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鍾奭 파일 내용

*아래 글은 2003년6월호 월간조선에 실렸던 禹鍾昌 기자의 기사중 일부를 뽑은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다 대학원 진학한 李鍾奭

李鍾奭(45) NSC 사무차장은 1958년생으로 성균관大 행정학과 78학번이다. 출생지는 경기도 남양주. 이 지역에서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낸 李聖浩(이성호)씨가 그의 삼촌이다.

그가 대학을 다녔던 1978년은 朴正熙 대통령의 維新 말기였고, 이어지는 1980년의 光州사태로 대학가는 反정부 데모로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李鍾奭 학생은 데모와는 거리가 먼, 考試 준비생이었다. 集示法(집회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처벌받은 전력이 없다.

재학 중 考試를 통과못한 그는 1984년 대학 졸업과 함께 직장에 취직, 평범한 직장인의 길을 걷다가 스물아홉의 나이에 성균관大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행정학에서 정치외교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석사 2년차이던 1988년 「한국정치연구회」에 가입하면서 李鍾奭은 진로를 바꾸게 된다.

「한국정치연구회」는 李壽仁(이수인ㆍ사망ㆍ前 영남大 교수, 평민당 국회의원), 崔章集(최장집ㆍ고려大 정치외교학과 교수), 孫浩哲(손호철ㆍ서강大 정치외교학과 교수), 孫鶴圭(손학규ㆍ前 서강大 정치외교학과 교수, 現 경기도 지사)씨 등 소위 진보 성향의 교수들이 보수 성향의 「한국정치학회」에 대항해서 1987년에 만들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서구의 정치이론을 답습하는 기존의 연구 방식에서 탈피해 우리의 시각에서 우리의 문제를 연구하겠다는 의도에서 「한국정치연구회」가 태동했다. 한국정치연구회는 ▲국제정치 ▲한국정치사 ▲정치사상 ▲정치이론 ▲북한정치 연구 등 5개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앞에서 언급한 李鍾奭씨 등 젊은 대학원생들이 북한정치 연구팀 멤버였다. 이들은 한국정치연구회와는 별도로 독립문에 사무실을 얻어 북한 原典 공부를 시작했다.


「독립문 연구회」 탈퇴자 증언

기자는 「독립문 연구회」 멤버로 참여했다가 북한 原典을 통해 북한을 공부하면서 북한체제의 잔혹한 실상을 확인한 후 연구회를 탈퇴한 복수의 교수들을 만났다. 이들은 익명을 전제로 인터뷰에 응했다.

―한국정치연구회는 어떤 단체였습니까.

『우리 사회에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한 것이 1987년입니다. 全斗煥 대통령의 내각제 개헌에 반대하는 국민의 저항이 1987년 6ㆍ10 사태로 분출되었고 6ㆍ29 선언과 함께 우리 사회는 거대한 변화에 돌입합니다. 이러한 사회 변화 속에서 일부 소장파 학자들은 좀더 조직화해서 보수에 대항하는 힘을 기르며 사회 변화에 일정 부분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들은 민주화 바람에 편승해 좌파 성향을 노골적으로 표방하기 시작합니다. 한국정치연구회를 주도한 교수들은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에 가까운 시각을 가졌습니다. 극좌도 있고, 좌파적 성향의 자유주의자도 있었습니다. 한국정치연구회에 가입한 대학원생들은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계급론, 자본론,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집중 공부했습니다』

―「독립문 연구회」는 어떤 성격의 단체였습니까.

