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에서 바라본 박정희

1979년 11월,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 극장에 간 적이 있다. 당시는 영화시작 전에 ‘대한뉴스’를 덤으로 보던 시대였다. 그 때 ‘대한뉴스’는 주로 박대통령의 장례장면을 다루면서 많은 국민들, 특히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오열하는 장면위주로 편집되어 있었다. 그 때 내 옆에서 그것을 보던 대학생인 듯한 청년이 중얼거리듯 내 뱉은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한국사람들 착하긴 무척 착해…”

사실 그 때는 많은 사람들이 박대통령의 오랜 독재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라 그가 사망했다는 사실로부터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기대로 끝났고, 그 뒤 우리는 한동안 박정희 독재시대의 복사본 같은 시대를 다시 거쳐야 했다. 박대통령도 이미 오래 전 부터 역사의 평가 대상이 되었으며, 지금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서는 ‘친일파’로서 친일청산의 대상으로 까지 이야기되고 있다.

나는 행주산성 아래서 조상 대대로 살아오고 있기 때문에 행주산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박정희’대통령을 보기도 한다. 그는 서거하기 얼마 전에도 행주산성의 진입로 포장 등 이른 바 ‘성역화’완성을 기념하기 위하여 행주산성에 올랐었다.

내가 덕양산(행주산성을 주로 그렇게 불렀다)에 처음 올랐던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 었다. 불과 해발 124미터에 지나지 않는 산이었지만 그 산에 오르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꽤나 힘이 들었던 기억이 아물아물 하다. 산에 거의 다 오르면 파아란 한강물이 가파른 경사면 아래로 굽이쳐 흘러간다.

당시 산 정상에서는 어린 나의 눈으로 보기에는 매우 경이적인 대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화강암을 깎아 높이 한 10미터정도에 이르는 대첩비(선조임금이 세웠다는 작은 비각 안의 행주대첩비와 별도로)를 세우는 공사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대첩비에 쓰여진 글씨가 박대통령의 것이라는 사실이 말해 주듯, 그 공사는 박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공사였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인가? 박정희대통령이 경제개발에 필요한 돈 몇 푼이 아쉬워 수 많은 반대 속에 일본과 외교관계 정상화 조치, 즉 한일협정을 체결하던 시기가 아닌가? 당시 얼마 안되는 국가재정규모를 고려할 때 박대통령은 분명 ‘극일을 위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일’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행주산성에서의 승리는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 거둔 명실상부한 거의 유일한 대첩이었다. 더욱이, 거만하고 기세등등하던 명나라의 이여송군대가 근처 벽제관에서 왜군에게 참패한 뒤라 민족의 운명이 참으로 바람앞에 등불같던 때가 아니었던가?

바다에서의 이순신의 승리가 장군의 철저한 준비와 지도력에 의한 것이라면, 행주대첩은 ‘행주치마’가 말해주듯 그야말로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군을 격퇴한 승리였다. 그때 권율장군이 지휘한 관군의 수는 삼천명이었고, 왜군의 수는 삼만명이었다. (권율장군은 행주산성에서 대승 후 도원수가 된다.)

박대통령의 행주대첩비가 세워진 지 약5년 뒤부터 다시 전면적인 행주산성 ‘성역화’사업이 시행되었다. 동네 한 귀퉁이에서 다 허물어져 가던 권율 장군의 사당을 행주산성으로 옮겨 ‘충장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건축하였고, 산성 정문인 대첩문도 세웠으며, 여러 개의 정자들도 세워지거나 개축되었다.

현재의 행주산성의 모습은 이때 거의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준공식에는 박대통령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한 10년 뒤 박대통령은 행주산성의 진입로 포장 등 그의 ‘행주산성 성역화’의 완성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시 행주산성에 오른 뒤 얼마 안되어 서거하게 된다.

그 당시 행주산성은 수많은 학생들이 소풍과 수학여행의 단골코스로서 민족역사의 교장이었고, 풍광도 수려해서 일반국민에게도 매력있는 관광지였다. 현재의 행주산성도 당시 ‘박정희 작품’에서 크게 달라진 것 없다.

현 노무현대통령이 일본과 독도문제, 교과서 역사왜곡 문제로 한껏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일본은 그와 같은 ‘즉흥적’ 목소리를 한국 국내용으로 폄하하고 있는 지금, 나의 머리 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맴돈다. 노무현대통령은 행주산성을 아는지? (그가 합격한 사법시험과목에 국사가 있었으니까 아마 ‘행주대첩’을 암기사항으로 외웠을 것이다.) 그가 과연 행주산성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대통령은 바쁘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문화도시 건설을 강조하는 고양시는 어떠한가. 정작 교통체증이 심한 도심에, 우리 전통적 건축미라고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공연장 등을 건립하는 데 열을 올릴 뿐이다. 정작 고양시의 뿌리인 행주산성에 대해서는 ‘박정희 작품’을 우려먹으면서 생색내기 정도의 배려가 전부인 듯하다.

행주대첩을 기념하는 ‘행주대첩제’도 국가적 행사는 고사하고, 지역문화행사도 되지 못한 채 (고양시가 몇군데 현수막을 붙여놓는 것 외에 실제는 권율장군 후손들이 찾아와 사당에서 제사를 올리는 정도로) 많은 시민들이 행주산성의 의미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가운데 그저 베드타운의 주민으로 살아가기 바쁘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 특히 신세대 국민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문화재관리청도,광화문의 현판글씨에 대한 시비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박정희식 문화재 관리 및 복원이 문화재관리에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식으로 생각하거나 그 뒤에 숨어있는 정치적 미를 부각시키려는 듯 하다. (물론 우리의 국력이 커지고 여유가 생기면 콘그리트로 복원되었던 일부 문화재들은 보다 더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하는 것도 바람직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시절 서울한복판에서 연례행사로 치루어 졌던 ‘임진왜란승전기념행사’가 단지 정치적 쇼 내지 코메디가 아니었던 것 처럼 박정희대통령의 ‘행주산성 성역화’도 안보를 내세운 전체주의적 통치수단의 일부로만 매도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가꾸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주변국가들은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노력은 우리가 세계화시대에 뿌리를 잃은 ‘글로벌 부초’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특히 외침으로 부터 국가를 구한 승리의 장소는 어느 나라에서도 국가적 명소로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박정희대통령은 이러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공과 중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기억되어야 한다.

오늘도 행주산성은 서울의 서북쪽 고양시의 입구에서 한 말뚝처럼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류병운 (미국 뉴욕주 변호사, 법학박사)

* 이 글은 www.new-right.com에서 전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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