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1970년 이후로 논쟁이 지속되어온 舊日本陸軍에 의한 비문(碑文)조작설은 허위로 판명. 근린국에 대한 영합으로 歴史学이 뒤틀리고 왜곡되는 현실을 역사학자들은 맹렬히 반성해야.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주요내용 발췌)

오히라 히로시(大平裕)
1939년생.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기념재단 대표.
주요저서, '日本古代史 正解'(講談社) 등.

현재, 임나(任那)의 존재는 입에 올리기 거북스러운
존재로 되어 있습니다. 日本이 고대에 한반도를 통치
했다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일본內 관련 학회는
이웃 한국을 자극할 수 있으니 자제하자는 암묵적 동
의가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좌익(左翼)적 분위기에 굴복한 상징적
사건이 바로 '광개토왕비(広開土王碑) 조작' 논쟁입니
다. 서기 400년 前後에, 日本은 한반도 東西에서 대규
모 전쟁에 주력(主力)으로 참전했고, 고구려(高句麗)
의 위협으로부터 백제(百済)를 도와주는 한편, 동해안
쪽에서는 임나(任那)와 함께 북상하여, 신라(新羅)를
공략(攻略)했습니다. 日本 사상 최초로 전개된 해외
에서의 대규모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이 전쟁의 규모는 고구려 왕이었던 광개토왕(広
開土王, 제19대・재위 392~413)의 생애를 새긴 석비
(石碑)인 '광개토왕비(広開土王碑, 413년 건립)에 기
록되어 있습니다. 광개토왕(広開土王)은 호태왕(好太
王)으로도 불렸는데, 북쪽으로는 북연(北燕)을, 남쪽
으로는 백제(百済)를 침공하는 등 팽창을 도모한 왕
이었습니다. 당연히 비문(碑文)은 왕(王)의 공적을 나
타내기 위해 연전연승(連戦連勝)을 어필하고 있는데,
왜국(倭国)과 더불어 임나(任那) 제국의 이름(諸国名 :
加羅・安羅)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왜국(倭国)
과 관련된 기술(記述)은 11군데 나오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391년(辛卯)
왜(倭)가 바다(海)를 건너와 백제(百済)・신라(新羅)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399년(己亥)
백제(百済)는 고구려(高句麗)와의 약조(約)를 깨고 왜
(倭)와 통(通)했고, 평양(平壌)으로 내공(来攻), 한편,
신라(新羅)로부터 급사(急使)가 왔고, 왜인(倭人)들이
국경(国境)에 가득(満)했다.

400년(庚子)
신라(新羅)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오만(五万)명의 군
사(兵)를 파견(派遣),했는데, 왜군(倭軍)이 성안(城中)
에 가득(満)했고, 왜병(倭兵)을 무찔렀다(討).

404년(甲辰)
왜(倭), 불법적으로(不軌) 대방군(帯方郡)으로 침입(侵
入).

407년(丁未)
오만(五万)명의 군사(兵)를 이끌고 싸웠고, 왜(倭)는 갑
옷(鎧) 일만여(一万余)개를 남기고 패퇴(敗退).

그런데, 이 광개토왕비(広開土王碑)에 대해, 1972년 재
일(在日) 한국인 학자 이진희(李進熙)씨가 지금까지의
비문해석(碑文解釈)·해독(解読)에 대해 이치에 맞지도
않는 이론(異論)을 내세워 학계에는 소동이 벌어졌습
니다. 이 비문(碑文)은 1884년, 舊日本軍 참모본부의
사
코 가케노부(酒匂景信)가 입수한 것인데, 이진희(李
進
熙)씨는, 근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정당화하기 위
해
舊일본군이 멋대로 탁본(拓本)을 조작했다는 주장
을
했습니다. 당시 실물에 대한 검증이 불가능한 관계
로 
이진희(李進熙)씨의 갑작스러운 주장을 확실히 부
정
(否定)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로 인해, 관련
연
구는 40년간 정체(停滞)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울러, 이진희(李進熙)씨는, 日本側이 광개토왕(広開
土王) 비문(碑文)을 근거로 삼아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로 출병(出兵)하여, 백제(百済), 신
라(新羅)를 정복(征服)했고, 가야(伽耶) 지방에 임나일
본부(任那日本府)라는 통치기관(統治機関)을 두어, 2세
기 동안 지배했다는 것은 역사적(歴史的) 사실(事実)'
이라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反発)했습니다.

