陸英修저격사건의 진실(2)
文世光은 국립극장 맨 뒷줄에 약10분간 앉아 朴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저격을 결심하고 허리춤에 질러두었던 권총을 뽑아 배 밑으로 옮기는 순간 제켜두었던 공이치기가 격발되어 한 발이 발사되었다. ‘퍽’하는 소리를 내면서 총탄은 文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이 장면의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면 朴대통령의 연설 사이로 ‘퍽’하는 소리가 잡힌다. 이때 朴대통령은 북한측에 대해서 불가침조약을 제의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빌어서 조국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하는 순간 ‘퍽’소리가 난다. 文은 허벅지로 오발을 하자말자 놀라서 복도에서 안으로 세번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통로로 나와 연단을 향하여 뛰어갔다. 통로쪽 자리엔 경찰관들이 앉아 있었으나 아무도 文을 제지하지 않았다. 朴대통령은 ‘퍽’소리가 난 뒤에도 6초 동안 연설을 계속했다. 녹음테이프를 들으면 대통령이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시종”이라고 할 때 달려가는 文을 본 청중의 “와-”하는 함성과 함께 ‘탕’하는 제2탄 발사음이 들린다.
이 총탄은 朴대통령이 연설하던 演臺(연대)를 맞추었다. 文은 6초 동안 11.85m를 뛰어와서 20m 떨어진 朴대통령을 향해서 쏜 것인데 맞추지 못했다. 文은 제3탄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었다. 제4탄을 쏘려고 하니 朴대통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은 방탄연대 뒤에서 몸을 낮추어 버린 것이다. 文은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18.2m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陸英修여사를 향해서 쏘았다. 총탄은 陸여사의 머리를 관통했다. 文은 제5탄을 쏠 때 청중 이대산씨가 발을 걸어 넘어지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은 연단 위 태극기에 맞았다. 文은 넘어진 상태에서 체포되었다.
文은 자리에서 뛰어나와 6초만에 제2탄을 쏘았고, 7.5초 때 제5탄을 쏘고 잡혔다. 1.5초 사이에 세 발의 총성이 들렸다. 연발사격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을 놓고 경호의 실수를 미세하게 따져나가면 현실의 긴박감과 유리되어 탁상공론이 될 수가 있다.
文이 총을 들고 단상을 향하여 뛸 때 가장 먼저 대응자세를 취하는 것은 朴鐘圭경호실장이다. 그는 일어서더니 권총을 뽑아들고 단상 앞으로 뛰어나온다. 그가 일어선 것은 文이 제1탄을 쏘아 ‘퍽’소리가 난 지 4.5초 때였다. 그는 범인을 향해서 쏘려고 단상 앞으로 뛰어나오다가 관중석이 조명으로 너무 환해 눈이 부셨다. 표적을 잃은 것이었다. 朴실장의 행동에 대해서 1998년 청와대 경호실이 펴낸 사례보고서는 이렇게 지적했다.
<경호실장이라면 범인에 대한 응사가 主가 아니라, 피경호인 朴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연대로 나와 피경호인의 머리를 숙이게 조치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朴대통령이 스스로 연대 위에 몸을 숨긴 시기는 2탄이 연대에 맞은 후이가나, 3탄이 불발된 이후이기 때문에 범인이 제2탄을 정확히 사격했거나, 3탄이 불발되지 않았더라면 朴대통령 저격이 성공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1998년 경호실의 사례연구서는 陸여사 피격은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범인이 대통령을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저격하기 위하여 통로를 달리면서 총을 쏘는 상황인데도 통로 좌우측에 앉아 있던 경찰근무자들은 아무런 경호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었다. 총을 쏘는 범인을 밀어 넘어뜨리거나 정조준을 할 수 없도록 범인의 몸을 건드리기만 했어도 陸여사는 머리에 총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좌석에 앉아 있던 12명의 경찰관들은 무엇 때문에 행사장에 와서 앉아 있었는지에 관한 기본적인 행사교육이나 우발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단상에는 후미 근무자 2명을 제외한 다섯 명의 근무자가 있었지만 범인이 고함을 지르면서 단상쪽으로 뛰어나오며 사격을 하는 상황인데도 단상 좌우측의 근무자들은 朴대통령이나 陸여사를 방호하러 즉각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朴鐘圭경호실장이 뛰어나온 시점에 단상 근무자들이 행동을 취하여 피경호인을 방호하면서 머리를 숙이게 했더라면 陸여사는 생존했을 가능성이 컸다.
단상의 수행요원들은 범인이 연대를 맞춘 이후에야 행동을 취했으나 陸여사를 방호하려고 달려가던 경호원은 陸여사의 뒤쪽으로 숨고말았다. 이는 경호원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1974년 3월1일 오전 朴正熙 대통령은 부인 陸英修여사와 함께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55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때 외국대사들이 同부인하여 참석했는데 대통령 경호원들이 핸드백을 물품보관소에 맡기도록 했다. 경호원들은 부인들의 핸드백을 남자 경호원이 검색할 수가 없어 보관소를 운영한 것이었다. 경호원들은 대사 부인들에게 손수건만 갖고 입장하도록 했다.
이 행사 뒤에 駐韓외국사절단의 부인회에서 陸여사에게 과도한 경호조치라고 항의했다. 陸여사는 朴대통령에게 이를 전했고, 朴鐘圭 경호실장은 혼이 났다. 朴실장은 경호과장에 대해 정직처분을 내렸다. 이 일이 있고 난 뒤부터 朴실장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라도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과잉 검문 검색을 하지 않도록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 그해 8월15일 文世光은 국립극장에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경호원의 검문을 피했다. 陸여사가 자신의 죽음에 스스로 영향을 끼친 셈이다.
文世光은 1974년 8월15일 오전 7시 조선호텔에서 프론트로 전화를 걸었다.
'국립극장에 가야 하는데 오전 8시까지 승용차를 대기시켜주세요. 출발은 오전 9시입니다'
文은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여 바지 허리춤에 숨기고 오전 8시40분에 M-20 포드 승용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는 車中에서 운전기사에게 '국립극장에 도착하면 내려서 문을 열어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 1만원권을 주었다. 文은 또 왼쪽 옆구리에 숨겨둔 권총으로 손을 넣어 총의 공이치기를 머리 위로 올려놓았다.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결정적 실수가 된다.
