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12월 朴대통령이 改閣을 하면서 李厚洛 정보부장을 해임하고 후임에 申稙秀법무장관을 임명한 것은 金大中 납치사건으로 인한 韓日 갈등이 金鍾泌총리의 訪日 유감표명으로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朴대통령은 이때 金溶植외무장관을 金東祚 駐美대사로, 李湖 주일대사를 金永善씨로 교체했다.
이때 李厚洛 부장은 이미 權府내에서 힘을 잃은 상태였다. 金鍾泌총리, 朴鐘圭 경호실장뿐 아니라 陸英修여사도 그를 싫어했다. 朴대통령에게 일상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모두 李부장을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陸여사는 한 사건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 이 무렵 陸여사 앞으로 한 장의 진정서가 도착했다. 요지는 정보부 직원이 민간인인 진정인의 채권채무 문제에 개입하여 진정인을 연행, 고문하여 허리뼈를 다치게 했다는 것이었다.
陸여사는 이 편지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넘겨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민정실에서 진정인이 입원해 있던 병원으로 사람을 보내 조사를 해보았더니 그 주장이 사실인 듯했다. 이 보고를 받은 陸여사는 朴대통령에게 알렸다. 대통령은 李厚洛 부장을 불러 따졌다. 李부장은 며칠 후 그 진정 내용은 모함이란 보고를 올렸다.
대통령은 청와대 사정특보로 있던 洪鍾哲과 그 아래 崔大賢 검사를 불러 특별조사를 지시하고는 수시로 진행상황을 확인했다. 崔검사가 정보부를 상대로 조사해보니 진정인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졌다. 朴대통령은 대단히 화가 났다. 그 며칠 후 李부장은 해임되었다.
李부장은 해임된 직후 몰래 출국했다. 申稙秀후임부장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당시 駐영국대사는 육군참모총장 출신 崔慶祿이었고 정보부에서 파견나온 공사는 金東根이었다.
金씨는 李厚洛 정보부장 밑에서 보안차장보로 근무하면서 10월 유신을 준비하는 데 관여했던 이였다. 1973년12월 초순 金공사에게 정보부 李哲熙 차장보가 전화를 걸어왔다.
'李厚洛 부장이 출국한 뒤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데 영국으로 간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소재를 파악하여 보고하라'
金공사는 부하직원인 李鍾贊(전 국정원장)과 함께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확인이 되질 않았다. 金공사는 영국사람중에 Lee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金공사는 '李부장은 영국에 오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가 나중에야 안 사실은 李부장이 영국 런던에 도착한 뒤 시내로 들어오지 않고 히드루 공항 옆 홀리데이 인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중남미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李厚洛 귀국작전
하비브 駐韓 미국대사가 李厚洛건으로 朴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 金鍾泌 총리도 있었다고 한다. 미국 CIA는 李厚洛이 출국한 뒤 그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비브 대사는 '지금 이후락씨가 바하마에 가 있는데 망명신청을 할지도 모른다는 첩보가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 말 없이 담배만 빨고 있다가 하비브가 나간 뒤 총리에게 '그놈, 당장 잡아와야겠어'라고 내뱉듯이 말했다.
몇 사람의 밀사가 李厚洛을 만나러 갔다. 李씨는 金炯旭 전 정보부장이 유신 직후 미국으로 달아나버린 사건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10년 이상 朴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권력과 금력을 마음껏 누렸던 李厚洛이었다. 후임 정보부장이 그를 뒷조사하여 벌거벗겨놓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란 것은 적지 않은 惡役의 담당자였던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그를 안심시키는 공작이 진행된 직후였다. 런던의 金東根 공사에게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李厚洛이었다. 그는 '몸이 아파서 치료를 받고 이제 돌아가려고 한다. 본부에 보고해주었으면 좋겠다. 런던을 거쳐서 가겠다'고 했다. 런던에 온 李厚洛은 崔대사 하고만 식사를 한끼 한 뒤 홍콩으로 갔다.
홍콩에 도착한 李厚洛 부장은 金鍾泌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더듬는 말투로 '비, 비, 비행장에서 체포안합니까'라고 물었다.
'체포는 무슨 체폽니까. 정보부장 지내신 분이 외국을 돌아다니니까 모양이 안좋습니다. 빨리 들어오세요. 들어와서 각하께 사죄하고 하회를 기다립시오'
'정말 비행장에서 체포 안합니까?'
'잠시 기다려요. 여기 옆에 申稙秀 정보부장이 와 있으니까 두분이 이야기해보세요'
전화기를 받아든 申부장은 '부장님 체포 안합니다. 빨리 들어오세요'
라고 말했다.
대통령면담日誌를 보면 李厚洛의 귀국 직후인 1974년3월6일 오후 5시16분~6시15분 사이 대통령이 李씨를 집무실로 '招致'한 것으로 적혀 있다. 이 자리에서 李씨는 용서를 받고 근신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李厚洛은 충무시의 해안에 있는 호텔에 장기투숙한다.
당중앙, 李厚洛 납치지시
1974년 4월3일, 북한 노동당 對南공작부서인 연락부 제1부부장 이완기가 남포연락소 공작조장 金用珪를 불렀다. 이완기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지금 李厚洛이 해외에 나갔다가 귀국하여 충무호텔 2층 특실에서 휴양중이란 정보가 들어왔다. 당중앙(김정일)에 보고했더니 납치해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남포연락소는 30명으로 납치조를 편성하여 훈련에 들어갔다. 李씨의 주치의와 경호원까지 납치하기로 했다. 金用珪팀은 남포시 와우도 휴양소를 가상 표적으로 설정하고 마취실습과 모의훈련에 들어갔다. 사회안전부 부부장 이명선을 실험대상으로 하고 그 옆방에 경호원들을 배치했다. 공작조의 납치실험은 매번 성공적이었다.
10여일 뒤 납치요원들은 두 척의 공작선을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중국측 해안에 붙어 남하하던중 배가 상해부근에 이르렀을 때 공작을 중지한다는 연락이 왔다. 납치대상인 李厚洛이 충무를 떠났다는 것이었다. 서울출신인 金씨는 2년 뒤 거제도로 남파되었다가 동료 간첩 두 명을 사살하고 귀순했다.
金正日은 1978년엔 이완기를 시켜 崔銀姬 申相玉 부부를 납치해온다. 외국인, 한국인, 요인납치는 金正日의 전공과목이 된다.
秘話/李厚洛의 비밀출국
-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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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5-08, 00: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