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대한민국의 80代를 ‘위대한 세대’라고 부른다.
이들은 전쟁을 세 번(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 월남전)이나 겪은 세대이다. 80代 중엔 세 전쟁에 모두 참전한 百戰老將(백전노장)이 있는가 하면, 6·25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한 사람도 있다. 그런 고통을 딛고, 대한민국을 建國하고 발전시킨 주역이 바로 80代이다.
여기 6·25전쟁 당시 가족이 좌우익으로 나뉜 채 총부리를 겨누고, 그 과정에서 친형이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다. 바로 金亨佐(김형좌) 목사(83세·現 국민통합운동본부 본부장)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5월30일, 金 목사를 인터뷰 하기 위해 그가 거주하는 서울 송파구 방이동 빌라를 찾았다. 오래된 빌라 지하에 그의 집이 있었다. 金 목사는 “이 곳이 국민통합운동본부 사무실”이라고 자신있게 소개했다. 그가 서재로 쓰는 조그마한 방 한 켠엔 온갖 서적들과 자료들로 빼곡했다.
| 밑줄치고, 메모하며 독서하는 金 목사 |
이 책들에 대해 묻자 金 목사는, “<조갑제닷컴>에 실린 자료들하고 내가 평생 모은 책이다. 좌익과 싸울 땐 이론적으로 많이 아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중요한 부분엔 밑줄을 치고 메모까지 했다. 文武(문무)를 겸비한 애국운동가란 느낌을 받았다.
‘너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중 어느 편이냐’
金 목사는 4남2녀의 3남으로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母胎(모태)신앙이었던 그는, 미국 선교사로부터 유아세례를 받고, 주일학교를 통해 정통 보수신앙 교육을 받았다. 金 목사 가족은 김제 ‘대송리 교회(現 김제 대송교회)’에 출석했는데, 그의 親兄(친형) 김형배는 이 교회 집사로 일했고, 金 목사도 형과 함께 교회일을 돌보았다고 한다. 해방 후, 그 당시 政局(정국)처럼 김제에서도 左右 대립이 극심해졌다고 한다. 金 목사의 이야기다.
<학교에 가면 거의 모든 선생들이 좌익이었다. ‘민중의 旗(기) 붉은旗는 천사의 시체와 싸운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이란 혁명가를 부르는가 하면, 학생들에게 ‘너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중 어느 편이냐’고 물어보는 선생도 있었다.>
金 목사는, 형배 씨가 우익 성향의 대동청년단 소속이었고, 자신 역시 보수적 신앙교육을 받았던 터라 유년 시절부터 反共(반공)사상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주민들은 달랐다. 이념이 서로 다른 주민들, 특히 교인들끼리도 反目(반목)하고 不和(불화)가 심해졌다고 金 목사는 말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50년 8월 경, 인민군이 김제에까지 쳐들어왔다. 마을의 좌익 성향 주민들은, 인민군과 합세해 평소 감정이 있던 우익 성향 주민들을 죽이려고 했다. 형(김형배 집사)이 평소 우익단체인 대동청년단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로, 우리 가족도 좌익들의 타도 대상이 되었다.>
| 그의 서재 겸 방엔 각종 자료와 서적들로 가득했다. |
형이 도망쳤으니 형좌라도 죽어야…
金 목사의 증언이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6·25전쟁 직후 김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다룬 기록을 살펴보았다. 국무총리 산하 진실화해위원회(이하 위원회)는 2008년 11월, ‘김제 지역 일대에서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우익인사를 비롯해 地主(지주)와 그 가족들이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밝혔다. 위원회가 밝힌 ‘김제 민간인 희생 사건’篇(편)의 관련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김제 지역에서는 1947년 말부터 대동청년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조선민족청년단이 구성되어 기독교를 중심으로 우익활동을 전개하였다. 반면 좌익들은 조선청년동맹, 민애당, 남노당 등 지하조직을 통하여 美군정 및 우익과 대립하였다… 6·25전쟁 발발 후 군산·임피를 점령한 인민군 6보병사단과 이리를 점령한 4보병사단이 1950년 7월19일 오후에 만경강에 진주하였다. 전라북도 경찰대와 김제 경찰 병력은 변변한 交戰(교전)도 없이 후퇴하였고, 김제 지역은 이튿 날 북한군 15보병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위원회’는 ‘정치보위부 산하의 치안 조직과 面里(면리) 단위 인민위원회가 지방 좌익들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인과 우익단체 소속 인사들 약 200여 명을 학살했다’고 했다. 김제군에 ▲가족관계등록부 등 관련 기록 訂正(정정) ▲6·25전쟁 당시의 地域史(지역사)를 바르게 記述(기술)·교육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다시 金 목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그때 형은 인민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결국 내가 형 대신 인민재판소에 끌려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인민재판소로 데려간 사람이 큰아버지였다고 한다. 큰아버지도 좌익 편에 섰던 것이다.
