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개성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위 ‘남북차관급회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랜 기간 동안 남북대화 현장에서 북한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저의 생각으로는 북한이 보여주고 있는 협상행태는 과거의 그 것과 하나의 변화도 없이 그 연장선상에 있을 뿐입니다. 도대체 노무현 정부는 무엇을 하고자 이 같은 ‘대화’라는 이름의 ‘사이비 대화’에 집착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다음의 글은 1995년10월 서울에서 ‘국방군사학회’가 “한국의 휴전체제와 새로운 평화체제 구축방향”에 관한 세미나에서 제가 발표한 논문입니다. 한번 이 논문을 읽어 보시고 그 때의 북한의 협상행태와 지금의 그들의 협상행태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동복
平和體制로의 轉換을 위한 協商戰略 (4)
- 북한의 협상행태에 대한 집중분석 -
국방군사연구회 주최 “韓國의 휴전체제와 새로운 평화
체제 구축 방향”에 관한 세미나(서울: 1995.10.10)에
서 발표할 논문 [발표자: 李東馥 미국 국제전략문제연
구소 초청연구원]
6. 북한의 ‘협상’행태④ - ‘전술’과 ‘전략’
이상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북한은 외부세계를 상대로 ‘협상’을 할 때 아직도 여전히 냉전시대 특유의 공산주의자들의 논리와 행태, 그리고 ‘전략’과 ‘전술’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글의 모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의 세계는 전 지구적으로 ‘탈냉전’의 ‘냉전이후 시대’를 구가하고 있고 세계의 모든 다른 지역에서는 과거 냉전시대의 동서관계를 제약했던 공산주의자들의 전통적 ‘협상’ 행태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유독 한반도에서는 냉전적 상황이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북한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의 여러 가지 형태의 회담 과정에서 북한의 행태를 통해 나타난 ‘협상전술’은 일관된 것이었다. 예컨대 그들은 ① 항상 ‘일방적 해석’의 여지를 함축한 ‘원칙적 합의’를 고수함으로써 일단 이루어 진 ‘합의’의 이행에 제동을 거는 수단으로 이를 활용하고 ② 필요할 때마다 일방적 ‘전제조건’과 엉뚱한 문제를 제기하여 회담의 페이스를 조절하는가 하면 ③ ‘일괄합의•동시실천’ 주장으로 회담의 ‘선수’(주도권)는 장악하면서 회담의 진전을 가로막고 ④ 일단 합의 후에도 ‘새로운 문제’ 제기로 ‘합의’ 이행에 제동을 걸면서 ⑤ ‘협상’기구를 탄생시킨 뒤에도 이의 개편을 주장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협상’기구에의 합의를 요구하여 ‘협상’기구의 운영을 마비시키는 ‘전술’을 때에 따라 번갈아 가며 구사해 왔다. 이 같은 북한의 ‘협상전술’을 유형별로 살펴보자.
<‘일방적 해석’의 여지를 함축한 ‘원칙적 합의’ 고수>
이 경우의 대표적 실례는 앞에서 상세히 검토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의 ‘통일 3원칙’이다. 이 ‘통일 3원칙’은 그 뒤 남북한 간에 ‘합의서’가 채택될 때마다 ‘한약의 감초’격으로 반드시 언급되어 왔다.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의 전문에도 이 ‘원칙’이 언급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원칙’은 실천이 불가능한 원칙이었다. 왜냐 하면 앞에서 검토된 바와 같이 이 ‘원칙’의 해석에 있어서 남북한 간에는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이와 유사한 경우는 허다했다. 예컨대 남북대화 초기의 적십자회담의 경우를 보자. 1970년대 초 남북적십자회담은 회담이 열릴 때마다 ‘합의서’에 ‘합의’하는 ‘열성’을 과시했다. 그런데 이들 ‘합의서’의 대부분이 실체가 없는 ‘원칙’에 관한 합의서였다. 예컨대 제1차 본회담(평양: 1972.8.29~9.2) ‘합의서’는 문제의 ‘통일 3원칙’을 재확인하는데 추가하여 ‘자유로운 방문,’ ‘자유로운 상봉,’ ‘자유로운 서신거래’라든가 ‘적십자 인도주의 원칙’ 등의, 그리고 제2차 본회담(서울: 1972.9.12~16) ‘합의서’는 ‘온 겨레의 의사와 염원,’ ‘민주주의적 원칙,’ ‘자유로운 원칙,’ ‘남북공동성명의 정신,’ ‘동포애’ 등의 표현을 담고 있었다.