하지만, 2006년 4월14일字 요미우리(読売)신문에는,
<호태왕(好太王) 비(碑) 탁본(拓本) 발견…조작 논쟁
에 종지부(終止符)>라는 반향 큰 기사가 게재되었습니
다. 고대 日本의 한반도 진출을 기록한, 중국 길림성(吉
林省) 광개토왕(広開土王) 비(碑) 최고(最古)의 탁본(拓
本)이 중국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한 기사였습니
다. 왜국(倭国, 日本)과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기술(記
述) 부분이, 舊日本軍이 입수한 탁본(拓本)과 새로 발
견된 최고(最古)의 탁본(拓本)이 서로 일치한다는 사
실을, 중국사회과학원 서건신(徐建新) 교수가 판명해
낸 것입니다.

이에 따라, 1970년 이후로 논쟁이 지속되어온 舊日本陸
軍에 의한 비문(碑文)조작설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확
정이 되었습니다. 서건신(徐建新) 교수는, 동아시아 각국
에 산재한 약 50종(種)의 탁본(拓本)을 확인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는데, 2006년 당시까지 최고(最古)로 여겨지던
사코(酒匂) 입수(入手) 탁본(拓本)보다 3년이 더 오래된
1881년 탁본(拓本)을 북경(北京)의 옥션에서 발견한 것
입니다. 그 탁본 정보(내용)를, 사코(酒匂) 입수(入手) 탁
본 정보(내용)와 함께 PC에 입력하여 상호 비교해 본 결
과, 의도적으로 변조하거나 조작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것입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호태왕비탁
본(好太王碑拓本) 연구'(東京堂出版)로 정리되어 발표되
었습니다. 

이진희(李進熙)씨의 민족감정에 기초한 반일사관(反日
史観)은,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속죄관(贖罪観)을 간직
한 日本人 학자들을 윤리적(倫理的)으로 압박하는 공격
재료로 작용했습니다. 오랜 기간, 광개토왕(広開土王)
비(碑) 연구에 브레이크를 건 바람직하지 못한 학자의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브레이크 때문인지,
1980년대 이후 日
本의 역사 교과서에는 광개토왕(広
開土王) 비(碑)에 대
한 기술(記述)이 일제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근린국에
대한 영합으로 인해, 역사학(歴
史学)이 뒤틀리고 왜곡되
는 현실을 역사학자들은 맹
렬히 반성해야 합니다.

1980년대, 한반도 남서부 전라북도(全羅北道)와 전라남
도(全羅南道), 특히 남도(南道)의 영산강(栄山江) 연안에
40기(基)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잇따라 발견되었
습니다.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은 日本에서 이와테(岩
手)県에서 가고시마(鹿児島)県까지 광범위하게 존재하
는 고분으로서 日本 독자(独自)의 무덤 조성 양식입니다.
이것이 왜국(倭国, 日本)으로부터 한반도로 전해진 것입
니다. 한반도에서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발견된 지
역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기술한 임나서부(任那西
部) 지역입니다.

