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海戰史에서 드문 케이스

(기사 原題 : 근대 해군사에서 보기 드문 경우… 敵前 도망했던 군함을 전시하는 中國)
2015. 3. 23. 산케이(産經)신문

대동아전쟁(1941~1945)에서 미군의 맹공을 받아 필리핀
의 바다에 침몰한 전함 무사시(武藏)를 미국의 자산가가
발견했는데, 무사시(武藏)로 인해 갑자기 청국해군(清国
海軍)의 북양함대(北洋艦隊) 군함이 떠올랐다. 경이로운
도주 속도를 자랑하며 일본 제국해군의 맹추격을 두 번
이나 따돌린 것인데, 첫번째는 백기(白旗)를 게양하고
항복하는 것으로 위장하며 달아났고, 두 번째는 적전도
망(敵前逃亡)이었다.

결국에는 일본측에 노획되어 나중에는 일본을 위해 싸
웠다. 이러한 불명예 덩어리의 일부가 중국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된 이유는 '치욕의 역사'를 인민에
게 그대로 알리는 차원이나 도량(度量)이 있어서가 아
니라, 인민에게 일본을 경계하도록 하고 전의를 고양케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국해군 순양함 '제원'(濟遠)

때는 日淸전쟁(1894~1895) 당시 서전(緒戦)이다. 제국
해군은 한반도 서해안에서 회합할 예정인 무사시(武
藏)를 포함한 두 척을 기다리고 있었다. 2차 대전 때의
무사시(武藏)는 아니다. 同名異艦이다. 무사시(武藏)
라는 이름의 제국해군함(艦)은 역대로 세 척이나 된다. 
당시 두 줄기 연기가 수평선에서 피어 오르는 것을 발
견하고 제국해군은 무사시(武藏) 등 두 척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접근했다. 그런데 확인된 것은, 청국
해군의 독일제 순양함 제원(濟遠)이었다. 

돌연, 제원(濟遠)의 21인치 연장포(連装砲)가 불을 뿜
었다. 이것이 바로 '풍도(豊島, 경기도 안산 대부동의
섬) 해전'이다. 제국해군은 즉시 응전하여 당시 농무
(濃霧)에도 불구하고 수 분 후에는 정확히 제원(濟
遠)의 함교를 향해 명중탄을 발사한다. 이때 제원
(濟遠)의 副함장이 전사한다. 제원(濟遠)은 마스트
에 펄럭이던 청국기(清国旗)를 내리고(하강), 백기
(白旗)를 게양하여 항복했다.

그런데, 제원(濟遠)은 기관을 정지시키고 순응하는
뜻을 보여야 하는 항복시의 국제법을 무시하고 백기
(白旗)를 갑자기 하강하고 잠시 후 다시 게양하는 등
의 행위를 반복하는 가운데 함포 공격을 해왔다.
단정(端艇)을 파견하여 적의 선체(濟遠)를 확보하
는
조치를 속히 하지 못한 일본측의 방심도 있었다.
결국,
당시 세계 굴지의 속도를 자랑하는 제국해군
의 순양
함을 따돌리고 제원(濟遠)은 동료함(艦)을
버려둔 채
달아났다.

하지만, 2개월도 지나지 않아 서해에서 또 만나게 된
다. 이때 제원(濟遠)은 전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했는지
제대로 싸울 생각도 안하고 적전도망(敵前逃亡)하여 
모항의 하나인 여순(旅順)으로 들어가 버렸다. 제해권
의 완전손실을 우려하며 나중을 기약하기 위해 배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분석도 일부 있지만, 근대
해전사에 있어 적전도망(敵前逃亡) 케이스는 매우 드
물다. 제원(濟遠)의 함장은 참수되었다(총살說도 있다).

■ 치욕을 전시하는 박물관 

제국해군은 중국으로부터 노획한 제원(濟遠)을 日露
전쟁(1904~1905)에 투입했다. 그리고, 여순(旅順)전
투
에서 203 고지를 점령하고자 하는 제국육군을 함
포사
격 지원하던 중 촉뢰(触雷, 기뢰접촉)하여 침몰
했다.
1980년대에 중국은 침몰한 제원(濟遠)의 대포
등을 발
견하게 되었고 이를 인양하여 박물관에 전시
했다. 인
양된 제원(濟遠)의 21인치 포는, 이전에 제
국해군에게
백기를 들고 항복한 후 돌연 불을 뿜었
던 그 포(砲)다.    

놀라운 것은, 중국 공산당軍은 주로, 일본 제국육해
軍
과의 주요전투를 피하며 달아났었는데, 북경의 인
민
항일전쟁기념관이나 남경대학살기념관에는 인양
된 
제원(濟遠)의 포(砲) 등이 '전리품(戦利品)으로 안
내
되고 장식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창작의욕'
은 
높이 살 만하다. 

중국 위해(威海)市 유공(劉公)島는 당시 중국해군의
요충지였는데, 싸움을 피해 틀어박히던 북양함대 최
신예 주력함을 포함한 잔존함정들이 이곳에서 궤멸
되었다. 당시 이곳에서 일본은 육해군 합쳐 29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것에 비해, 중국(청국)은 4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는 대참패를 겪었다. 드문 일도 아
니
지만, 패색이 짙어지자 청국의 해군수병은 반란까
지
일으켰다. 이러한 불명예 가득한 장소에 박물관
등을
두어 그때의 일을 오픈하는 것은, 일본에 대한
지속
적인 경계와 전의 고취에 그 목적이 있으며, 현
재 만
연한 부정부패와 빈부격차에 따른 인민의 불만
을 다
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시도의 일환으로 보인
다.  

당시 아시아 1위, 세계 4위였던 청국해군이, 아래로
보았던 일본 제국해군에게 참패하게 된 것과 관련하
여, 중국공산당 기관지들(해방군보 등)은 그 배경으
로, 장병의 자질, 군기이완, 훈련의 무통제, 부패의
만연, 투지의 결여 등을 주로 꼽고 있다.

1894年7月25日の日清戦争開戦と豊島沖海戦を報じた当時の新聞。この海戦で清国海軍の防護巡洋艦「済遠」は白旗を掲げて逃走し、その“逃げ足”の速さが有名となった(提供写真)
 
1894년 7월25일 日淸전쟁개전과 풍도(豊島)해전을 보도한 당시 신문. 
  이 해전에서, 
청국의 순양함 제원(濟遠)은 백기를 게양하고 도주하여,
  그 '도주하는 속도'가 당시 
유명세를 탔다. 


豊島(ほうとう)沖
 
'풍도(豊島)해전'이 펼쳐진 풍도 앞바다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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