최근 미•북 핵회담에서 생산된 ‘합의서’도 예외가 아니다. 예컨대 미•북 1단계 ‘고위급회담’(뉴욕: 1993.6.11) ‘공동발표문’(북측 표현은 ‘공동성명’)은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지지,’ ‘전면적 핵안전조치의 공정한 적용,’ ‘한반도의 평화통일 지지.’ ‘평등과 공평의 기초’ 등의 표현을 담고 있다. 이 합의사항들은 쌍방 간 근본적인 해석상의 차이를 바닥에 깔고 있는 ‘원칙적 용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년 10월 21일의 제네바 ‘기본합의’나 금년 6월 13일의 쿠알라 룸퍼 회담 ‘공동언론 발표문’도 쌍방 간에 해석상의 차이가 존재하는 이 같은 ‘원칙적 용어’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들 문제표현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가 극복되지 않는 한 이 표현들이 포함된 ‘합의’들은 이행이 불가능하다. 프레드 이클레가 ‘국가 간의 협상기법’에서 갈파한 것처럼 이 같은 ‘원칙적 용어’들을 담고 있는 ‘합의’들은 본래 부터 이를 성실하게 실천•이행하지 않겠다는 북한 측의 저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원칙적 합의’를 통해서 북한이 노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북한은 ① 우선 “해석상 이견의 여지가 있는 애매한 표현”을 담은 ‘원칙적 합의’의 생산을 관철하고 ② 이 ‘원칙적 합의’의 실천단계가 되면 문제의 ‘원칙적 합의’의 ‘재해석’을 위한 ‘재협상’을 강요하여 ‘재협상’ 과정에서 상대방으로부터 ‘추가적 양보’를 확보하며 ③ 이 같은 ‘재해석’을 통하여 새로운 ‘원칙적 합의’가 생산되면 또 다시 앞의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합의’사항의 실천이 없거나 부분적인 이행만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하나의 ‘합의’를 또 하나의 ‘합의’로 끊임없이 대체해 나가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의 ‘남북고위급회담’의 경우 북한은 ‘기본합의서’가 채택된 뒤 이 ‘기본합의서’를 “원칙에 관한 합의”라고 규정하고 “‘원칙적 합의’ 뒤에는 ‘규칙에 관한 합의’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주장하면서 이른바 ‘규칙에 관한 합의’로 포괄적 ‘부속합의서’의 채택을 고집했으며 우리 측의 양보로 포괄적 ‘부속합의서’가 난산 끝에 채택되자 이번에는 “‘규칙’ 다음에는 ‘세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분야별 ‘공동위원회’의 ‘운영세칙’이라는 것에 합의할 것을 고집하는 도중에 ‘고위급회담’ 자체를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그 동안 여섯 건의 ‘합의문’을 생산한 미•북 핵회담의 경우도 ‘합의서’로 ‘합의서’를 대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왔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1993년 6월 11일의 ‘공동발표문’(JOINT STATEMENT), 1993년 7월 19일의 ‘개별 언론발표문’ (SEPARATE PRESS STATEMENTS), 1994년 2월 25일의 ‘합의된 결론’ (AGREED CONCLUSION), 1994년 8월 12일의 ‘합의성명’ (AGREED STATEMENT), 1994년 10월 21일의 ‘합의의 틀’(AGREED FRAMEWORK), 1995년 6월 13일의 ‘공동언론발표문’(JOINT PRESS STATEMENT)가 그 것들이다.