『1988년, 1989년 무렵의 대학가 話頭(화두)는 북한 바로 알기였습니다. 이 운동에 편승해 한국정치연구회 소속 대학원생 중 일부가 북한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독립문 부근에 사무실을 얻었습니다. 공안당국에서 말하는 「독립문 연구회」가 이 사무실입니다. 회원은 10명 남짓인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丁海龜, 鄭大和, 李鍾奭씨 등입니다. 북한 原典을 공부하고 통일문제 전문가라는 金南植씨를 초빙해 세미나도 가졌습니다』

丁海龜(49)씨는 연세大 행정학과 75학번이다. 대학 졸업 후 고려大 대학원으로 적을 옮겨 崔章集 교수 지도 아래 석ㆍ박사를 마쳤다. 「남북한 분단 정권 수립 과정 연구」란 제목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 학위 논문은 大邱 10ㆍ1 폭동을 주제로 썼다.

丁海龜씨가 쓴 논문은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등장과 한국전쟁」, 「美 軍政과 좌파의 노동운동」, 「美 군정기 인민정권 수립 운동」, 「분단과 이승만」 등 주로 해방 정국에 관련된 것이었다.

성공회 대학 사회과학부 조교수로 있는 丁海龜씨는 盧武鉉 정부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정치개혁연구실 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鄭大和(47)씨는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상지大 교양학부 교수다. 국정홍보처에서 운영하는 K-TV에서 정치ㆍ사회문제 사회자로 활동 중이며 韓總聯 합법화를 주장하는 사람이다.

金南植(79)씨는 日帝시대 조선공산주의 운동을 하고, 광복 후 南勞黨(남로당)에 가입했던 사람이다. 越北 경력도 있다.


李鍾奭과 宋斗律 관계

―金南植씨는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독립문연구회에서 토론회에 초청한 북한 전문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전향한 사람인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대학가와 재야 세력이 親北으로 쏠리던 1980년대 후반 親北 단체의 행사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가치 중립적이란 입장을 취한다고 하면서 북한 옹호 발언을 많이 했습니다. 독립문 연구회에 나와서도, 예컨대 북한에서 발생한 反종파 사건에 대해 물으면 우리들의 구미에 맞게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李鍾奭 NSC 사무차장은 어떤 성향의 사람입니까.

『삼촌이 여당 국회의원이고, 본인은 대학 시절 운동권이 아닙니다. 親北 좌파적 시각을 가질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나이 어린 후배들과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면서 인생관이 달라졌다고 봅니다. 경쟁에서 처지지 않고 후배들보다 앞서 가려고 하다 보니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에서 자기 것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가 대학원에 들어왔을 무렵,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북한學을 자기 것으로 特化(특화)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1988년 무렵 독일 훔볼트 대학 前 교수 宋斗律(송두율)씨의 「內在的(내재적) 접근론」이 국내 학계에 소개되었습니다. 「북한의 사회주의를 북한의 입장에서 보고 북한을 비판하기 전에 실체를 인정하자」는 것이 內在的 접근론입니다. 宋斗律은 「소련과 중국」이란 책 서문에 「사회주의 체제를 공부하기 위한 방법으로 먼저 이들의 체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비판은 그 다음」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해하고 나서 비판하자는 논리는 말로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이해를 하고 나면 비판이 어려워지는 게 현실입니다.

이 내재적 접근론을 북한학 연구에 깊이 활용한 사람이 李鍾奭입니다. 그는 영민했습니다. 북쪽으로 치우쳤을 경우, 한국 사회에서 발을 붙이기가 힘드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좌우를 균형 있게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宋斗律의 內在的 접근론을 차용하면서도 비판이란 단어를 집어 넣어 「內在的 비판적 접근론」이란 자기 나름의 분석 틀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조선노동당의 지도 사상과 구조 변화에 관한 연구) 앞 부분에 연구방법론이 나오는데 「內在的 비판적 접근」을 취했다고 밝혀 놓았습니다』

