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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이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파병인 베트남전 참전의 역사적-경제적 의미를 짚어보는 정책토론회를 15일 오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었다.
이날 <국군의 베트남 파병의 경제적 의미>를 주제로 발제에 나선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은 “베트남 파병은 경제기적의 도화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며 “베트남 파병 전과 파병 후의 경제 지표를 보면 이러한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 파병기간 동안 총 20억 2200만 달러 원조받아
권 소장은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원조 증가는 한국의 재정 부담을 크게 덜어줌으로써 경제개발에 기여하게 된다. 미국은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대한군사원조를 급격히 삭감하기 시작했다”면서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1964년에는 전년 대비 약 6천만 달러나 감소시켰다. 파병 결정과 동시에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가 크게 늘어나 경제-군사적으로 상당한 이익을 얻게 된다. 1962년~1965년까지 총 9억800만 달러의 원조를 받아 연평균 2억 2700만 달러였는데 반해, 파병기간인 1966년~1971년에는 총 20억 2200만 달러의 원조를 받아 연평균 3억 700만 달러를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의 총 수출액이 1961년 1억4,600만 달러에 불과했고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66년에도 2억 5000만 달러였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막대한 금액이라 할 수 있다.>
韓日협정으로 받은 금액(8억 달러)과 비교할 수 없어
김영호 성신여대 정외과 교수는 “베트남파병으로 벌어들인 외화수입은 무역과 무역외 부분을 모두 포함하여 약 10억 달러에 달했다”며 “이는 한일협정을 통하여 청구권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낸 금액 8억 달러와 비교해볼 때 엄청난 액수였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어 “당시 경제개발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외화자본이 극히 부족했던 한국에게 베트남에서의 달러 수입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경제발전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며 “이 수입은 장병들의 전투 수당, 베트남 파견 한인 근로자 수입, 베트남 수출, 현지 건설 사업, 미국에 대한 상품 및 서비스 제공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희생도 매우 컸다. 군 장병 5천여 명이 전사했다. 베트남 현지에서 활동하다가 베트콩에 피살된 근로자 숫자는 300여명에 이르렀다. 이런 희생 위에 이루어진 '베트남 특수’를 계기로 하여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속국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주성 되찾아”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은 “베트남전은 한국 경제발전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63~73년 기간 중 한일관계 정상화와 베트남전 참여로 획득한 외화 총액은 한국 외화수입 총액의 3분의 1에서 절반에 이르는 규모였다. 일본이 6·25를 통해 경제부흥을 했듯이 베트남전은 한국경제의 도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베트남 파병은 우리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오랜 열등의식, 피지배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자질에 새롭게 눈뜨고 자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배, 미국의 원조와 군정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던 피지배의식, 열등의식, 속국의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주성을 되찾았다. 베트남 파병은 자주성 확립이라는 견지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것이다.>
베트남 파병은 불가피한 선택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베트남전 파병이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러한 선택사항이 아니라, 거의 불가피한 강요였다”며 “당시 미국은 실제로 주한 미군의 일부를 베트남으로 빼갔다. 휴전된 상태에서 실질적인 (대북) 방어는 미국이 담당하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 국방비의 73%를 미국의 원조 충당했다. 미국의 도움 없이 국방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베트남 파병의 경제적 성과와 관련해서도 “한국이 6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파견할 수 있는 나라라는 인식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대외적으로 국가의 위상과 신인도가 높아져, 한국 정부의 신뢰를 높여주는 데 기여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로 인해 외자도입이 용이해졌다. 외채를 빌리기 어려웠던 60년대 초와 달리 베트남 파병 이후인 66년에는 공공차관과 상업차관을 합쳐 총 1억 9000만 달러로 증가해 공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해외에서 빌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