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1월14일의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긴급조치의 공포시행에 따르는 대통령 특별담화문'에서 朴대통령은 '우리나라 경제만은 '불황속의 인플레'에 말려들지 말고 이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자'고 했다. 그는 또 '우리가 걸어온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었고 태산준령을 넘고 거센 풍랑을 헤쳐나가듯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면서 세계적인 성장과 발전을 기록해왔다'고 했다. 朴대통령은 직전에 긴급조치 1, 2호로써 反정부 세력을 엄단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같은 국가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 인사와 불순분자들이 反유신적인 활동을 자행하여 국가안보에까지 위협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에 부득이 정부는 이를 먼저 제거하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긴급조치 3호는 저소득층 부담 경감, 영세민 취로 사업확대, 임금체불과 부당해고 엄단, 정부예산 절감, 중소상공업자 지원, 농민보호 대책이 主調(주조)였다. 吳源哲 수석은 이 긴급조치의 효과를 '질서 회복'으로 해석했다.
'석유파동이란 것은 질서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러시아워 때 서로 먼저 가려고 하다가 자동차가 서로 엉켜버린 것과 같은 현상이 경제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교통순경이 등장하여 이 엉킨 차들을 풀어주어야 하는데 대통령 긴급조치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국민들이 대통령 말을 믿고 사재기를 중단하는 등 질서가 회복되니 정부도 물가체계를 재편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1974년 2월1일 정부는 유류값을 평균 82%, 전기값을 30%, 해운요금을 최고 109%, 항공요금을 60% 인상했다. 5일엔 생필품, 건축자재, 신문용지 등의 값을 대폭 인상했다. 정부가 통제하던 물건 및 서비스 요금을 최하 10%, 최고 100% 올린 것은 유사이래 처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시장과 국민들은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매점매석, 사재기, 품귀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吳源哲 수석의 표현을 빌면 '폭풍 후의 고요함과 같았다. 남은 것은 할퀴고 간 상처뿐이었다'.
이때 석유쇼크를 '재앙으로 위장된 행운'으로 만드는 일들이 일어난다. 행운은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것이 朴대통령의 한국에도 적용된다. 中東진출을 위한 탐색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터널을 지나 새로운 무대로 진입하는 것이다.
한눈에 보는
베스트 기사
- 1 北김여정 입에서 '삶은 소대가리' 욕설 안 나와서 '로우 키(low key)'인가
- 2 ‘답변이 제한됩니다’는 하나마나 한 말장난
- 3 비 와서 증거 없어지면 당신들 책임질 겁니까?
- 4 과도한 형벌은 형사체계의 붕괴 초래할 수도
- 5 북한군 두 포로 공개- 왜 잔인하고 무책임?
- 6 '암살자(들)'의 가장 궁금증…유해진 박해일 이민호, 왜 출연했나?
- 7 권양숙이 딸을 위해 건넨 13억 돈상자는 환치기 방식으로 미국으로 송금되었다!
- 8 '부캉이'가 인기더니 결국 신격화?
- 9 우리의 아들인 국군 장병 3명이 다친 사고입니다
- 10 "나 자살하지 않았어. 살해됐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