<회담 도중 ‘전제조건’ 제기로 회담 페이스 조절>
북한은 어떠한 회담에서든지 ‘합의’를 생산하는 단계에서나 실천하는 단계에서 일방적인 ‘전제조건’을 기습적으로 들고 나와 ‘합의’ 도달이나 실천을 가로막는 것이 예사였다. 또 진행 중인 회담을 ‘전제조건’을 내세워 중단시키고 ‘전제조건’을 내세워 중단된 회담의 재개를 가로막는 행동을 반복해 왔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북한은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가 가동을 시작하자 ‘군사문제 우선해결’ 주장을 ‘회담진전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들고 나와 회담의 진전에 제동을 걸었다. 북한의 주장은 “남북한 간의 현 군사적 대치상태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대화를 할 수 없고 남북관계를 실질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도 없으며 나라의 통일과 관련된 어떠한 문제도 성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북한은 ① 무력증강과 군비경쟁 중지 ② 각자 군대의 10만 이하로의 감축과 군비의 대폭 축소 ③ 일체 외제 무기와 작전장비 및 군수물자 반입 중지 ④ 미군을 포함한 일체 외군의 철수에 합의할 것과 이를 내용으로 하고 상호 ‘무력 불행사’를 다짐하는 ‘평화협정’의 우선적인 체결을 요구했다.
북한은 1973년 8월 일본에서 김대중 씨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구실로 남북조절위원회의 운영을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그 뒤 북한은 한국에 대해 ① ‘6.23 선언’(박정희대통령의 1973년 6월 23일자 남북한 동시 UN가입 제안) 철회 ②반공정책 포기, 반공법•국가보안법 폐지, 공산당 활동의 합법화, ③ 주한미군 철수 ④ 북한 측의 통일방안 수락 등 상대방이 수용할 수 없는 일방적 요구를 ‘전제조건’으로 제시함으로써 남북조절위원회 운영의 재개를 가로막았다.
1973년 북한은 진행 중이던 적십자회담 본회담도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남북한 간에는 한동안 판문점에서 본회담 재개를 위한 ‘실무회의’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북적측은 본회담 재개를 위한 몇 가지 ‘전제조건’들을 제시했다. 그 것은 한국이 ① 반공법•국가보안법 및 1972년 ‘유신 개헌’을 전후하여 공포한 ‘긴급조치’들을 폐지하고 ② 반공단체와 반공기구들을 해체하며 ③ 반공정책과 군사도발을 중지하고 ④ 정당•사회단체들의 적십자 사업 참가와 이에 수반되는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며 ⑤ 이상 조항들의 실천을 보장할 법률적•행정적 조치를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1993년 남북한 간에 북한 핵문제 논의를 위한 ‘특사 교환’ 문제가 거론되자 북한은 ‘특사 교환’ 실현의 ‘전제조건’으로 ① 대 북핵 국제공조체제 추구 중지와 ②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를 요구했다. 1994년 7월 남북한 간에 합의된 ‘정상회담’은 회담 실현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으로 유산되었다. 김일성 사망 후 ‘정상회담’의 재개 문제가 거론되자 북한 측에서는 세 가지의 ‘전제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즉 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② 북핵문제에 관한 ‘국제공조체제’ 추진을 포기하며 ③ 한국내의 미전향 좌익수들을 석방하여 북으로 송환하라는 것 등이다. 여기에 더하여 작년 김일성 사망 시 한국정부가 한국국민들의 조문을 금지한데 대해 사과하라는 요구가 여전히 ‘전제조건’의 하나로 살아 있다.