정각 9시 文世光을 태운 승용차는 국립극장 정문에서 검문을 받지 않고 들어가 극장 계단 아래에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리더니 뒷문을 정중하게 열어주었다. 중절모를 쓴 文世光은 기사가 공손히 절을 하는 가운데 계단을 올라갔다. 文은 왼쪽 현관을 통해 극장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검문하지 않았다.
당시 현관에는 대통령 선발 경호원이 3명, 경찰관이 8명 근무중이었다. 文은 비표도 없이 통과했다. 중절모를 쓰고 으시대는 文의 모습을 본 경호원들은 고위인사라고 생각하여 통과시켰던 것이다. 이들은 그 뒤 조사에서 '3.1절 행사 때 외국인에 대한 경호를 너무 심하게 했다고 지적을 받았기 때문에 그날엔 소극적으로 대했다'고 변명했다.
극장안으로 들어온 文은 1층과 2층 로비를 오고가면서 저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는 통로에 카핏이 깔려 있는 것을 보고는 朴대통령이 지나갈 때 저격하려고 카핏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장시간 같은 장소에 머물다가는 경호원의 검문을 받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10여명이 권총을 차고 로비를 오가고 있었다. 文은 로비 경호원에게 먼저 다가가서는 '우시로쿠 일본대사와 스즈키씨를 기다리는데 혹시 오지 않았느냐'고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극장 로비는 여기 뿐인가요'
'2층에도 있습니다'
경호원은 文을 2층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文은 '아, 1층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었지'하면서 1층으로 되돌아왔다. 경호원은 다른 간부 경호원에게 文을 인계했다. 경호원은 '저 분은 일본대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했을 것이다. 인계받은 경호원은 文을 보고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이윽고 朴대통령이 나타났다. 경호원은 文을 잡고는 기둥 뒤에 있으라고 했다. 文은 朴대통령이 입장하는 것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약 10분 더 로비에서 머물렀다.
文은 다시 로비 근무자에게 다가가서 일본어로 '대통령의 얼굴을 한번 보고싶은데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근무자는 文의 입장을 묵인하는 표정을 지었다. 文이 로비에서 극장안으로 들어가려니 출입구 근무자가 비표를 달지 않은 그를 제지했다. 文은 로비 근무자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들어가도 좋다고 이야기했다'고 둘러대었다. 출입구 근무자가 로비 근무자를 바라보니 그는 무표정이었다. 출입구 근무자는 이를 들여보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극장안으로 들어온 文을 안내하여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자리에 앉혔다.
朴대통령과 陸여사는 1974년7월26일 금요일 휴가를 떠났다. 일행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추풍령 휴게소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진해 해군 기지내 대통령 공관에 이른 것은 오후 4시50분. 해군 함정을 타고 猪島 별장에 도착한 것은 저녁 5시45분이었다. 다음날 대통령 일행은 옥포 지역을 함상순시했다. 28일 일요일 志晩군이 내려와 합류했다. 8월2일 朴대통령은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 8월4일 朴대통령은 함정을 타고 거제도 해금강 일대를 돌아봤다. 대통령은 8월6일엔 해군장병을 위한 오찬을 베풀었다. 8월7일 朴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하여 오후 4시35분에 청와대로 돌아왔다. 申稙秀 중앙정보부장이 서재로 대통령을 찾아와 1시간40분간 보고했다. 이어서 金鍾泌 총리가 밤8시에 와서 늦은 업무보고를 했다.
진해 猪島에서 朴대통령 부부는 유달리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 가족경호를 맡았던 李相烈 수행과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두 분이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거니시는데 저는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날따라 달빛이 환하게 비추는 거예요. 두분이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나는 뒤에서 따라가는데 각하께서 ‘황성옛터’를 부르시더군요. 영부인도 합창을 하시는데 가사를 잘 모르시니 각하께서 리드하시고. 그렇게 물가에 가시더니 두 분이 야호 하고 소리치시더라고요. 아, 동심으로 돌아가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 한참 계시다가 돌아오시더라고. 돌아오시면서도 옛날 노래 ‘노란 샤스’ 등을 불렀습니다. 휴양 오셨을 때 그렇게 다정했던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달빛도 있으니 얼마나 분위기가 좋아요”
李相烈 수행과장은 1974년8월15일엔 국립극장 단상 뒤에 쳐진 커튼 뒤에서 앞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와-하고 소리가 나서 커튼을 젖히고 내다 본 것이지요. 文世光이 달려오면서 총을 쏘는 것이 순간적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연대쪽으로 뛰어나가보니가 각하께선 오른쪽으로 넘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으켜서 연대 뒤에 쪼그리고 앉도록 했지요. 대통령께서는 ‘야, 우리 집 사람 가봐’라고 하시더군요. 순간적으로 무슨 예감이 드신 듯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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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1999년8월호 월간조선 정순태 기자의 기사
제3탄, 生과 死가 결정된 제1의 승부처
연설대의 대통령과는 20.9m의 거리. 文世光은 멈추지 않은 채 朴대통령을 겨냥하여 제2탄을 쏘았다. 그러나 조준 실패였을까? 제2탄은 방탄 연설대의 상단부에 총구멍을 내고 들이박혔다. 대통령의 경축사는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시종--』이란 대목에 이르고 있었다.
제2탄 발사 후 0.5초. 찰나에 범인은 2.75m를 더 전진했다. 그러니까 제1탄 誤發 후 6.5초 동안 그의 이동거리는 14.6m에 이르렀다. 이제 대통령과 남은 거리는 18.15m. 文世光에겐 숙달된 사격권이었다.
그는 심장의 박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제3탄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철컥』. 제3탄--그건 불발탄이었다. 바로 여기가 朴대통령의 生과 死가 결정된 승부처였다.
권총이 불발된 원인은 文世光의 사격방법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일본에서 이 날을 위해 일년여 동안 부지런히 사격연습을 해왔다. 실탄을 구하기 힘들었던 그는 순간적으로 최대발사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방아쇠를 당길 때 필요한 둘째 손가락의 握力(악력)을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둘째 손가락에 작은 아령을 달아 근육을 단련시키기도 했다.
