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당성 각자 판단
2015. 4. 15. 산케이(産經)신문
후루타 히로시(古田博司), 쓰쿠바大 대학원 교수
■古代 수준에 머물러있던 朝鮮
명치시대(明治時代, 1868~1912) 당시 경제학자 후쿠다
도쿠조(福田徳三, 1876~1930)는 朝鮮의 실상을 확인한
후, 마치 日本의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 때와
같다고 말했다. 토지 소유권이 없고, 상점(商店)도 없고,
행상인(行商人)만 있을 뿐…후쿠다(福田)의 눈에 비친
당시 朝鮮의 모습은 지금의 北韓 같은 세계였을 것이다.
전후(戰後) 마르크스 학자들은, 세계 각지의 모든 곳은
필연적으로 발전하게 되어 있으므로 일정한 단계를 거
쳐 진보한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후쿠다(福
田)에게 <朝鮮을 차별한 者>라는 식의 낙인을 찍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후쿠다(福田)의 견해가 옳았다
는 것은 연구를 통해 규명되고 있다.
지나(중국) 지역과 한반도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지
금으로 치면, 선진기술국 옆에 극빈국이 위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朝鮮에게는 일차산품(一次産品) 이외에
내다 팔 만한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中國의 바늘(針)이나
염색원단(染色衣料) 등 고도의 기술품을 얻기 위해 朝鮮은,
쌀(米)과 베(布)를 중국으로 반출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한 기아(飢餓) 상황은 피하기 어려웠다. 12세기부터는
한반도로부터 은(銀)이 유출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후
200여년에 걸쳐 한반도의 은(銀) 산출은 거의 고갈되어
버린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李氏朝鮮이 들어서자 한반도의 경제
는 더욱 중국에 대한 방어적 태세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朝鮮의 특권상인(特權商人)은 쓰시마(對
馬)와의 교역을 통해, 中國의 백사(白糸)를 日本側에 넘기
고 대신 日本으로부터 은(銀)을 얻는다. 그리고 조공사절
(朝貢使節)이 파견될 때, 특권상인들은 하인이나 마부(馬
夫) 신분이 되어 200명, 300명 단위로 中國에 들어가, 日
本銀을 이용해 朝鮮의 지배계층을 위해, 북경(北京)에서
고도의 기술품이나 예술품을 구입했다. 이러한 특권상인
들 각자에게는 지배계층으로부터 포상도 주어졌다.
여진족(女真族)이 中國 지역의 정복자가 되고 청조(淸朝)
를 열면서, 朝鮮은 이들로부터 큰 규모의 공물(貢物)을 요
구받게 되고, 이에 대한 공물 공급 역할도 특권상인들이
지속적으로 맡게 되었다. 이런 관계의 지속으로 인해, 朝
鮮은 18세기까지 古代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朝鮮의 상인 길드(동업자 조직)는, 지배계급 스스로
가 다른 상인들과 개별적으로 결탁하는 등 현상 때문에
공백을 맞게 되고, 이로 인해 민간 차원에서는 염료(染料)
를 취급하는 제대로 된 주체가 없어져 민중들은 흰 옷 차
림(白衣姿)이 되었고, 결국은 바늘(針) 하나도 제대로 만
들어내지 못하는 낮은 기술수준에 朝鮮은 계속 머물게 되
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朝鮮은 日本에게 병탄(併
呑)되었다.
■격차 때문에 실시한 근대화 정책
당시 日本이 확인했을 때, 朝鮮의 국고(國庫)는 텅 비어
있었다. 朝鮮 왕은 <그대들 좋을 대로 알아서 하라>며 다섯
명의 대신(大臣)에게 나라를 통째로 위임했다. 이와 관련한
사료(史料)는 실록 왕실일기(王室日記)를 비롯한 세 군데에
나온다. 日本이 朝鮮을 통치한 당시는 서양열강이 각축을
벌이던 시대였다.
日本이, 朝鮮에 대해 近代化 정책을 실시한 것은, 너무나
격차가 심했기 때문에 그대로 朝鮮을 방치해 두면 오히려
나중에 훨씬 더 큰 코스트(비용)가 들어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때문에, 한반도에 관한한 '침략' 등의 표현을
쓰는 것은 무리가 있다. 명(明)과 청(淸)은 자신(中國)과의
압도적 격차 때문에, 朝鮮의 경제를 中國 경제의 일환(말
단)으로 간주하지 않기로 하고, 朝鮮의 경제 발전을 억제
했었다.
日本 근린국(한국, 중국)의 경우, 사회의 기본 단위가 남계
혈족(男系血族)에 의한 종족(宗族)이다. 때문에, (국가)공
동체 의식이, 지연(地緣)에 못미치는 경향이 있다. 물리적
으로는 일족(一族)을 위한 축재(蓄財)를 하고, 정신적으로
는 자신들 개별 종족(宗族)의 역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인
식을 갖는다. 국가 차원의 역사는 불행하더라도, 자기 집
안의 역사는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러
한 後者 인식('훌륭한 집안 역사')이, 前者 인식('국가 역사')
를 능가하게 되어, 급기야 국사(國史)까지 위조하는 단계에
이른다. 이러한 현상이 체제 차원으로까지 대규모로 나타
난 것이, 北韓에서는 김씨 일가의 '혁명전통'이라는 것이
고, 韓國에서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당시 시작된 '역사
바로잡기' 정책이었다.
韓國에서는 1990년대 이후, TV 역사 드라마에서는 노비(奴
婢)까지 색깔있는 옷을 입고 나오게 되고, 외출금지였던 이
조(李朝)・경성(京城)의 밤(夜)을 노비가 제등(提灯)을 들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게 되었다. 불운했던 '은자의 나라' 朝
鮮이 현란하게 채색되어, '자랑스러운 나라' 朝鮮으로 변모
하게 되었다. 이후로, 韓國人의 현실상(現実像)과, 역사상
(歷史像)은 상호간 괴리(乖離) 현상을 보이게 되었고, 이러
한 괴리 현상으로 인해 韓國人은, 말하는 것과 실제 간에
모순을 보이는 상황이 되고 있다.
日本의 朝鮮統治와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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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5, 2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