요컨대 회담과 관련하여 북한이 내놓는 각종 ‘전제조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 것은 이 ‘전제조건’들이 하나 같이 상대방이 수용할 수 없는 일방적인 것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제조건’들은 상대방더러 수락하라고 내놓는 ‘협상용’이 아니다. 이들은 상대방의 ‘거부’를 유도하기 위한 것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회담의 진도 조절과 함께 회담을 중단시키고 또 재개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 주도권을 북한이 장악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회담 도중 엉뚱한 문제 제기로 회담 진전 봉쇄>
북한은 회담 도중 엉뚱한 문제를 들고 나와 회담의 진전을 가로막기가 예사였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본회담 석상에서 대한적십자사(한적)측이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권장하는 ‘심인사업’ 방식에 따라 이산가족 재회사업의 조속한 실시를 제안하자 북한적십자회(북적)측은 엉뚱하게도 ‘적십자 요해 해설인원’ 교환 주장을 들고 나왔다. 북적의 제안은 ‘이산가족 심인사업’에 착수하기에 앞서서 먼저 “서로 ‘적십자 요해 해설인원’을 교환•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상대측 지역에 가서 흩어진 가족•친척들의 실태를 ‘요해’(파악하고 해설)하는 사업을 벌이게 하자”는 것이었다.
북적은 “상대측 이(동)당 1명씩의 ‘요해 해설인원’을 보내 시•군(구역) 단위로 활동하게 하되 이들에게는 언론•출판•집회•통행 등 활동의 자유와 편의를 보장하고 인신과 휴대품의 불가침권을 인정하자”고 주장했다. 북적 측의 제안대로 한다면 북측에서는 36,000여명, 그리고 남측에서는 4,300여명의, ‘요해 해설인원’들이 상대측 지역으로 가게 된다는 계산이 된다.
더구나 북적은 이산 가족의 생사여부와 주소를 확인•통보하는 문제에도 쌍방 적십자사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고 “당사자 본인들이 직접 상대측 지역으로 가서 자유롭게 다니면서 찾아내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이야말로 한반도 남북분단의 현실을 도외시한 비현실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북적은 한국의 국가보안법 폐지가 이산가족 찾기 사업 실시의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북적의 주장은 “우리 라의 인도주의는 궁극적으로 분단조국의 통일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통일문제의 일환으로 다루어 져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통일을 방해하는 악법인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선행되어야 인도주의 문제도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적십자회담에 나온 북한 측의 마음은 ‘염불’(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북한의 관심은 오직 ‘잿밥’(남한의 반공체제 무너뜨리기)에만 있었다.
<‘일괄합의•동시실천’ 주장>
북한의 ‘일괄합의•동시실천’ 주장은 회담 당사자 사이의 모든 현안 문제들에 관하여 ‘일괄합의’를 이룩하고 이를 ‘동시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은 북한 측 주장은 “우선 합의할 수 있는 문제부터 합의하고 합의된 문제는 합의되는 대로 즉시 실천에 옮겨서 합의 이행의 실적 축적을 통해서 신뢰의 기반을 쌓아 올려 나가자”는 우리 측의 ‘부분합의•즉시실천’ 주장에 대한 대응 논리이다.
