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33년 1월22일 오전 독일 베를린.
무장한 경찰관들이 베를린 시내 노동자 거주구역에 있는 공산당 본부 리프크네히트 하우스를 급습했다. 이들은 공산당 본부를 수색하고, 근무 중이던 공산당원들을 건물 밖으로 내몰았다.
이어 경찰은 인근 지역을 완전히 봉쇄했다. 행인과 차량의 통행은 차단되고, 무장경찰 병력을 태운 트럭들이 곳곳에 배치됐다. 건물 옥상에도 무장경찰이 배치되어 거리를 감시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던 시민들은 경찰의 위협에 황급히 창문을 닫아야 했다.
그날 오후 1만5000명의 나치 돌격대원들이 '우리는 자유를 경멸한다'는 구호를 소리 높이 외치며, 공산당사 앞으로 행군해 왔다. 이들은 공산당사 앞에서 3년 전 街鬪 도중 공산당원의 총에 죽은 나치 돌격대원 호르스트 베셀의 추모집회를 열었다 (호르스트 베셀이 죽었을 때, 나치당 베를린 지부당이던 괴벨스는 그를 추모하는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지었다. 이 노래는 나치 제3제국 시절 準국가로 널리 불리워졌다).
말이 추모집회지, 이것은 공산당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었다.
나치 돌격대가 거리에서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과 박터지게 싸우는 것은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1만5000명이나 되는 대부대가, 공산당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거주구역의 공산당사 앞에서 그렇게 도발적인 집회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공산당은 반발했다. 공산당은 나치의 집회에 상응하는 집회를 열겠다고 경찰에 요청했지만, 간단하게 묵살당했다. 이에 분개한 공산당원들이 거리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질서유지'를 위해 발포까지 해 가면서 시위를 진압했다. 두 명이 부상당하고 약 70명이 체포됐다.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기 8일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은 당시 독일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이었던 것은 '공권력'이 우익정치깡패집단인 나치 돌격대의 집회를 노골적으로 보호했다는 사실이었다. 단순히 '보호'만 한 것이 아니라, 집회 시작 전에 공산당사를 수색하고, 거리를 봉쇄하는 등 나치에게 '멍석'까지 깔아 준 것이다.
당연히 나치는 기가 펄펄 살았고, 좌익들은 움추러들었다.
1932년 7월을 정점으로 국민들의 지지가 떨어지고, 집권가능성이 멀어지면서 사기가 떨어져 가던 나치 당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사기를 회복했다. 괴벨스는 '환상적인 일'이라며 열광했다.
반면에 좌익 세력들은 '공권력'이 노골적으로 나치를 편들었다는 사실 앞에서 놀라고, 위축됐다. 8일 뒤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었을 때,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 지도부가 자신들의 행동대에 '자제'를 촉구했던 것도 이 날 받은 충격의 후유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뇌리 속에는' 나치가 집권하기도 전에 '공권력'이 공공연히 나치를 편들었는데,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된 마당에 자신들의 행동대가 '경거망동'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훗날 한 나치 돌격대원은 이 날의 사건을 '나치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라고까지 평했다.
2.
15일 광주에서는 좌익 학생-시민단체 회원 수천명이 패트리엇 미사일과 미군기지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공군 제1전투비행단(광주공항) 철조망을 뜯어내는고 부대 진입을 시도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지만, 경찰은 단 한 명도 연행하지 않았다.
경찰은 “시위 상황이 격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5·18 추모 분위기를 저해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연행을 자제했다”고 변명했다.
한 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좌익들의 反軍-反美 시위가 5-18 추모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좌익들의 反軍-反美 시위가 소위 5-18정신의 계승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1980년 광주사태는 정말 오늘날 우리가 기려야 할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화 운동'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전남경찰청은 16일 '시위 현장에서 촬영한 채증사진 등을 중심으로 적극 가담자를 가려 형사처벌 여부를 검토키로 했다'고 했다지만, 정말 그런 의지가 있다면 시위 당일 현장에서는 왜 한 명도 연행하지 않았단 말인지....
무엇보다도 경찰의 조치는 형평성을 현저히 상실한 것이다.
경찰은 작년 10월4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국가보안법폐지 국민대회 때에는 60대 이상 노인들이 대부분인 시위대를 향해 무자비하게 물대포를 쏘았다. 시위대에 앞장을 섰던 신혜식 독립신문 대표는 전경버스를 향해 대나무 장대를 휘둘렀다는 이유로 구속됐었다.
작년 10월 보훈단체 회원들이 여의도에서 보안법 폐지반대 집회를 가진 후 시위를 하려 했을 때에도 경찰은 상이군인들과 전몰장병유가족들을 향해 연막탄을 쏘고, 휠체어에 탄 상이군경들을 방패로 내리찍었었다.
그런데 군부대 철조망을 허물고 부대진입을 시도한 좌익 시위대는 단 한 명도 연행을 안 했다?
도대체 경찰은 대한민국 경찰인가, 아니면 북한의 인민보안원인가?
하기야 이런 일이 어디 한 두번이었나?
효순이-미선이 촛불집회나 노무현 탄핵반대 촛불집회는 수만 군중들이 광화문 네 거리를 불법적으로 점거해도 팔짱만 끼고 있다가, 교보빌딩(중국대사관 영사부가 입주해 있음) 앞에서 在中 탈북자 문제로 북한인권단체들이 10여명 모여 기자회견이라도 하려 하면 전경들과 정보과 형사들이 몰려와 '불법집회'라며 부지런히 진압한다.
'공권력'의 편파적 운영을 통해 노무현 정권이 노리는 바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제는 자신들의 세상임을 애국세력들에게 과시함으로써 애국세력을 위축시키고, 좌익들의 기를 돋구자는 것일 것이다.
3.
유감스럽게도 이런 상황에서 애국세력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공권력이 편파적으로 행사됐을 때, 글로, 말로, 행동으로 규탄하는 것, 공권력의 편파적 행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보이는 것 정도다.
다만 경찰에게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라는 충고는 해 주고 싶다.
1933년 1월22일의 나치 돌격대 집회를 허가하고 보호해 준 것은 당시 독일 총리이자, 프로이센 치안 총책이던 슐라이허 장군이었다. 정치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던 그는 나치 돌격대 집회를 허가,보호함으로써 나치의 환심을 사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전에 히틀러와 대립했던 전과(?)가 있었다. 다음해 6월 히틀러가 정적들을 대량 학살했을 때, 슐라이허는 부인과 함께 살해됐다.
나치를 편들었던 독일경찰은 나치 집권 후, 주요 기능을 나치당의 사병조직인 친위대에게 빼앗기고, 친위대의 허드렛일이나 거들다가, 히틀러와 함께 멸망했다.
하기야 멀리 독일까지 갈 필요도 없겠다. 자유당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학생시위대에게 발포했던 경찰관들, 그리고 그 책임자들이 훗날 어떻게 되었는지를 상기해 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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