<큰아버지는 아버지께, ‘형배가 도망쳤으니, 집안을 살릴려면 형좌라도 내놓아야 한다’고 하더라. 그러자 아버지는 ‘어떻게 조카를 공산군에 팔아넘길 수 있냐’고 한탄했다.>
두 눈 꼬챙이로 빼고, 개처럼 끌고 와
인민재판소에 끌려간 金 목사는, 인민재판관으로 있던 친구(유영소) 부친 덕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재판정에서 ‘형이 도망갔다고 다른 사람이 대신 죽는 게 어디 있느냐’고 항변했다. 이후 “친구 부친이 내게 ‘열흘 안에 형이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해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고 한다.
며칠 뒤, 金 목사는 도망쳤던 형배 씨가 김제로 끌려왔단 소식을 들었다. 부산으로 가는 도중에 차가 고장이 나 전주 고모댁에 숨었는데, 좌익 성향의 대송교회 교인 중 한 명이 이 사실을 알고 형을 인민군에 密告(밀고)한 것이다.
金 목사는 “좌익들은 형의 두 눈을 꼬챙이로 뺀 뒤 개처럼 끌고 왔다. 걷어차였는지 낭심도 망가져 있었다”고 했다. 이들은 형배 씨를 생매장 시켰다고 한다. 金 목사는 또 다른 학살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대송리 교회 정기봉 장로는 인민군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아 죽었고, 김성두(대송리 교회 담임목사 子)와 하치호(교인)란 사람은 형과 마찬가지로 생매장 되었다고 한다.
권태술이란 사람은, 당시 형이 현역 중령이었는데, 좌익 편에 선 주민들이 그에게 ‘실탄을 내놓으라’며 마구 구타했다고 한다. 金 목사는 “그가 구타를 못 견뎌 자살하려고 하자, 주민들은 그를 밧줄로 끌어내 개처럼 끌고 갔다”고 말했다. 학살당한 사람 중엔 김일천이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金 목사는 그가 학살당하는 건 직접 보지 못했지만, 권태술 씨 옆에 매장되어 있던 그의 끔찍한 시신은 또렷이 기억한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 얘기로는, 김일천 씨가 빨갱이들을 아주 미워했다고 한다. 6·25가 나기 전 빨갱이들을 잡아다 고문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중에 권태술 씨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래사장을 파 봤더니, 그 사람 시신이 나오는 걸 보았다. 전깃줄 비슷한 걸로 사람을 둥글게 묶어 파 묻었더라. 다른 시신은 다 썩어 있었는데, 김일천 씨 시신은 살이 벌겋게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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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朝鮮(월간조선)이 2003년 6월 펴낸《6·25피살자 59994명》이란 책(左)이 있다. 총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1952년 공보처 통계국이 발간한 《6·25事變 被殺者 名簿》를 재편집한 것이다. 각 지역별로 희생된 6·25전쟁 희생자들의 통계를, 가장 정확하게 담고 있는 자료 중 하나다. 이 책 1권에 이들 다섯 명의 이름이 실려 있어, 金 목사의 증언이 사실일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
|
姓名 |
性別 |
年齡 |
職業 |
被殺年月日 |
被殺場所 |
本籍 |
住所 |
|
金成斗 |
男 |
24 |
軍人 |
1950.9.27 |
봉남면 |
김제시 봉남면 대송리 |
左同 |
|
鄭基奉 |
男 |
36 |
敎師 |
1950.9.27 |
김제시 ■■면 |
김제시 봉남면 대송리 |
左同 |
|
權泰述 |
男 |
28 |
農業 |
1950.9.28 |
봉남면 |
김제시 봉남면 대송리 |
左同 |
|
河致鎬 |
男 |
29 |
農業 |
1950.9.29 |
봉남면 |
김제시 봉남면 대송리 |
左同 |
|
金日天 |
남 |
28 |
農業 |
1950.9.26 |
봉남면 |
김제시 봉남면 종덕리 |
左同 |
이종사촌 윤○○의 생애
金 목사는 “큰아버지뿐 아니라, 내 이종사촌들도 좌익이었다”고 증언했다. 그의 이종사촌 중 윤○○은, 金 목사보다 한 살 위였는데 인민군에 가담, 빨치산 활동까지 했다고 한다.
