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경제도 흑백론이 최고 이론


문) 다음 중 좋은 것은 O, 나쁜 것은 X 표시를 하시오.
1. 대기업 ( ) 중소기업 ( )
2. 전통 기업 ( ) 모험 기업 ( )
3. 수출 ( ) 수입 ( )
4. 소유경영 분리 ( ) 소유경영 미분리 ( )
5. 공기업 ( ) 민간기업 ( )
6. 노동조합 ( ) 전경련 ( )
7. 외국 회사 ( ) 한국 회사 ( )
8. 외자 유치 ( ) 해외 투자 ( )
9. 은행 융자 ( ) 주식채권 발행 ( )
10. 부채 ( ) 자기자본 ( )
11. 소비 ( ) 저축 ( )
12. 연구개발 ( ) 시설투자 ( )
13. 창업 ( ) 인수합병 ( )
14. 업종 전문화 ( ) 사업 다각화 ( )
15. 대우 ( ) 현대 ( )
16. 해태 ( ) 롯데 ( )
17. 기아자동차 ( ) 삼성자동차 ( )
18. 부도 ( ) 사업확장 ( )
19. 주가급등 ( ) 주가폭락 ( )
20. 공기업 민영화 ( ) 은행 국유화 ( )

답) 정답 없음

[한국인의 옳고 그름을 재는 잣대는 사람]

한국인은 옳고 그름을 격렬히 따지지만, 목숨을 걸고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고 말 배우던 앵두 입술을 다 벌리고 말랑말랑 숨구멍 머리까지 다 쥐어짜서 원수의 잘못을 먼지 하나, 분자 하나, 원자 하나 다 밝혀 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번 먹은 마음을 바꾸는 일이 없다. 누가 보아도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이 현실에서 드러나는데도 한사코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편단심이다. 백골이 진토되면 자손대대로 그 뜻을 이어 받는다. 자기편에서 누가 옆구리를 쿡 지르면서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말을 하는 게 아니냐고 하면, 눈은 있는지라 쓰윽 둘러보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예 현실이 잘못되었다고 강변한다. 도리어 옆 사람과 아랫사람을 계몽한다. --나, 머리 좋지?

그러다가 어떤 때는 정말 희한하게도 기존의 입장을 싹 바꾸는 일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 주변의 인물들도 다 그러하다. 엉거주춤 서 있던 사람은 즉시 어제의 동지에서 오늘의 회색분자로 전락되거나 배반자가 된다. 철천지원수가 된다. 이 때도 마음이 변한 건 아니다. 사모하는 님이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에 입장을 바꾼 것이지, 님을 향한 마음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회색분자와 배반자는 진리의 잣대인 님이 새 이론을 개발했는데, 그걸 따르지 않고 있다. 얼른 새 이론을 배우고 익히고 그에 맞는 논리를 개발하여 님에게 바쳐서 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데, 게으르게, 어리석게 썩은 밧줄을 잡고 있다.'

이런 예는 부지기수이다. 해방 공간에서 한국인은 누구나 유엔 상임이사국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했다. 반만년이라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인에게 그것은 치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한 무리가 친탁으로 일제히 돌아섰다. 알고 보니, 구소련의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김일성이 이를 '남조선'에 은밀히 하달했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정반대의 논리를 펴면서도 그들은 조금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경제 논리는 '어르신'이 결정]

경제에도 이런 일이 없을 수 없다.
때는 1997년. 노동법 파문으로 전국이 들끓었다. 핵심은 정리해고안을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이 다수의 힘으로 입법화하자, 노조와 대학생과 야당이 물실호기(勿失好機)로 여기고 거국적으로 들고 일어난 것이다. 기아 문제도 불거졌다. 김선홍 회장은 영웅이었다. 강경식은 간웅이었다. 광명시 소하리는 대선주자들의 뜨거운 선거 유세장이 되었다. 기아는 가련한 국민 기업이었다. 삼성은 악랄한 반국민 기업이었다. 그 해 말 환율이 폭등하면서 외환 고갈로 국가가 부도 위기에 처해졌다. IMF는 한국의 경제신탁통치 본부가 되었다.