이 날 文世光은 방아쇠 압력이 강한 리볼버 권총의 방아쇠를 1초당 3번이나 당겼다. 전문가가 아니면 이런 速射(속사)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文世光은 리볼버 권총으로 實射(실사)연습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5~6개의 삽탄용 구멍이 있는 「실린더」라 불리는 탄창을 「돌린다(Revolve)」는 뜻에서 붙여진 리볼버 권총은 나름의 특징이 있다. 방아쇠를 한 번 당길 때마다 실린더에 꽂힌 실탄이 총구와 일치되도록 한 발씩 회전한다. 방아쇠가 완전히 뒤로 당겨지는 순간 공이치기가 후퇴-전진을 하면서 실탄의 뇌관을 때려 총탄을 발사한다. 당겼던 방아쇠를 놓아 원위치시켜도 탄피는 실린더에 그대로 남은 채로 있고, 실린더도 돌아가지 않는다. 제2탄을 발사하기 위해 방아쇠를 다시 당기면 실린더가 다음 실탄을 약실로 회전시키면서 공이치기가 뇌관을 때리기 위해 후퇴한다.
회전식 탄창은 그러나 한 번 당긴 방아쇠를 완전히 원위치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당기면 공이치기가 작동하지 않은 채 실린더만 회전하는 수가 생긴다. 文世光의 제3탄이 불발되던 0.5초 간의 원인은 이렇게 해서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3탄이 불발만 아니었더라면 文世光의 저격은 성공할 뻔했다. 그때 朴대통령과 文世光 사이의 거리는 18.15m, 文은 두 번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모면--순간(불발 직후) 연설을 중단한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스스로 몸을 낮추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그러나 균형을 잃은 朴대통령은 연단 뒤로 넘어졌다. 객석에서는 연단에 가려 朴대통령이 넘어진 줄 몰랐다.
무대 뒤에 섰던 수행과장 이상렬과 수행계장 박상범은 제2탄이 들려오자 본능적으로 무대로 나왔다. 박상범은 『처음 총성은 마이크나 앰프가 잘못되어 나는 소리인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여전히 무대에서 바라본 객석은 눈부신 조명 뒤편의 어둠뿐이었다.
이상렬은 달려나와 넘어진 朴대통령을 일으킨 뒤 방탄 연단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상렬이 보니 대통령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고 한다.
이때쯤 권총을 빼든 경호실장 朴鐘圭는 연단 전면으로 뛰어나와 對敵(대적) 자세를 취했다.
「피스톨 朴」이란 별명이 붙은 그의 동작은 날쌨다. 그러나 그는 총잡이일 따름이지, 임무의 우선순위를 착각한 경호실장이었다. 그의 제1차적 임무는 그 자신의 몸을 던져 대통령과 영부인의 방패가 되는 것이지 저격범을 제압하는 것은 부차적 과제였다.
陸 여사 뒤로 숨어버린 경호원
저격범은 2.75m를 더 다가갔다. 그러나 범인의 시야에선 대통령이 사라졌다. 목표를 상실한 文世光--그는 對敵 자세를 취한 朴鐘圭 실장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총구가 연설대 오른쪽으로 미세하게 돌아갔다.
그곳 응접탁자엔 대통령 부인 陸英修 여사가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壇上(단상)의 인물들 중에 가장 의연했던 모습--그것이 인상적이었다. 生死의 갈림길에서 저처럼 평온한 표정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18.2m의 거리(대통령 연단과는 15.40m의 거리)에서 文世光은 陸여사를 조준했다. 그리고 격발. 제4탄은 陸여사의 오른쪽 머리에 명중했다. 그 순간 경호원 하나가 陸여사 뒤로 몸을 감추고 있었다. 陸여사의 머리는 뒤로 비스듬히 넘어갔다. 文世光으로선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제1탄 誤發 후 7초가 흐른 순간이었다.
文世光이 돌진했던 B좌석군과 C좌석군 사이 통로의 양쪽 가장자리에만 12명의 사복 경찰관이 앉아 있었다. 그들 중 아무도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얼떨결에 자신들의 임무를 망각했던 것일까?
『얏!』 고함까지 지르며 달려들었던 文世光. 사복 근무 경찰관들과 범인의 사이는 지근거리였다. 범인의 몸을 슬쩍 건드리기만 했더라도 정조준은 불가능했다. 그랬다면 陸英修 여사는 총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범인의 조준 사격을 저지시킨 용감한 인물은 의외로 일반 참석자 이대산씨였다. 李씨는 오른발로 文世光의 발을 걸었다. 文世光은 몸의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제5탄을 발사했다. 제5탄은 연단 뒤편에 게양된 태극기를 뚫어 버렸다. 제1탄 오발 7.5초 후, 범인의 이동 거리가 18.85m에 이르렀던 순간이었다.
이제 남은 실탄은 단 한 발뿐. 세 번째 실탄은 방아쇠를 세 번 계속 당겨 실린더를 회전시켜야 발사가능한 상태였지만 그러나 文世光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 한 발에 최후의 희망을 걸었다. 『가능한 한 접근하여 저격하라』--북한 공작지도원의 지령을 文世光은 기계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李씨의 발에 걸린 文世光은 쓰러질 듯하면서도 5m쯤 전진했다. 연단 위로 뛰어오를 작정이었다. 그러나 장애물이 그를 막아섰다. 극장 1층 바닥보다 1m쯤 낮은 교향악단 연주석과 칸막이가 버티고 있었다. 그는 흠칫했다. 칸막이만 없었더라도 그는 쓰러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前列(전열) 근무 경찰관이 일어나려는 그를 덮쳐버렸다. 그는 절망했다. 文世光은 마지막 한 발을 사용해 보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그 위치는 B좌석群 제1열 오른쪽에서 세 번째 좌석 전면과 연주석 칸막이 사이의 공간이었다.
굼뜬 경호 자초한 경호지침
이 날 단상에 있던 청와대 경호원 모두가 돌발 상황에 당황했다. 총소리가 나고 범인이 고함을 지르며 단상 쪽으로 뛰어 나오며 사격을 하는 상황이었는데도 朴 대통령과 陸여사를 몸으로 막으려는 경호원은 없었다.
朴鐘圭 실장이 돌발 사태를 눈치챈 것은 제1탄 오발 후 4.5초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 순간부터라도 단상 주변의 경호원들이 방호에 나섰다면 陸여사의 생존 가능성은 높았다. 단상 주변의 경호원들이 단상으로 뛰어나온 것은 제3탄 발사부터 제5탄 발사 사이의 시점이었다. 그때는 범인이 이미 14.6m~18.8m나 전진 이동했다. 그러니까 제1탄 오발 후 무려 6.5~7.5초가 흐른 시점이었다.