李鍾奭씨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內在的 비판적 접근론」을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내재적 비판적 접근 방법이란 연구 대상이 되는 사회나 집단의 내재적 작동 논리(이념)를 이해하고 그것의 현실정합성과 이론ㆍ실천적 특질과 한계를 규명해 내려는 접근 관점을 말한다(중략). 그러나 북한 연구에서 이 접근 방법이 강조되는 이유는 지금까지 많은 북한 연구가 북한의 내재적인 논리가 완전히 무시된 맹목적인 전체주의적 접근이나 표피적인 선정주의적 접근에 의해서 오염되어 왔기 때문이다. 본래 내재적 비판적 접근 방법은 독일의 루츠, 바이메, 宋斗律 등에 의해서 연구에 적용되고 국내에는 宋斗律 교수를 통해서 처음 소개된 내재적 접근법에 필자가 그 뜻을 보다 분명히 하고자 「비판적」이란 말을 덧붙인 것이다>


「宋斗律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李鍾奭씨의 북한학 연구에 있어서 방법론의 틀을 제공한 宋斗律씨는 「김철수란 假名을 가진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다(月刊朝鮮 1998년 8월호 참조). 이 사실은 망명한 前 북한 노동당 비서 黃長燁(황장엽)씨의 저서 「북한의 진실과 허위」란 책을 통해 공개되었다. 「김철수」란 이름은 1994년 金日成 장례식 때 장례위원 서열 23위로 발표되었다. 이때 「김철수」는 다른 장례위원들과 달리 직책이 생략되었다.

독일에 거주 중인 宋斗律씨는 金日成 장례식 때 북한 「장의위원회」 초청을 받아 장례식에 참석했었고, 金正日도 만났다. 이러한 사실은 宋斗律씨가 시사 주간지 「한겨레 21」(1994년 8월1일자)에 기고한 「김주석이 떠난 북한 방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宋斗律씨가 「김철수」란 주장은 宋斗律씨가 黃長燁 비서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國情院이 재판부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더욱 굳어졌다. 국정원도 독자적인 정보수집을 통해서 宋斗律씨와 김철수가 동일 인물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宋斗律씨의 內在的 접근론은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와 더불어 사회주의 이론이 위기에 몰리고 있던 시점에 발표돼, 국내 좌파 지식인들에게 국면 전환의 논리로 지원되었다.

李鍾奭 NSC 사무차장이 관계했던 「독립문 연구회」는 1989년부터 시작한 북한 연구 결과를 한 권의 책에 담았다. 「북한정치론」이란 이 책은 1990년 3월5일 백산서당에서 출간했다. 주체사상, 혁명 이론, 抗日 무장투쟁, 한국전쟁, 조선노동당의 구조와 발전 등 16장 4부로 이뤄진 이 책의 서문은 당시 한국정치연구회 회장인 李壽仁 교수가 썼다.

이 책의 성격에 대해 「책머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책은 한국정치연구회에서 북한 정치를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시각에서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기획한 정치학 강좌 시리즈의 네 번째 공동 저작집이다. 이 책은 한국의 진보적 사회과학도들에 의해 처음으로 수행된 북한 정치 및 사회에 대한 전면적이고 포괄적인 공동 연구라는 점에서, 그리고 반공적이고 反북한적인 시각이 아니라 통일에 대한 전망과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북한에 대한 규명과 비판적 이해의 시각에 의해 연구된 결과라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독립문 연구회」를 탈퇴한 복수의 교수들은 『북한정치론은 집필자 이름이 빠진 채 한국정치연구회 이름으로 출간되었지만 金日成의 항일 무장투쟁사와 한국전쟁 등은 李鍾奭씨가 집핍했다』고 말했다.

이 책에 언급된 한국전쟁 부분을 요약, 발췌하면 이렇게 되어 있다. 참고 문헌은 「조선전사」, 「조선통사」, 「조선노동당 략사」, 「조선노동당 력사 교재」 등 거의가 북한 原典이다.