<○○이형은 6·25전쟁 전부터 이미 좌익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인민군과 함께 김제군 內 官署(관서)를 습격하는 등 빨치산 게릴라戰을 한 적이 있다. 나도 대항군으로 交戰(교전)에 참여했다. 사촌형과 사촌동생이 서로 총부리를 겨눈 것이다. 멀찌감치 총을 들고 있는 ○○이형한테 ‘형님, 그만 자수하시오’라고 소리쳤지만, ‘형좌야, 우리한테 넘어와라. 큰 대우를 해줄게’라고 회유했던 기억이 난다.>
金 목사에 따르면, 윤○○의 3형제는 모두 좌익 성향이었다고 한다. 윤○○ 위의 두 형은 죽고 윤○○만 살았다고 한다. 6·25전쟁 때 이념적으로 갈려 서로 연락조차 안한 이들은 그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金 목사는 “나중에 인터넷에서 ○○이형이 빨치산 추모제에서 환영사를 낭독했다는 기사를 보았다”며 “그걸 본 몇 년 뒤, 결혼식 참석 차 전주에 갔는데 그때 ○○이형과 마주쳤다”고 말했다.
<내가 ‘형님, 아직도 그러고(좌익활동을 하고 있냐-편집자 注) 있소?’라고 따지듯이 물었다. ‘정말 징글징글하지 않냐’, ‘우리 가족을 이렇게 만든 게 다 누구 때문인데’라는 식으로 마구 화를 냈지만, 그(윤○○)는 별 반응이 없었다.>
記者는 金 목사가 이야기했던 尹 씨의 빨치산 추모제 참석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윤○○ 씨는 2005년 5월28일 전북 순창군 회문산 청소년수련원에서 열린 ‘남녘 통일애국열사 추모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환영사를 낭독했다(출처: 인터넷 <통일뉴스> 2005년 5월28일字)
<…회문산 남부지도부가 있던 이곳은 분단세력과 통일세력, 외세와 민족자주의 싸움의 현장에서 쓰러져간 동지들의 영령들과 함께 당시 구호를 피끓는 심장으로 소개해 드리며 마치겠습니다.
“사령부를 목숨으로 끝까지 사수하자!”
“제국주의 양키군대를 한놈도 남김없이 섬멸하자!”
“미국과 이승만 괴뢰 정부를 타도하자!”
“억압과 고통에서 신음하는 인민들을 해방하자!”
이런 구호를 들고 덤벼드는 적들을 불타는 적개심으로 수류탄을 안고 맨몸으로 돌진한 전사들! 몰려오는 적들의 길목에서 매복했다가 主力부대를 박살낸 용사들! 우리 부모형제들의 생명과 재산 고통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국 집단 소굴인 경찰서와 지서를 기습하여 인민들의 원한의 복수투쟁! 등 헤아릴 수 없는 대규모 전투와 소규모 전투들을 전개하였습니다.…>
尹은 2010년 12월30일, 담낭암으로 사망했다. 윤○○의 訃告(부고)를 전한 <통일뉴스>(2010년 12월30일字)는 그가, ▲해방 이후 김제군 민주애국청년동맹에 가입하고 ▲김제 기호부대에 편입돼 빨치산 활동을 했다고 전했다. 이어 “고인은 1953년 3월에 체포돼 광주 포로수용소에 수감됐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短期(단기) 3년, 長期(장기) 4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다 58년 전향서를 쓰지 않고 출소했다”고도 했다.
“순교할 각오로 좌익과 싸울 것”
| 金 목사가 출력해 배포하는 <조갑제닷컴> 자료들 |
그는 “어렸을 때부터 좌익의 실체를 보아왔고, 또 싸워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순교할 각오로 (좌익과) 싸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애국우파 진영에 당부의 말을 남겼다.
<내년 선거를 앞두고, 우파세력도 분열하고 있는 것 같은 데 그러면 안돼. 지금은 힘을 모아야 할 때 아니야? 자꾸 ‘너는 어떻고, 쟤는 어떻고’하면 쓰나? 상대가 조금 부족한 게 있더라도 감싸주고 포용해야지. 나는 그렇게만 되면 더 바랄 게 없어. 자리 욕심? 이 나이에 무슨…>
그 역시 ‘위대한 80代’ 중 한 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