이처럼 壇上 주변 경호원들의 액션이 늦었던 데는 경호원의 「불필요한 노출」을 금지했던 당시 「경호 지침」의 탓도 없지 않았다. 이 날 壇上의 경호원은 朴鐘圭 실장을 포함하여 5명이었다. 그러나 朴 실장을 제외한 나머지 4명(수행 경호원 2명과 선발 경호원 2명)은 노출되지 않게 연단 좌우의 통로 입구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돌발 사태가 발생하면 근접 경호는 시간상으로나 거리상으로 다소간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陸여사 주변의 한 경호원이 방호에 나서기는커녕, 陸여사의 뒤쪽으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는 것은 청와대 경호실 사상 최대의 수치스런 일이었다.
보기 좋은 몸매, 잘 생긴 용모, 고단수의 무술 실력은 당시 청와대 경호원의 자격 요건인 양 알려져 왔다. 경호원 제1의 덕목은 그러나 그런 외모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던져 피경호인의 위험을 막아내는 성실성과 사명감이다.
여고생 합창단원 피격의 진상
그러나 그날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은 사건 현장의 녹음을 통해 재생한 범인 체포 전후의 상황이다.
ㆍ제1탄 오발 후 17초:『가만 계세요』(경호원이 연단 뒤에 숨은 대통령에게)
ㆍ19초:『가만히 계세요』(대통령에 대한 경호원의 당부인 듯함)
ㆍ20초:『잡았니?』(대통령의 물음인 듯함)
ㆍ21초:『예』(경호원의 답변인 듯함)
ㆍ22초:『사모님이--』(경호원의 말인 듯함)
ㆍ23초:『탕』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로부터 제6탄이 날아와 합창단석에 있던 여고생 장봉화양(당시 18세)의 머리에 명중했다. 합창단석에서는 여학생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장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누가 제6탄을 발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범인은 이미 제압된 뒤였다. 이것은 경호원 쪽에서 잘못 쏜 총탄이었다.
선발 경호요원 김씨는 단상(무대) 커튼 뒤편에서 근무 중이었다. 그는 『탕』 하는 총성과 군중의 웅성거림을 듣고, 장막을 헤치고 무대로 뛰쳐 나왔을 때는 범인이 통로 중간쯤에서 단상을 향해 사격 중이었다. 朴鐘圭 실장의 권총에서 난 두 발 정도 총소리를 듣고 범인을 향해 총을 겨누게 되었다고 한다(필자 注-박종규 실장의 총격은 녹음돼 있지 않음).
김씨의 증언-.
『대통령 쪽으로 이동하여 방호하기에는 어중간한 위치여서 사격 제압을 선택했다. 사격 후 명중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으나, 범인이 잠시 후 쓰러져 실탄 피격에 의한 것으로 착각했다(실제는 민간 참석자의 발에 걸려 넘어짐). 정확한 사격이 되지 않아 범인 제압에 실패하고 참석자(필자 注-장봉화양)를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마음에 한이 된다』
ㆍ1분37초:장내 소란은 계속되었다. 사회자가 『앉으세요, 일반시민들 앉으세요』라며 장내 정리에 나서던 순간이었다. 『탕』 제7탄의 총성이 들렸다. 제7탄은 극장 내부 천장을 뚫었다. 경호요원의 誤發인가? 소란 진정을 위한 의도적 발사인가? 아직 명확하지 않다.
陸여사가 후송된 후 朴대통령은 보리차 한 모금을 마신 다음, 중단됐던 경축사를 끝까지 낭독했다. 이렇게 朴대통령은 책임과 오기의 인물이었다. 陸여사는 이 날 저녁 7시 서울대학부속병원에서 서거했다.
극장 1층 내부에는 경호실 요원 7명(단상 5명과 무대 뒤편 2명)과 경찰 61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장 근무자 사이엔 상황 전파가 이뤄지지 않아 초기 대응은 전무했다. 극장 내부를 제외한 현장 근무자들은 저격 사건 발생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 고함 한 번만 쳤더라도 단상 밑 逆監視(역감시) 수행 근무자가 전기 스위치 조작으로 강한 조명 광선을 내보내 범인의 조준 사격을 원천 봉쇄할 수 있었다.
그 날 극장 내부 좌석 근무를 맡았던 경찰관들도 휴식 없는 잇단 행사 차출로 지쳐 있던 상태였다. 이들(서울 중부서 직원)은 하루 전날(8월14일) 여의도에서 개최된 미국의 유명 목사 빌리 그레이엄의 부흥회에 「행사 병력」으로 동원되었다가, 8월15일 새벽에 이동하여 국립극장 내부에 배치되었다.
비표 없는 文世光, 너무 쉽게 현장 침투
이제는 범행 당일 文世光의 현장 잠입 과정, 그리고 경호실과 경찰의 경호 태세를 되짚어볼 차례다. 범인은 너무 쉽게 범행 현장에 접근했다.
▲8월15일 새벽 2시경:文世光은 조선호텔 1030호 객실의 거울 앞에서 밤 늦게까지 실탄을 장전하지 않은 권총으로 조준-격발 연습을 끝낸 후 잠자리에 들었으나, 이 시각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전 6시경:조선호텔 커피숍에서 그는 커피와 케이크를 먹었다. TV방송 아침 뉴스를 통해 국립극장에서 朴대통령 참석하에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이 시각부터 3시간 동안(06:00~ 09:00) 경찰 병력은 국립극장 반경 2km 이내에 있는 남산 및 응봉산에 대한 제2차 산악 수색을 실시했다. 남산과 응봉산에 대한 제1차 수색은 하루 전날 오후 4시간 동안(13:00~17:00) 실시되었다. 이틀에 걸쳐 산악 수색에 동원된 연인원은 1백28명이었다.
▲오전 7시경:文世光은 호텔 프론트에 『국립극장에 갈 것이니 고급 승용차를 준비해 달라. 출발시간은 9시』라는 내용의 전화 통화를 했다. 잠시 후 프론트에 다시 전화를 걸어 『곧 출발할 테니 빨리 승용차를 준비하라』고 재촉했다. 그만큼 그는 초조했다. 이 시각(07:00)부터 경찰은 국립극장 주변 고층 건물 옥상을 봉쇄했다.
