로 이노우에 마사루
(井上勝)는 철도와 광산을 시찰하게 된다. 유신(維
新) 후에, 철도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이노우에 마
사루(井上勝)의 원점(原点)이 여기에 있었다.
다섯 명은 영어에 애를 먹었지만, 막부가 편찬한 '蕃
書調所編纂'(반쇼시라베쇼헨산) 英日(英和)사전을
찾아가면서 영자신문을 읽는 일을 일과(日課)로 삼
았다. 이를 통해, 다섯 명은 당시 세계의 정세를 파
악할 수 있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막부의 근
대兵學家)이 설립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일
찍이 길러 둔 독서력이 영국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다섯 명은 잉글랜드 은행을 보고 감탄했고, 당시 세
계 제일로 불리던 조폐공장도 시찰했다. 메이지(明
治) 시대가 되어, 이와쿠라시세쓰단(岩倉使節団,
明治정부가 1871~1873에 걸쳐 구미지역을 시찰한
사절단)의 부리(副使)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가 임명되어 미국과 유럽의 산업을 시찰하게 된 발
상의 원점(原点)도 바로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1864년 1월 영국신문은, 일본 요코하마(横浜)에서
발생한 나마무기(生麦)사건(1862년 8월, 일본내 영
국인 피살사건)에 따른 日英간 보상금 협의 등이 난
항을 겪으면서 영국 해군 함선이 사쓰마(薩摩, 現가
고시마) 지역을 압박하여 開戰 상황이 전개되고 있
다고 보도했다. 보도를 접한 다섯 명은, <우리 번
(藩,조슈=야마구치)의 시모노세키(下関) 쪽에서도
분명 開戰이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서로 협의한 끝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이
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귀국하기로 했다.
조슈번(長州藩)의 내부 의사결정이, 외국선(外国船)
을 물리치는 양이(攘夷)로부터 탈피하여, 開國을 통
한 근대화의 길로 나가는 것을 한시바삐 선택하는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일본은 국제사회로부터 낙
오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그때 다섯 명이 내린
것이다.  
영국에서 일본까지 가는 데에는 거금이 든다. 두 명
은 1864년 3월, 운임이 저렴한 범선을 타고 런던을
출발하여 희망봉을 거쳐 마다가스카르로 향했다.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거의 난파할 뻔 하기도 했다.
그리고 상해(上海)를 경유하여 6월에 요코하마(横
浜)에 도착했다. 런던에 계속 유학했던 나머지 세 명
중,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는 철도, 엔도 긴스케
(遠藤謹助)는 화폐제조와 화폐인쇄, 야마오 요조(山
尾庸三)는 조선(造船)과 기계공학을 각각 전공했다.
야마오 요조(山尾庸三)가 소지했던 런던제 화타식
(燧発式) 단총이 료젠(霊山) 역사관에 있다. 기계
공학을 배울 때 총(銃)의 연구 또한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총은 플린트 록式으로 불리는 16세기
때 개발된 단총(短銃)이다. 총에 붙어있는 금속판
에는 이니셜을 새겨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무기명(無記名)인 채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야마오 요조(山尾庸三)는 누군가에게 선물용으
로 줄 생각으로, 갖고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조슈번(長州藩, 現야마구치현) 출신 다섯 명의 영국 유학(1863년~)
  시절 사진. (뒷편 左로부터3명, 앞편 左로부터2명 順)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1936~1893),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1943~1910),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初代, 第5代, 7代,
     10代 '大日本帝國內閣총리大臣'),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936~1915),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1937~1917).
  야마오 요조(山尾庸三)가 소지했던 영국 런던제 단총(플린트 록 방식).
이토 히로부미 등 다섯은 영어에 애를 먹었지만, 英日(英和)사전을 찾아가면서 영자신문을 읽는 일을 일과(日課)로 삼았다. 이를 통해, 다섯 명은 당시 세계의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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