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油무기화
1973년10월6일 이집트와 시리아의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제4차 중동전쟁은 제1차 오일 쇼크(석유파동)를 격발시켰다. 세계인의 삶에 크나큰 큰 영향을 끼치고 여러 나라의 國運을 바꾼 석유파동은 특히 한국인과 朴정권에 큰 危機를 가져왔다.
석유를 거의 全量 중동에서 수입하고 있었던 한국은 당시 主油從炭(주유종탄) 정책으로 전환하여 에너지 多소비산업인 중화학공업 건설에 매달려 있었고 수출에 목을 매고 있었다. 넉달 만에 네 배로 뛴 석유값 인상으로 치명타를 맞기에 안성마춤인 나라였다.
그러나 朴정권은 놀라운 순발력과 조직력으로써 이 석유위기를 轉禍爲福(전화위복)의 好機로 이용한다. 다른 나라들이 휘청거리고 있을 때 한국만이 중동건설 시장을 개척하면서 고도성장과 수출드라이브 및 중화학 집중투자를 계속한다.
1977년에 가면 중동건설 시장에서 번 돈으로 중동에서 원유를 수입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석유위기는 한국을 비슷한 수준의 나라들로부터 떼어내 한 차원 격상시켰다. 이런 위기극복이 朴대통령의 유신체제가 아니었더라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것이 흥미로운 쟁점이다.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담당 吳源哲 경제2수석 비서관은 업무상 제4차 중동전쟁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집트가 초전에 주도권을 잡고 소련제 미사일과 로켓으로 이스라엘의 공군과 戰車들을 격파해가는 것을 보고 그는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나면 소련제 신무기에 의해 막심한 피해를 보겠구나'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10월10일 '소련이 이집트와 시리아에 대규모 군수물자를 공수하기 시작했다'고 경고하더니 15일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지원을 결정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아랍 6개 산유국 회의는 16일 쿠웨이트에서 긴급회동했다. 이 회의는 원유값을 종전의 배럴당 3.12달러에서 3.65 달러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17일엔 석유수출국기구(OPEC) 대표들이 쿠웨이트에서 회동하여 이스라엘의 아랍점령지 철수를 요구하면서 9월로 소급하여 매월 5%의 원유減産조치를 취하기로 의결했다. 18일엔 아부다비, 이어서 사우디 아라비아가 對美 斷油를 선언했다.
'다녀와!'
11월4일엔 OPEC이 원유생산량의 25%를 감산키로 결정했다. 이들 산유국 대표들은 석유소비국을 우호국과 非우호국으로 분류하고 우호국에 대해서는 9월 수준으로 원유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때 비로소 한국은 非우호국으로 분류되어 석유공급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월 6일 대한석유공사의 운영자이자 원유공급자인 걸프는 11월 이후 원유를 30% 줄여서 공급하겠다고 통보해왔다. 칼텍스는 호남정유에 10% 감량을, 유니온 오일은 경인에너지에 20% 감량 계획을 알려왔다.
11월8일 정부는 에너지 절약 1단계 조치를 발표했다. 난방유류 5% 절감, 걷기운동, 대낮 소등 생활화, 광고 네온사인 규제, 목욕탕 신규허가 억제, 관광 레저 여행 규제 등등의 대책이었다.
이날 金正濂 비서실장이 吳源哲 수석을 불렀다. 아무 설명도 없이 金실장은 吳수석을 데리고 서재의 朴대통령 앞으로 갔다. 金실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각하, 석유 구하러 오원철이를 보내야겠습니다. 정유공장 건설할 때부터 관여하여 석유 3社의 최고위층과 친분이 많습니다'
吳源哲은 엉겁결에 '제가 간들 석유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金실장은 吳수석의 팔을 끌고 대통령 앞으로 나갔다. 朴대통령은 吳수석의 당황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한 마디만 했다.
'다녀와! 내일 떠나도록 해'
'예,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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