▲오전 8시30분경:청와대 경호2과 선발 요원 19명이 국립국장에 도착하여 근무 지점에 각각 배치되었다.
▲오전 8시40분:대형 포드 M-20 승용차(서울 2바 1091호 렌터카)가 조선호텔 정문 앞에 도착했다. 文世光은 실탄 5발이 장전된 38구경 권총을 허리춤에 감춘 채 즉각 승차하여 국립극장을 향해 출발했다. 차내에서 그는 운전사 黃(황)씨에게 일찌감치 차비 1만원을 지불했다. 그리고는 『하차 때 먼저 내려 밖에서 문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1974년 8월 현재 쌀(혼합미) 60kg의 가격이 7천4백40원으로 1만원이라면 쌀 1가마 값을 웃도는 금액이었다. 요금이라기보다는 VIP 대우를 유도한 뇌물이었다. 차량 이동 중 그는 왼쪽 옆구리에 손을 가만히 넣어 권총의 공이치기를 뒤로 제쳐 놓았다.
▲오전 8시59분경:「승차 입장 카드」가 부착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文世光이 탄 외제 대형 승용차는 아무런 검문검색도 받지 않고 극립극장 정문을 통과하여 구내로 진입했다. 대형 차량 탑승자에 대해선 예외적으로 대우한 경호 조치였다. 비표 없는 차량에 대해선 일단 정차시켜 탑승자의 초청장과 신분증을 확인해야 했다.
▲정문 근무 경호실 요원은 文이 정문을 통과했을 때 정위치에 배치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경호2과 직원의 행사장 도착 완료 시각이 9시였기 때문이었다. 정문 주변 경찰 근무자들은 당일 8시7분에 배치되어 있었음에도 범인 탑승 차량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이들은 경호 근무보다 교통 혼잡 방지에 더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일본 대사와 만나기로 한 일본인으로 행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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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여사 피격 날의 박정희
陸여사 피격 직후의 대통령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저격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가고 공식 행사가 끝난 직후, 국립극장 관장실에서는 이런저런 긴장된 대화가 오갔다.
관장실에는 대통령을 위시하여 丁一權 국회의장, 민복기 대법원장, 金正濂 비서실장 등이 배석했다.
대통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용을 좀 설명해.”
“….”
좌중에는 침묵만이 흘렀고, 대통령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관장실 입구 바로 앞에 박 실장이 멍하니 서 있었다. 상기된 얼굴로 하늘만을 응시한 채 누가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누가 와서 대통령의 말을 전해도 말이 없었다.
“각하께서 상황 설명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
대통령은 몹시 궁금한 듯 자세한 상황을 알고 싶어했다.
“뭘 좀 알아봤나?”
한 비서관이 말했다.
“알아본 것은 없지만 궁금하시다면 저라도 본 대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래, 말해 봐.”
“첫 번째 총성이 울리자, 단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피하고 박종규 실장이 뛰어나가 즉시 응사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 각하의 허리춤을 잡아 연설대 밑으로 피하게 한 다음, 영부인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대통령은 간략한 설명을 들은 후, 영부인의 안부는 묻지도 않고 대뜸 이런 말을 했다.
“객석은 어두워 잘 안 보일 텐데 그 곳에다 쏘게 되면 시민들이 다치잖아.”
“응사시에는 별 일이 없었습니다. 영부인은 아마 지금쯤 서울대학병원에 도착하셨을 것입니다.”
“그럼 다음 행사장으로 갑시다.”
대통령의 다음 행사장, 즉 지하철 개통식으로의 이동 지시가 떨어지자, 주변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만류했다.
“각하! 그것은 안 됩니다. 역사에 보면 오스트리아 황태자 살해 사건 때도 암살조가 세 팀이 있었습니다. 제1조가 던진 폭탄이 황태자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게 되자, 제2조가 다른 장소에서 결국 황태자를 살해하지 않았습니까. 측근의 만류를 무시하고 예정대로 두 번째 행사장에 참석했다가 결국 폭탄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부하들은 제2의 암살조가 또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가면서 진언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런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질 않았다.
“일단 일정이 잡힌 공식 행사이니만큼 가봐야 되지 않겠는가.”
“각하께서는 서울대학병원으로 가시고, 지하철 개통식에는 정일권 국회의장이 대신 참석하는 게 좋겠습니다.”
목표물이 대통령이니만큼 다른 사람은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래도 개통식에 가봐야지.”
그러면서 대통령은 자동차에 올랐다가 망설이듯이 다시 말했다.
“아무래도 집사람이 걱정되니까 내 대신 정 의장께서 참석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청와대에서 김영원 의전비서관은 어딘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미 8군사령관한테서 방금 전화가 왔었는데, 군의관 팀이 수술 준비를 완료했다고 합니다. 총상을 당하셨다고 하니 일반외과 의사들보다 야전 군의관들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긴급 요청을 세 번이나 해왔습니다. 그래서 서울대학병원에 연락을 취했더니만 거절을 해 결국 미 군의관 팀과 연결을 못 시켰습니다.”
훗날 ‘서울대학병원측의 의료 미스’라는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게 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서울대학병원에서 필요 이상으로 과다한 수혈을 하여 육 여사의 심장이 오히려 과부하 현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 후 서울대 수술팀에게 일련의 문책을 시도하려는 측근들의 행동을 본 대통령은 “그러지 말라”며 도리어 그 사람들을 나무랐다.
“오죽 못나면 동족에게 죽겠어요”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직후 어느 날.
비서진들은 대통령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대통령은 이때 돌아간 아내에게 생전에 못다 준 정 때문에 애석해 했다.
“내가 젊어서 지만이 엄마한테 잘해 준 것이 하나도 없어. 지금 이 나이가 되어 좀 잘해 주려고 했더니 세상을 떠났구먼. 자네들도 나같이 후회를 안 하도록 하시오. 세상이 이렇게 마음대로 안 되는군. 내 내자 나이가 마흔아홉인데 아무리 몹쓸 병에 걸렸더라도 몇 년은 더 살 수 있지 않았겠나.
그런데 그렇게 죽은 것도 본인 말이 씨가 된 것 같아. 언젠가 내자가 외출할 때 내가 ‘나도 위협받고 있으니 당신도 조심하시오’라고 했더니, 내자 말이 ‘국민에게 당하면 복이지요. 오죽 못났으면 자기 국민에게 저격당하겠어요. 걱정 마세요’라고 하더니 일본 사람도 아닌 한국 사람에게 죽었구먼.”