‘남북고위급회담’ 북측 대표단장이었던 연형묵 정무원총리는 1992년 2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제6차 회담에서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을 발효시키는 절차를 끝낸 뒤에 행한 기본발언을 통하여 “건당 합의하고 합의하는데 따라 실천하자는 종전의 귀측 주장은 일견 문제해결의 빠른 방도인 것 같지만 쌍방이 우선적인 관심을 두고 먼저 해결하자는 분야와 문제들이 각각 서로 다른 현실적 조건에서는 오히려 그 것이 문제해결을 더 지연시킬 것”이며 “더욱이 합의서의 매 조항들이 서로 밀접히 련관되어 있는 조건에서 어느 한 문제가 합의되었다고 하여 그 것을 곧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고 실천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실은 연형묵은 이 발언을 통하여 바로 이날 쌍방이 합의하여 발효시킨 두개의 합의문서들이 즉각 이행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북한은 모든 형태의 남북대화 석상에서 이 주장을 강력히 폈다. ‘일괄 합의•동시실천’ 주장은 일견 적극성을 과시한다. 그러나 ‘합의하기 용이한 문제’와 ‘합의하기 어려운 문제’가 혼재해 있는 현실상황에서는 ‘일괄합의’ 주장이란 실제로는 ‘합의’ 도달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접근방식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여기에 더하여 ‘동시실천’ 주장은 가령 ‘일괄합의’의 두터운 벽을 뚫고 그나마 일부 ‘부분합의’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합의되지 못한 다른 부분’에 관한 합의가 이룩될 때까지 ‘이미 합의가 이루어진 부분’의 실천 유보를 강요함으로써 일체의 진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발상을 바닥에 깔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일괄합의•동시실천’ 주장은 일견 외견상의 적극성을 가장하여 회담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실제로는 ‘일괄’과 ‘동시’의 겹 자물쇠를 이용하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못하게 봉쇄하는 ‘지연전술’(FILIBUSTER) 논리 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일단 합의 후 새로운 문제 제기로 합의 이행 봉쇄>
남북한 간에는 1989년 9월에서 11월에 걸쳐 판문점에서 1985년 1차로 실시된 바 있는 ‘이산가족 노부모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을 재차 실시하는 문제를 가지고 적십자 실무대표 접촉이 진행되었다. 쌍방은 도합 여덟 차례의 접촉을 갖는 과정에서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규모와 교환방문 시기 및 기타 필요한 절차에 대부분 합의를 이룩했다.
그런데 당초 북한측의 속셈은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1회성 교환방문에 동의하는 대가로 같은 해 3월과 7월 불법적인 북한 방문 후 구속•기소되어 있는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학생의 석방을 얻어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북한의 속셈은 한국정부가 문익환•임수경에 대한 사법절차를 강행함에 따라 빗나갔고 그렇게 되자 북한의 생각은 달라졌다.
북한은 예술공연단의 상대측 지역에서의 공연 내용에 관하여 ① 민족적 내용 ② 건전한 내용 ③ 상대방을 중상•비방하지 않는 내용이라는 3개 원칙에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북측 공연단의 서울 공연 시 ‘이데올로기’ 색채가 농후한 ‘꽃 파는 처녀’ ‘피바다’ 등 이른바 ‘혁명가극’을 공연하겠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이를 고집함으로써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 자체를 유산시키고 말았다.
1992년 5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 석상에서 쌍방은 이 해 8.15 광복절을 기념하는 뜻에서 “조건 없이”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 및 예술단’을 조직하여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사항의 이행 여부에 관한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회담 종료 후의 기자회견 석상에서 북측의 안병수 대변인은 특히 이 합의의 ‘무조건성’을 애써 강조했다.
이 합의의 구체화를 위하여 남북한 간에는 또 다시 여덟 차례의 적십자 실무대표 접촉이 판문점에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때도 ‘무조건성’을 강조한 북한 측의 흉중에는 다른 계산이 있었다. 북한은 문제의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방문 실현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한국 측이 자진하여 북한이 요구하는 이인모의 북송에 동의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인모의 북송은 실현될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북한은 생각이 바뀌었다.
적십자 실무대표 접촉에서 북한은 “무조건 실시” 약속을 식언하고 또 다시 ‘전제조건’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① 이인모의 무조건 송환 ② 북한 핵문제와 관련하여 ‘국제공조체제’의 포기 ③ 또 다른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포커스․렌즈의 취소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무조건 실시하기로” 다짐했던 이산가족 노부모와 예술단의 교환 방문은 실현되지 않았다.
<회담기구의 개편 또는 새로운 회담기구로의 대체 요구>
남북조절위원회가 1972년 말 가동을 시작하자 북한은 남북조절위원회와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병행 개최하자고 제의해 왔다. 1973년 8월 불과 세 차례의 본회의 끝에 남북조절위원회의 운영을 중단시킨 북한은 남북조절위원회 재개의 조건으로 동 위원회의 확대•개편을 요구했다.