문제는 아주 재미있게 전개되었다. 새 정부는 그렇게 정리해고를 반대해 놓고도 국가 위기라는 방패를 슬그머니 걸어놓고 '나라 말아 먹은 당'이 통과시켰던 것과 거의 유사한 법을 제정했다. 재미있게도 이를 새로이 여당이 된 사람들과 그 지지자들이 일언반구 해명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강경식뿐만 아니라 김선홍도 감옥에 가두었다. 오히려 강경식은 나중에 '정책실패는 그 책임을 묻기 애매하다'는 취지로 슬그머니 풀어 주었다.

제3자 인수는 그렇게 안 된다고 하더니, 기아 자동차는 무려 7조여원의 부채를 탕감해 주고 제3자인 현대, 단 삼성이 아닌, 현대에게 독과점 금지법을 기막히게 해석하여(부실기업 인수 시에는 한 회사의 시장점유율이 50%를 넘어 70%가 되어도 관계없다) 거의 공짜로 주었다. 부채를 털어 준 기업을 흑자로 만드는 거야 바보 아니면 할 수 있지 않은가.

결국 원칙과 법은 오로지 '어르신'이 결정할 뿐이다. '어르신'이 슬쩍 입장을 바꾸면 일제히 그 혜안에 감탄을 거듭하면서 멋진 논리를 제공하여 옹호하고 나팔과 피리와 북을 동원하여 밤낮으로 찬양한다. 그러나 원수는 절대 용서 못한다. 원수가 주장하던 바를 그대로 받아들여 놓고도 원수는 여전히 뱀과 전갈 보듯 한다. 원수는 여전히 '어르신'께 머리를 조아리지 않기 때문이다. '원쑤(怨讐)'의 원수(元首)는 아예 개돼지 취급한다. 입에 담지 못할 육두문자를 그 이름 앞에 줄줄이 달지 않으면 한 마디도 말을 못한다. 그러나 어떻게 세월이 바뀌고 강산이 뒤집어져 그 '원쑤(怨讐)'의 원수(元首)를 어르신으로 모시게 되면, 그 날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지난 과오를 한꺼번에 참회하고, 새 어르신을 종달새처럼 맑은 목소리로 하늘처럼 받들어 모신다.

[어르신을 따르지 않고 원칙을 따르면 왕따되는 나라]

어르신이 당을 새로 만들 때면, 제 정신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정치 생명을 걸어야 한다. 삼척동자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아무리 객관적으로 내 생각이 옳을지라도 '나라와 겨레를 살릴 새로운 당'에 참여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가면, 철저히 도태된다. 신한국당을 만들 때 민주당을 지켰던 김광일, 이기택, 김정길, 노무현, 평민당을 만들 때 고개를 외로 꼬았던 김상현이 한 동안 철저히 왕따 당했다. 국민들도 투표소 바깥에서는 그들을 진심으로 지지한다 해 놓고, 투표소 안에만 들어가면 손은 엉뚱한 데로 갔다. '정치는 현실이야. 미안해, 다음엔 꼭 찍어 줄게.'

정치를 계속하려면 어쩔 수 없다. '꼭 막힌, 이론으로만 민주주의를 아는' 자들은 현실의 벽을 절감하고 천하가 다 보게 백기를 펼쳐들고 당당히 달려가서 어르신 앞에 가는 순간 무릎을 팍 꺾고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기어가지 않을 수 없다. 가기만 하면 즉시 이들은 눈웃음을 살살 흘리면서 꼬리를 살살 흔든다. 그러면 돌아온 탕아로서 크게 한 재산 물려받는다. 과거의 잘못은 일절 묻지 않는다. 새로운 영웅 탄생.

[경제도 마찬가지]

경제도 예외가 아니다. 어르신의 탁월한 경제 이론에는 어떤 이론도 맥을 못 춘다. 어르신이 '금융실명제' 하면 즉시 '금융실명제'를 일제히 복창한다. 새로운 어르신이 이번에는 '빅딜' 하면 즉시 '빅딜'을 일제히 복창한다. 신문, 방송 요란하다. 거기에 입을 삐죽거리면 즉시 '안티' 운동이 벌어진다.

어르신이 '외자 유치 좋은 거야.'하면, 어제까지만 해도 매판자본을 그렇게 떠들던 신문이 영국, 아일랜드, 중국의 성공 케이스를 줄줄이 특집으로 싣는다. 어르신께 표를 모아준 사람들은 즉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눈을 반짝이며 특집을 읽고 공부를 한다. 그 날로 크게 깨닫고 천지사방으로 쫓아다니며 아무나 붙잡고 입에 가득 거품을 품고 전도를 한다.