<어떠한 전쟁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서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은 수단을 달리한 정치의 연속으로 각 전쟁 주체들의 계급적 성격 및 전쟁 수행 의도가 그 전쟁의 본질과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쟁 이전 38선 부근에서 「작은 전쟁」이 행해지고 있었던 한반도에서, 6월25일 전면전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점은 무엇이었는가, 즉 北侵인가 南侵인가의 문제는 한국전쟁을 살펴보는 데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전쟁을 수행하는 전쟁 주체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전쟁에 임했는가 하는 것이다>

金日成의 抗日 무장투쟁 부분을 요약 발췌하면 이렇다.

<金日成은 朝中(조중ㆍ조선과 중국) 국경지역이며 조선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東滿(동만) 일대를 배경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공산주의자들 중에서는 최고 지도자였다. 더욱이 그가 항일 연군 제1로군 6사 사장 시절 조국광복회 조직을 주관하면서 치른 보천보 전투 등 수차례에 걸친 국내 進攻 전투는 국내 조선인들 사이에 그의 이름을 신비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오늘날 많은 金日成 비판가들이 그의 명망성을 부정하고 있으나 몇 가지 자료들은 金日成이 국내외적으로 큰 성과를 올리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중 국내 민중들에게 알려진 그의 명망성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은 1943년 「남조선의 소학교 6년생과 중학교 2년생을 모아 놓고 현재 일본에서(조선인 포함) 누가 제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설문을 무기명으로 조사해 보았다는 한 일본인의 진술을 들 수 있다. 그의 설문 조사 결과 놀랍게도 학생들 중 67%가 김일성을 써냈다고 한다>


주체사상을 실패로 단정

李鍾奭 NSC 사무차장의 석사학위 논문은 「북한 지도집단의 抗日 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연구」이다.

북한정치를 연구한 한 교수는 『보천보 전투를 비롯한 金日成의 抗日 빨치산 운동은 북한의 일방적 주장일 뿐 학계에서도 검증되지 않은 분야다. 李鍾奭씨는 북한의 자료를 제대로 검증 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기관에서 작성한 「李鍾奭 개인파일」은 이 논문에 대해 「金日成 항일 투쟁을 미화 찬양했다」고 평가했다.

「독립문 연구회」의 한 멤버는 『석사학위를 끝내고 박사과정에 들어간 1990년 초반에 李鍾奭씨가 대학 學報나 校誌 등에 기고한 북한 관련 글은 매우 親北的 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1993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에서 李鍾奭씨는 기존의 태도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박사학위 논문의 「결론-평가와 전망」에서 그는 주체사상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주체사상은 유일 지도체계에 복무하면서 보편적 사상 이론으로 무모한 도약을 시도함으로써 굴절되었다. 특히 주체사상은 이 사상의 사회 역사원리가 金日成의 유일지도를 합리화시켜 주기 위해 목적론적으로 혁명적 수령관과 결합하면서 결정적으로 왜곡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원래 「인민 대중의 자주성 실현」의 사상으로 제시되었던 주체사상이 혁명적 수령관의 영향을 받아 「수령의 지도를 혁명과 건설을 성공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담보」로 주장함으로써 스스로가 역사발전의 주체로 천명한 「인민 대중」을 역사의 피동체로 전락시킬 논리적 모순을 내재적으로 담지하게 되었다(중략)

따라서 현재 상태에서 수령, 즉 정권의 붕괴는 국가의 붕괴이자 전체사회의 와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金正日 체제의 붕괴는 곧 전체사회의 붕괴로 직결되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북한사회의 존립과 발전을 전제로 한 유일지도 체계의 해체는 역설적이지만 이 체계를 자신의 권력기초로 삼고 있는 金正日이 스스로 이 체계의 해체에 나서는 길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길은 위험하고 가능성도 불투명한 길이다. 그러나 북한 사회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현재 이 밖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李鍾奭 파일」에 기록된 활동