육영수 여사는 접견할 때마다 방문을 10㎝쯤 열어 놓고 있었다. 남녀부동석이라는 차원에서였다. 비서관들을 대하는 영부인의 언행도 한 번도 과하게 사용한 적이 없었다.
특히 접견 전에는 육 여사의 독특한 신고가 있었는데, 대기하고 있는 비서관에게 호명을 하거나 노크를 하지 않고 단지 접견실 주위를 서성대면서 혼잣말을 하곤 했다.
가령 “00 비서관이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셨는데…”라는 식의 말을 반복하면서 접견실 문 앞을 서성거렸다. 이때 해당 비서관이 영부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인사를 하면, 그때서야 대화가 이뤄지곤 했다.
영부인은 또 절대 밀폐된 방에는 직접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그만큼 품행이나 언행이 방정하였다.
직접 쓴 국군의 날 연설문
1974년 10월 1일.
이날 국군의 날 행사에서 대통령이 한 훈시는 밑에서 올린 초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통령이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쓴 연설문이다. 이 연설문에는 통일과 안보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전략) 우리 국군의 역사는 건군 초기부터 공산 침략자들과의 투쟁의 기록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도 그들과 투쟁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또 우리들의 후손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며, 일보도 양보할 수 없는 생존 투쟁입니다. 이 투쟁은 공산 침략자들이 우리를 침략하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 투쟁에서 우리가 이겨야만 비로소 우리는 참다운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고, 평화와 번영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각박한 현실이 오늘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고도 이를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루 빨리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들이 보는 한반도의 정세와 안보관은 현실을 도외시한 엉뚱한 판단으로서 위험천만한 사고방식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세대에 부과된 민족적인 사명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역사적인 소명이기도 하기에 기어코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리고 피해서도 안 됩니다. 또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민족적인 대과업을 어떻게 완수해 나갈 것인가?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 일부에서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색맹적이거나 인식 부족의 시국관을 가지고 무책임한 현실 비판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가 안보와 국민 총화, 그리고 또 유신 체제까지도 의식적으로 왜곡하여 해석하고,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작금 우리 사회 일각에서 또다시 유신 체제에 도전하려는 일부 인사들이 민주가 어떠니, 자유가 어떠니 하면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매우 중대시하고, 이를 직시하고 있습니다.
유신 체제는 공산 침략자들로부터 자유를 지키자는 체제입니다.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작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이를 희생할 줄 알고, 또 절제할 줄 아는 슬기를 가져야만 비로소 큰 자유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노리고 있는 침략자들이 우리 내부에 어떠한 허점이 생기는 것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도 남과 같이 달고 맛있는 것을 다 먹고 다 누리려고 한다면, 또 그러면서도 자유는 자유대로 지키겠다고 한다면, 너무나 세상을 안이하게 생각하는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렇게도 많은 도전을 받고, 그렇게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또 지금 이 시각에도 그들의 도전이 계속되고 있는 데도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략)
오늘의 세대에 사는 우리들은 이와 같은 극좌 모험주의자들과 앞으로도 끝없는 대결을 지속하면서, 또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이 과업을 수행하는 데에도 반드시 거쳐야 할 몇 단계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 첫 단계가 한반도에서의 평화 정착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합니다. 평화 정착이 선행되지 않으면 통일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연목구어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북 불가침 협정부터 먼저 하자고 했습니다. 이것이 된 후에는 남북이 평화 공존을 해나가면서 서로 대화도 하고, 교류도 하고, 그리고 가능한 분야부터 협력도 해나가자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유엔에도 같이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나가다가 여건이 성숙되면 통일 문제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자는 것입니다.
현재 여건으로 보아 이 방법 외에 다른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우리의 이런 제의를 모조리 거부해 왔습니다. 지금 이런 판국에 당장 남북연방제니 대민족회의니 하는 것은 음흉한 딴 생각이 있어서 하는 또 하나의 기만 술책입니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대와 앞으로 벅찬 민족적 대과업을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비상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그들과 대화를 지속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노력과 병행하여 우리는 총력을 경주하여 국력 배양에 힘써야 합니다. 평화를 유지하는 최대의 무기는 국력입니다. (중략)
그리고 또 국력 배양을 촉진하고 가속화하는 최선의 길은 유신 과업의 성공적인 수행밖에 딴 길이 없다는 것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미국을 향한 격정 토로
1974년 10월 2일.
대통령은 맏딸 근혜 양과 함께 청와대 출입기자단에게 오찬을 베풀었다. 대통령과 출입기자단 사이에 사석에서 이루어진 대화 내용은 기사화하지 않기로 이른바 신사협정이 맺어져 있었다. 이날 나누었던 대화 내용 역시 당시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근혜 양이 먼저 이런 말로 인사를 했다.
“어머님께서 여러분을 종종 초대하셨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다 아시는 것처럼 그 동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초대하지 못했습니다. 어저께 아버님께 말씀드려 오늘 여러분을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육여사에 대한 추모담이 오갔으며, 국민으로부터 위로 편지가 하도 많아 모두 회답을 못하고 있으며, 근혜 양이 어머님 옷을 그대로 입는다는 등의 얘기에 기자들은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 후 화제는 정치 문제로 옮아갔다.
대통령은 당시 미국의 태도에 대해 상당히 언짢아했었는데, 포드 미국 대통령의 내한에 앞서 구속 인사 석방설에 대한 李鍾求 기자의 질문을 받자 대통령은 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일축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미국의 포드 대통령이 곧 내한할 텐데 방한 전에 구속 인사를 석방한다는 설이 나도는 모양이지요. 가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포드가 오는 데 무슨 사전 조건이 필요합니까? 포드가 내한하기 이전에 구속 인사를 석방한다는 것은 국제 관례에도 없는 일입니다.”
미국에 대한 대통령의 감정 표현이 계속 이어졌다.
“미국이 군사 원조를 가지고 우리에게 압력을 가한다는 보도가 나도는데, 사실상 미국의 군사 원조는 별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닉슨 대통령과 약속했었던 ‘군 장비 현대화’ 정도가 고작입니다. 그것도 그들의 의회 사정으로 인해 연도별 군사 원조 비용이 현재 실질적이지 못합니다. 작년만 하더라도 미국의 원조가 480만 달러에 불과했었는데, 이런 액수는 그저 주니까 받을 뿐이지 안 줘도 큰 지장은 없어요. 우리도 내년도 국방 예산을 높게 책정해 놓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대통령의 어투는 매우 당당하고 고압적이었다. 무기와 관련된 대통령의 복안이 이어졌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무기도 생산하고, 아울러 필요한 것이 있다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사들여 올 계획입니다.”