어르신이 '금강산 관광은 남북 화해의 물꼬'라고 하면, 여기저기 눈물의 박수가 쏟아진다. 여기에 경제성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즉시 그에게는 '반통일'이 새겨진 돌멩이가 날아간다.

어르신이 '현대는 수익 산업이 많아서 대우와 다르다.'라고 하면, 김우중은 희대의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체포조가 조직된다. 유럽으로 급파된다. 국제법이고 뭐고 없다.

어르신이 '선진국은 다 업종 전문화한다.'고 하면, 선진국의 온갖 업종 전문화 회사가 신문에 도배된다. '빅딜'은 가속화되고 재벌은 계열사를 마구 처분해야 한다.

어르신이 '지배구조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하면, 정부 말 잘 듣는 현대도 가만 두지 않는다. 그러나 왕회장이 눈치를 읽고 완전히 뒷방으로 물러나면, 그 아들들이 나머지를 다 차지해도 그 정도로 해 두고 데면데면한 삼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30대 재벌이 다 합해서 기껏 2000년에 순익 2조원을 냈지만, 삼성 혼자 7조원의 순익을 낸 것도 전혀 안중에 없다. 현대가 혼자 6조원의 적자를 본 것은 아무도 시비하지 않는다. 눈치 없는 삼성은 아직도 대북 사업을 떠맡지 않는다.
어르신이 '모 항공회사가 자꾸 사고를 내는 것은 지배구조 때문이다.'라고 하면 그 다음날로 그 재벌의 회장은 손자 재롱이나 봐 주어야 한다. 그 회사의 온갖 치부가 신문에 깨알같이 실린다.

어르신이 '상호지급 보증 금지, 선진국의 연결 재무제표도 아닌 선진 한국의 결합 재무제표를 작성하라.'고 하면, 장관 이하 전 공무원이 열 일을 제치고 현장으로 뛰어간다. 신문은 연일 그 장점을 홍보한다.

어르신이 '부채비율을 일본과 비슷하게 200%로 맞추라.'하면, 그 혜안에 감격하여 밤낮으로 울고 부는 신문과 방송이 허다하다. IMF는 오로지 저 재벌의 과다한 부채 때문에 온 것이라고 땅을 치면서 과거의 어르신들을 '골목 강아지, 주막 강아지'로 만들어 그 배때기를 걷어찬다.

어르신이 '은행을 구조조정하라. 돈은 공적자금으로 조성하라. 주식을 소각하고 국유화하라.
BIS 8%를 맞추라. 한두 은행은 꼭 외국에 넘겨라. 절대 재벌은 주인 찾기 명목으로 참여시키지 말라.'하면, 어디서 나오는지 나중에 어떻게 갚으려는지 돈은 얼마든지 있다. 64조원, 109조원, 150조원. 부실 은행을 아무리 껌 값으로도 선진 금융 기법을 전수할 구세주이신 외국이 사 주기만 하면 감지덕지하여 몇 년 동안의 추가 부실 채권은 다 떠맡는다(이를 풋백 옵션이라고 하느니--어르신 말씀). 외국 금융사는 아무리 이름 없고 경험 없어도 괜찮다. '외(foreign)'자만 붙으면 된다.

[꽃과 같은 시장]

시장은 꽃과 같다. 거름이 좋다고 난초에 거름을 듬뿍 주면 그 날로 난초가 죽어 버린다. 물을 주어야 한다고 비오는 날에도 백일홍에 물을 주면 그 뿌리가 다 썩어 문드러진다. 병들었다고 봉숭아에 DDT를 마구 살포하면 금새 꽃이 다 시들고 줄기도 말라비틀어진다. 저 혼자 커야 한다고 산 속에 채송화 씨를 뿌리고 내버려두면 잡초와 나무에 치여 만 개의 씨 중에 한 씨앗도 싹 트기 힘들다. 꽃봉오리 하나 맺기 어렵다.

인간의 생각에 꽃을 맞추려 하면 안 된다. 꽃에 인간의 생각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화란처럼 꽃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
농부도 아닌 사람이, 화훼 연구가도 아닌 사람이 돈 좀 있다고 힘 좀 있다고, 지나가는 길에 이것저것 마구 주문하고 지시하고 간섭하고 협박하면, 결국 죽어나는 것은 꽃이요, 농부요, 화훼 연구가이다.
(2001.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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