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중동진출의 始動


不渡 직전의 국가

1973년 한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3억880만 달러였는데 1974년에는 20억 2,270만 달러로 늘었다. 자본거래통계를 보면 1973년엔 2억9000만 달러를 빌리면 됐는데 74년엔 19억9480만 달러를 빌려와야 했다. 경제총사령관인 金正濂 비서실장은 출근하자마자 부도직전으로 몰린 회사 사장처럼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야 했다.
'오늘 결제 준비는 되었나?'
'어제 홍콩에서 돈을 꾸어오겠다는 것은 해결됐어?'
'걸프에게 주는 원유대금은 며칠만 기다리라고 해'
吳源哲 경제2수석비서관의 회고에 따르면 중동 진출과 관련하여 朴대통령에게 최초의 보고를 올린 것은 1974년1월30일이라고 한다. 마침 사우디 아라비아 나제르 기획상이 訪韓하게 되어 있어 중동에 대한 한국 기업의 진출 방향을 구상한 것이었다.
吳수석은 석유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유럽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건설회사 三煥의 직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三煥은 한국 기업체로서는 처음으로 사우디에서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따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삼환 직원은 서울시장이 초청한 제다市長 부부와 동행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도쿄에 가까워지자 제다 시장 부인이 양장으로 갈아 입었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클레오파트라를 연상했다. 吳수석은 귀국 후 삼환 직원을 불러 사우디의 상황을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중동의 나쁜 조건이 우리에겐 유리'

吳수석은 오일달러가 모이는 중동 시장을 겨냥하여 군수품의 판매, 공장건설, 토목, 건축, 기술 인력 수출을 생각했다. 1월30일 오전 吳수석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은 '국내 업자들을 불러다가 설명회를 개최하고 중동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뜻을 전하라'고 했다. 그날 오후 吳수석이 다른 건으로 결재를 받으러 갔더니 朴대통령은 '중동 진출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봐'라고 했다. 吳수석은 군대식으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보고했다.
'각하,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수한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동은 작업환경이 가장 나쁜 곳입니다. 고온이고 사막지대입니다. 오락도 없는 곳입니다. 이렇게 나쁜 조건이야말로 우리나라에게는 극히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수십만명의 제대장병들이 있습니다. 월남에서의 경험도 있습니다. 각하, 에너지 위기는 國難의 일종입니다. 한국 男兒가 국난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어린 여공들이 수출을 해서 우리 경제를 지탱해왔습니다만 이번에는 남자가 나서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둘째, 우리나라 남자 기능공들의 인건비는 선진국보다는 훨씬 싸고 기술수준은 후진국보다 월등합니다. 세번째가 工期단축인데 이 부문은 우리 건설업체가 자신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式으로 돌관작업을 하는 데는 소질이 있습니다'
'吳수석, 소신이 있어 좋구먼'
'각하, 중동에 진출하자면 뒷거래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 방면에도 소질이 있지 않습니까'
朴대통령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金載圭의 손을 들어둔 대통령

朴대통령 시절의 관료들은 일을 발상하여 실천하는 데까지의 시간이 매우 짧았다. 2월13일 나제르 사우디 기획상이 방한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16일에는 한국-사우디 경제협력위원회가 창립되었다. 4월25일엔 張禮準 상공부 장관이 민간기업체장들을 데리고 중동방문 길에 올랐다. 張장관은 나제르 기획상이 마련한 만찬장에서 군에서 차출해간 태권도 유단자 두 사람의 시범을 보여 호평을 받았다. 사우디 왕실의 경호실과 군대에서 태권도 사범들을 초청하게 되었다.
張禮準 장관은, 한국과 사우디 정부는 40억 달러가 들어갈 리야드 도시 건설에 우리 건설업체가 참여하고 고속도로 건설엔 한일개발이 참여키로 하는 등의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맨첨 중동에 진출했던 삼환은 제다市의 美化공사를 수주했다. 삼환은 工期를 단축하기 위해 밤에도 횃불을 피워놓고 작업을 했다. 이곳을 지나던 파이잘 국왕이 놀랐고 한국업체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다고 한다.
1974년 9월 개각 때 朴대통려은 우직한 金載圭를 건설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대통령은 임명장을 주면서 '오일쇼크로 인한 외환위기는 오일쇼크로 부자가 된 중동에서 처방책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金장관은 간부들을 불러놓고 '중동이라는 커다란 시장을 먹기 위해선 우리 업체들의 입이 너무 좁다. 입을 넓히는 작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건설부는 비밀 작업 끝에 중동에 진출하려는 건설회사들을 정부가 책임지고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즉, 해외건설 회사에 대해서는 국내은행이 물적 담보 없이도 신용으로 지급보증을 해주고, 건설수출 소득에 대해서는 법인세를 50% 감면해주며, 25개 업체의 공동출자로 한국해외건설주식회사(KOCC)를 설립키로 했다.
이 안에 대해서 기획원과 재무부는 반대했다. 위험도가 높은 해외건설에 대해 신용으로 지급보증을 해주었다가 사고가 나면 은행도 함께 망한다는 것이었다.
金正濂 비서실장의 증언에 따르면 1975년 하반기 어느 날 수출진흥확대회의가 끝난 뒤 중앙청 국무위원 식당에서 朴대통령, 국무총리, 관계장관, 경제4단체장이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金載圭 장관이 이 문제를 제기했다. 즉, 건설부 장관이 허가한 해외건설업체에 대해서는 은행이 무조건 지불보증을 해주어야 한다고 했고, 金龍煥 재무부 장관은 최대한 협조하겠지만 지불보증은 선별적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다. 南悳祐 기획원장관 겸 부총리는 재무부 편을 들고 경제단체장들은 건설부편이었다. 여기서 朴대통령은 건설부와 기업편을 들어주었다.
朴대통령은 이렇게 정리했다.
<재무부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선별적 지불보증은 은행의 보수성에 비추어 업체의 중동진출에 지장을 줄 것이다. 은행은 무조건 지불보증을 하되 건설부장관은 업자를 엄선해서 허가하라>
金正濂 실장은 청와대로 돌아오자 金載圭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金장관, 우리 업자들끼리의 과당경쟁과 부실공사를 막아야 합니다. 그래야 은행의 지불보증에 따른 사고를 막을 수 있습니다. 해외진출 허가는 엄선에 엄선을 기해야 합니다'
'알았습니다. 동감합니다. 업계에서 아무리 아우성을 치더라도 20개 이내로 진출업체를 제한하겠습니다.'
그 뒤 1년간 더 재직한 金載圭 장관은 약속을 지켰다. 1978년 총선을 앞두고 지방건설업자들이 공화당을 통해서 중동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金실장은 반대했으나 건설부는 기회의 균등을 내세워 58개 회사에 허가를 내주었다. 중동건설시장은 한국업체들끼리의 과잉출혈경쟁, 기술인력 빼내기 싸움터로 변했고 결국 1980년으로 넘어가면 해외건설 부실사태를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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