대통령은 또 “자주국방의 토대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곧 그렇게 이루어진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논평을 했다.
“우리의 당면 과제는 金日成인데, 그거야 일 년이면 족하지 않겠어요. 진짜 문제는 일본입니다. 우리보다 경제가 조금 앞섰다 해서 지금 까부는데, 그럴 때마다 일본과의 경제 싸움에서 필히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지더군요.”
대통령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발언들이 계속 이어졌다.
“미·일 양국의 일부 지도자들과 일부 언론들이 한국에 대해서, 특히 우리의 인권 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데 심히 마땅치 않습니다. 일본의 경우, 안보 파동 때 그들이 취한 좋지 않은 행동도 있으면서 남의 나라에 대해 간섭하는 것은 이상한 일 아닙니까. 미국도 마찬가지예요. 각 주의 방위군을 동원해 시위대에게 발포한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대체 어떻다고 인권 운운해요!”
대통령은 이 대목에서 언성을 높여 격렬한 감정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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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택 당시 정보부 수사국장 증언
朴대통령 양복에 묻은 피
―1974년 8월15일 陸英修 여사 피격사건도 조사하셨죠.
『朴대통령은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타고난 대담한 성격 때문인 것으로 봅니다. 陸여사가 저격당한 1974년 8·15 경축행사 때도 바로 그랬습니다. 陸여사가 급히 들려 나가는 것을 본 뒤에도 저격 사건 직전까지 읽었던 경축사 문장에서 한 줄도 겹치지 않고 바로 계속해 읽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연설을 계속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목소리에도 아무런 변화 없이 式辭를 다 마쳤습니다.
李龍澤 정보부 수사국장은 사무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장충동 국립극장으로 달려갔다. 朴대통령은 관장실에 태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李국장이 가까이 가서 보니 양복 왼쪽 어깨 쪽에 피가 한 방울 묻어 있었다. 검은색 양복이어서 마치 물이 튄 것처럼 보여 손가락으로 훔쳐 보니 피였다. 일단 朴대통령이 어디 총을 맞은 곳이 없는가 싶어 '각하, 괜찮습니까」하니 「난 괜찮아」라고 했다.
중부경찰서장이 범인의 신병을 인수한 뒤 허벅지에 총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그를 메디컬 센터(을지로 6가)에 보내 치료를 받게 했다. 李국장이 메디컬 센터에 갔더니 경호실의 정보처장이 범인의 여권을 들고 나오다가 마주쳤다. 정보처장은 「범인은 일본인이다」라고 말했다. 李국장이 압수한 여권을 보니 외국인 등록증이 나왔고, 이름과 함께 「조선인」으로 명기돼 있었다. 李국장은 병실에 들어가 文을 향해「너 한국 사람이지」하고 물었으나 알아 듣지 못하고 일본말로 물으니 「그렇다」고 답했다.
李국장은 朴대통령이 陸여사가 수술을 받고 있던 서울大 병원으로 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 「각하, 죄송합니다. 범인이 일본인으로 첫 발표가 잘못 나갔습니다」라고 사과했다. 朴대통령은 즉시 朴鐘圭 경호실장에게 경호 실패에다 범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을 질책한 후 즉시 수사를 정보부에 넘기라고 말했다. 李국장의 지휘하에서 정보부 수사관들이 文世光을 취조하니 계속 「仁川이 어디냐」고 묻는다고 해서 저격 후 인천으로 오라는 지령을 받은 것으로 추정됐는데, 文은 이에 대해 끝내 진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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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운동권 출신들을 공직사회에서 추방하자!
盧武鉉정권안팎에 있는 좌익운동권(소위 主思派) 출신들이 작당하여 한국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들은 집권한 뒤에도 金日成을 추종하고 대한민국에 반대하던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온갖 거짓, 선동, 부패, 사기, 반역적 행태를 보이면서 대한민국의 국가운용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한국 안보의 근간인 韓美동맹을 파괴하고 있다.
韓美동맹이 무너지면 한국은 핵무기로 무장한 金正日 정권의 인질로 전락하여 국가안보와 국가이익과 국가의 富를 갖다바치게 될 것이다. 韓美동맹이 무너지면 무역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도 무너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지고 있다. 결국 한 줌도 안되는 정권 안팎의 좌익운동권 출신들 때문에 4800만 국민들의 생활과 생계가 위태롭게 된다. 우리는 盧정권이 공직사회로 진출한 좌익운동권 출신들을 공직사회에서 영구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브란트 서독수상도 東獨에 대한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공산주의 경력자의 공직자 취임 금지조치부터 단행했었다.
李光宰 의원 등 좌익운동권 출신들은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서 손가락을 자른 행위까지도 민주화운동으로 조작하는 등 진실이 밝혀져도 반성은커녕 철면피적인 거짓과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좌익운동권 출신들이 주도하는 정부내의 각종위원회는 대통령을 배경으로 삼아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법률에도 없는 권력남용을 통해서 이 나라의 운영시스템과 法治주의를 파괴하고 있다. 盧대통령은 左翼운동권 출신들을 일종의 혁명小組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이다. 東北亞위원회란 자문기관은 국방부에 대해서 잠수함 통신 시설 건립 중단을 요구하는 이상한 행태까지 보이고 있다. 국군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단체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越權을 할 수 있는가. 이런 越權을 부추기는 것이 盧대통령인가. 일개 자문기관의 書記에 불과한 李鍾奭이란 자는 어떻게 해서 안보업무의 기획조정을 한단 말인가. 對北굴욕정책과 對美적대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李鍾奭의 행위는 법률의 위임이 없는 일로서 원천무효가 아닌가.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몸안으로 들어온 좌익운동권 출신자들의 명단을 알 권리와 의무가 있다. 정부는 이들의 身元과 前歷과 범죄사실과 轉向여부를 공개하라. 반성과 轉向이 없는 좌익 공무원들을 공직사회에서 추방하라! 좌익운동권 출신들이 죽어야 대한민국이 산다!