1973년 11월 남측의 장기영 부위원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남북조절위원회 재개의 조건으로 ① 6.23 선언의 취소 ② 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자 처벌 중지 ③ 남북조절위원회의 확대•개편을 요구했던 북측의 유장식 부위원장은 그 해 12월 부터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회의가 시작되자 여기서 북측이 말하는 남북조절위원회의 확대•개편 방안을 제시했다. 즉 “각기 5명 이상의 당국 대표, 각기 60~70개의 정당•단체에서 규모와 중요도에 따라 5~20명씩의 대표 그리고 그 밖에 각계각층 인민 대표”등으로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이렇게 되면 남북조절위원회는 한쪽에서 최소 350여 명, 최대 1,500명의 ‘위원’들이 참가하는 군중집회로 변모한다. 뿐만 아니라 남한의 경우에는 “통일에 반대하는 정당•단체나 개인은 참여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에 반대하는”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북한 측 설명에 의하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이란 뜻이었다. 왜냐 하면 북한의 논리에 의하면 “공사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민족의 단결에 반대하는 것이고 민족의 단결에 반대하는 것은 통일에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터무니없는 발상이었다. 이것은 남북조절위원회를 하지 말자는 것이지 확대•개편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이 같은 북한의 협상‘전술’들은 하나의 중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 것은 이 협상‘전술’들이 하나의 일관된 협상‘전략’의 테두리 안에서 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윌헬름이 냉전시대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협상행태 연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북한의 경우도 ‘전술’에는 신축성이 있으나 ‘전략’에는 추호의 융통성도 없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북한의 협상‘전략’은 오직 하나의 기본목적에 집착하고 있다. 즉 ‘협상’이 아닌 ‘회담’을 통해 ‘적화통일’의 과도적 단계로 “남조선의 공산화 내지 용공화”를 성취하는데 이바지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그 같은 ‘회담’(또는 ‘접촉’)을 통해 “남조선의 공산화 내지 용공화”가 이루어지면 그렇게 ‘공산화’ 내지 ‘용공화’된 ‘남조선’을 상대로 ‘협상’하여 ‘적화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조선혁명에 기초한 조국통일’ 이론으로 이른바 ‘하나의 조선’ 논리가 설정해 놓고 있는 한계이다.
남북대화를 하든지 미국과 핵회담을 하든지 또는 일본과 국교정상화회담을 하든지 이 모두를 관류하는 북한의 유일무이의 기본목적은 이를 통하여 “남조선의 공산화 내지 용공화를 이룩하는데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협상‘전략’은 북한이 추구하는 협상‘목표’의 차별화를 요구한다. 즉 북한은 북한이 추구하는 ‘적화통일’ 목표와 관련하여 ‘전략적 목표’인 ‘적화통일’ 그 자체와 ‘전술적 목표’인 이를 위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는 문제”를 차별화 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것을 ‘조선의 통일문제’와 ‘조선의 통일에 관한 문제’로 구별한다. 여기서 ‘조선의 통일에 관한 문제’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조선의 통일문제,’ 즉 ‘적화통일’ 목표 그 자체는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를 위한 북한의 협상‘전략’은 남북대화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로 상징되는 반공체제의 와해를, 대미 핵회담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로 집약되는 한•미 안보유대의 파괴를, 그리고 대일 수교회담에서는 대한민국의 ‘유일합법성’ 훼손을 ‘비타협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북한이 협상‘전술’의 차원에서 가지고 있는 ‘융통성’과 ‘신축성’은 ‘회담’이 이들 ‘비타협적 목표’ 달성의 ‘수단’으로 구실할 경우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다. [계속]
북한의 협상행태에 대한 집중분석 [4]
- 이동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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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5-19, 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