李鍾奭씨는 2년 만에 석사를, 4년 만에 박사를 끝냈다. 석사 학위 취득 후 경희大, 부산大, 서강大, 성균관 大에서 시간강사로 전전하던 그는 1994년 9월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 되었다. 연구위원이 되는 과정에서 당시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었던 林東源 前 國情院長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 정부 기관에서 작성한 「李鍾奭 파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94년 9월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임용된 후에는 兩非論을 동원, 한겨레신문 등을 통해 정부 對北 정책 비판, 북한 對南 정책 비호, 국가보안법 철폐 요구 등 활동을 지속하면서 연구소의 대외적 공신력을 이용, 북한 학계 권위자로 행동하면서 1995년, 1997년 2회에 걸쳐 北京 「남북학술회의」에 참가하고 방송 출연 등 활동 반경을 확대해 왔음>

이 파일에는 李鍾奭씨가 1988년 이후 대학 學報 등에 기고한 50여 건의 글과 강연회 발언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의 거주 이전ㆍ여행 자유 제한은 사회주의 특성과 남북 군사 대치하에서 택한 방어적 조치이다(1990년 2월호 사상문화운동).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은 反北 이데올로기를 타파하고 자주적인 통일운동을 촉진시키는 범국민운동이다(1990년 역사비평 가을호).

▲통일의 제1요건은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는 자주성 확립과 평등의 존중이다. 駐韓 미군이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변명이다(1990년 3월 성균관大 學報).

▲문민정부는 反共, 反北에 의존했던 냉전 수구세력과 결별해야 하며, 정권 안보 수단으로 이용되어 온 국가보안법 등 구시대적 反共 反北 관계 법안은 폐기해야 한다(1994년 실천문학 봄호).

▲金正日은 오케스트라 연주 중 특정 연주자의 반음 착오까지 알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으며 종자론이라는 영화예술론까지 내놓을 정도로 문예 이론도 상당한 수준이다(1994년 7월12일자 한겨레신문).

▲金正日 정권은 매우 안정적 구조를 띠고 있으며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金日成 시대보다 더 적극적이다(1995년 2월 金正日 정권의 전망과 우리의 대응방향).


李鍾奭과 黃長燁의 논쟁

2001년 7월23일, 前 북한 노동당 비서 黃長燁씨는 「최근의 비판 글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글을 全 언론사에 돌렸다. 黃長燁씨의 이 글은 李鍾奭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 한국일보에 기고한 黃비서의 미국 방문 부당성을 지적한 글에 대한 비판이다.

李鍾奭씨가 기고문에서 주장한 미국 방문 부당의 근거는 이렇다. 첫째 黃비서의 미국 방문은 국가 이익에 배치되기 때문에 허용해서는 안 되며, 둘째 黃비서는 엄청난 고급 대우를 받고 있는 만큼 국가공무원과 같은 자세로 정부 의사에 무조건 순종할 의무가 있으며, 셋째 특수관리를 받고 있는 망명자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된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黃비서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다.

李鍾奭씨 글에 대해 黃長燁씨는 조목조목 비판을 가한 뒤 이렇게 결론 내렸다.

<나는 북한에 있을 때 세상에는 절대적인 천재가 한 사람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대해 보려고 헛되이 많은 애를 썼지만, 여기 남한에 와서는 천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들이 풍기는 냄새 때문이다. 아마도 젖비린내인 것 같다>

북한에 대한 李鍾奭 사무차장의 최근 견해는 작년 10월에 발간된 그의 책 「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에 들어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李鍾奭 사무차장은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보기 위해서는 북한의 공식 문헌이 보여주는 규범과 현실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다.

「새로 쓴 북한의 이해」에서 李鍾奭 사무차장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북한은 우리의 敵이기도 하고 형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을 「적대적인 형제」로 규정한다. 敵이라는 「현실」과 끌어안아야 할 형제라는 「당위」가 모두 오늘의 북한 속에 공존해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이중적 현실 인식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북한의 적대성을 감소시켜가며 공존과 동반자 관계로 이끌어가는 지혜와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이책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필자의 북한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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