임나(任那)와 관련해서는 언급하는 것조차 터부시되는 
풍조(風潮)가 현재 있습니다만, 사실(史実)을 정치적 이
유로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한국에서는, '日本의 문화는
전부 한국으로부터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 심지어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조차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조차 있는 듯
합니다. 한국의 학자들은, '한반도의 전방후원분(前方
後円墳)이 일본으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극단적인 내쇼날
리즘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 동조하는 일부
日本人 학자도 존재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임나(任那)・가야(伽
耶, 加羅) 지역이, 왜국(倭国)과 어떠한 형태로 외교(外
交)・군사(軍事), 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을 형성했는지를
말해주는 문헌적 증거들은 외면하고 있는 듯한 현상은 
유감입니다. 이러한 한국측의 왜곡을 日本人 학자들도
충분히 알고는 있지만, 이에 대해 거의 침묵하며 영합하
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 일본인 학자들은, 이러한 한
국의 잘못을 지적하면 이후로 한국측으로부터 필요한
자료를 얻는 것도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있고, 상호 학
회교류 같은 것도 어려워지는 등의 본질이 아닌 것을
염려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대학에서 이러한 교수의
방침을 부교수가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고 학
생들 또한 이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임나(任那)'라는 말은 아예 입밖으로 올리기를
기피하는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토록 좌파적
역사관 풍조가 일본내에는 형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임나(任那)에' 대해 부정하는 풍조(風潮)가 이어지고
있지만, 역사(歴史)라는 것은, '선악(善悪)'이나 '좋고
나쁨'이라는 감정과는 별개로, 사실(史実)은 사실(史
実)로서 있는 그대로 연구가 이루어져야 바람직하다
고 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극단적 좌익 사관이나, 
극단적 내셔널리즘에 사로 잡히지 않고 연구에 임하
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광주 월계동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위 사진) 
  
일본 군마현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아래 사진)



  
또다른 일본內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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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tillra 2015-09-26 오후 7:34

    전방후원분이나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측에서도 오히려 역사엎어치기 당할수 있다는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가령 한반도에서 일본측 유적보다 오래된 전방후원분이 발견되면 큰 문제가 될것 아닙니까?일본 역사학계는 큰 악몽일 것입니다.
    일본이란 국명은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서기670년 전후)에 일본에서 사신이 와서 국호를 바꿨다는 소식을 전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런면에서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은 진실성이 의심됩니다.
    저 거대한 전방후원분은 왜 나무를 제거하지 않는지 라는 생각을 합니다.
    통상 왕릉이나 묘는 잔디를 심고 나무를 제거하지 않나요..그런데 유독 작은
    고분은 나무를 제거하고 잔디를 심는데 거래한 고분만 울창하게 숲을 이루게 하는것도
    동양인 특유의 사이즈 콤플렉스의 반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대사에서 왜의 신라침공은 초기 박혁거세 때부터 무수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 특정지역을 점령하여 일정기간 지배한 정치집단이 아니라
    해적이었을 뿐입니다.
    이 마저도 서기 502년 신라 지증왕 이후에는 삼국사기에서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673년 백강전투와 8세기 초 신라 성덕왕때 딱 두번 더 나오는데 초전에 신라의 완승으로
    끝납니다.
    서기 502년이면 금관가야나 대가야가 멸망하기 전이고 소위 일본의 흠명천왕이 가야의
    멸망을 두고 울부짖기 훨씬전입니다.
    더구나 초기 약체였던 신라마저도 일방적으로 당한게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 양방면에서
    전선을 유지해야 했던 약점에서 당했던 불운일 뿐입니다.
    그 신라마저 두번이나 왕이 일본을 정벌하려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멈춘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옵니다.
    삼국사기 박제상 열전은 두개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라가 즉위전 눌지왕의 동생을 왜에 인질로 보냈다는 것과 왜가 그 신라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침공하려한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 했다는 것입니다.
    즉 신라도 왜에 마냥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고 일본서기에 나오듯 굴종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남지방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은 우리 역사학계가 의심없이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 있는 노르망디라는 지명을 생각합니다.
    노르만족은 프랑스 서쪽 노르망디에서 공국을 이루다가 윌리엄공이 영국을
    정복했습니다.
    이처럼 임나일본부도 오히려 가야세력이 일본열도로 진출한 흔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펀더멘털님이 왜 전방후원분과 임나일본부설에 관한 이 주장을 하는지 그리고 조갑제 닷컴은 왜 메인화면에 올려놓고 있는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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