다큐멘터리 / 한국의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⑥ 朴正熙 저격, 陸英修 피살
魔彈의 射手 文世光의 秘密
당시 정보부 수사관들의 최초 고백
반항심이 충만한 재일동포 청년 文世光의 영웅주의적 심리를 포착한 조총련 정치 간부 金浩龍은 그를 부추겨 「민족해방을 위한 거사」로 유도한다. 수설 「자칼의 날」을 읽고 더욱 고무된 文은 소설 주인공을 모방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1974년 8월15일 허술한 경호망을 뚫고 국립극장에 들어간다. 극장로비에서 朴正熙 대통령에게 가까이 다가간 文은 다른 사람들이 다칠 수 있다는 일말의 양심 때문에 저격을 포기한다. 그 대신 文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권총을 쏘아 「청와대 내의 야당」이었던 陸英修 여사를 사망케 한다. 陸여사의 죽음은 朴대통령이 내면에서부터 허물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북한은 이 테러리스트를 통해 애초 목표의 반을 달성한 셈이 되었다.
●소설 「자칼의 날」에 심취한 文世光
●朴鐘圭 경호실장은 총을 쏘지 않았다
●日本경찰이 수사협조를 하지 않은 것은 金大中 납치사건 때문
●文은 북한과 조총련의 조종을 받았다
李政勳 월간조선부 기자
드골과 박정희
「1972년 10월17일 밤 10월유신 선포.
朴대통령은 당초 일본 순방계획을 세워놓고 朴鐘圭 경호실장과 나(鮮于煉)를 포함한 선발대를 일본에 보내 의전 절차의 협의를 완료한 상태였다. 이날 밤 8시 각의를 끝내고 대통령이 나를 불렀다.
『수고했네. 내가 드골 헌법을 상당히 참조했는데 내가 왜 드골 헌법을 중요시하느냐 하면 행정부가 국회로부터 큰 방해를 받지 않고 정책을 시행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 있어 드골 헌법을 중요시한 거야. 이 점을 한태연과 갈홍기한테도 강조했었어』」
〈월간조선 1993년 3월호 1백61쪽, 鮮于煉씨의 「집중연재·朴正熙 육성증언 上」에서〉
영국의 작가 프레드릭 포사이스가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암살을 소재로해서 1971년 출판한 소설 「자칼의 날(The Day of The Jackal)」(도서출판 대성 발행·1992년·김희선 옮김) 62쪽에는 반(反)드골조직인 OAS의 지도자 로댕이 영국의 암살전문가인 자칼을 불러놓고 하는 말이 나온다.
「『현재 프랑스는 독재자(드골)에게 지배되고 있소. 그는 조국에 상처를 입히고 그 명예를 더럽혔소. 그래서 그의 정권을 타도하고 프랑스를 진정한 프랑스 국민의 손에 돌아가게 하려면 우선 그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소. 우리들은 이미 여섯 번이나 그의 암살을 기도했으나 그중 세 번은 계획 단계에서 탄로가 났고 한 번은 거사 전날 적에게 발각되고 말았소. 그 뒤의 두 번은 습격에는 성공했으나 총알이 빗나가고 말았소. 그래서 우리들은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프로를 고용해서 이일을 부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소』」
1944년 8월25일 한창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파리는 나치 독일의 치하를 벗어났다. 자유 프랑스는 이 날을 해방기념일로 정해 경축해왔다. 드골은 매년 이날 행사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참석했다. 소설 「자칼의 날」에서 자칼이 드골 대통령을 겨냥하는 날은 1963년 8월25일 제19회 파리 해방기념일이다. 30대 중반의 자칼은 훈장을 단 군용외투를 입고 목발을 짚은 늙은 상이용사로 위장해 식장을 뚫고 들어간다.
1974년 8월15일은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이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이날 오전 8시쯤 조선호텔 안내 데스크 金문희씨(당시 30세)는 1030호에 투숙한 일본인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로부터 『장충단 국립극장에 가야 하니 리무진 한 대를 불러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金씨는 『호텔 전용차가 없다』고 했다. 요시이는 『중요한 손님을 모시고 갈 일이 있다. 30분만 전세내자』고 사정했다.
金씨는 도어맨 嚴성욱씨에게 요시이를 연결시켜 주었다. 요시이는 검은색 싱글에 금테안경 차림으로 머리를 단정히 뒤로 빗어넘긴 모습으로 나타났다. 30대의 신사로 보였다. 嚴씨는 요시이에게 택시를 타고 가라며 마침 호텔에 들어온 파레스호텔 소속의 콜택시(서울 2바 1091호. 운전사 黃壽東·당시 32세)를 소개했다.
이 차는 70년식 포드 20M으로 당시로서는 고급승용차였다. 요시이는 嚴씨를 통해 운전사 黃씨에게 『30분으론 국립극장까지 갔다 오는 시간도 안되니 한 시간으로 하자』고 말하며 택시에 올라탔다. 5천원권 두 장을 黃씨에게 내민 요시이는 일본말로 뭔가 지껄였다. 黃씨가 서툰 일본어로 『일어를 잘 모른다』고 하자 요시이는 입을 다물었다. 차는 퇴계로를 거쳐 오전 9시께 국립극장에 도착하였다.
『주한 日本대사관 직원인데…』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장에 차를타고 외곽경호지역인 식장 앞마당에 들어가려면 요인(要人)일지라도 「승차입장」이란 비표를 차 앞 유리창에 붙이고 있어야 한다. 포드 20M승용차에는 「승차입장」이란 비표가 없었다. 그러나 이 차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국립극장 마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黃씨는 뒷문을 열어 요시이를 내리게 하고 주차장을 가리키며 기다리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요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 번호판을 살펴보고 국립극장쪽을 향했다. 黃씨는 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요시이는 시가를 꺼내 입에 물고 극장 남쪽의 일반인 통용문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핵심경호지역인 국립극장의 경호도 엉성했다. 「광복절」이라고 쓰인 비표(리본)를 가슴에 달지 않은 사람들도 들어갈 수 있었다. 사진기자의 경우 경호 담당자들이 사진가방을 열어보고 사진기의 셔터를 눌러보는 게 관례인데도 그러지 않았다. 주한 일본대사관 직원을 자칭한 요시이는 비표가 없었지만 국립극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경호가 허술했던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 朴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국립극장에서 열린 연극 「성웅 이순신」 공연에서 경호원들은 외교관 부인들의 핸드백까지 뒤져보는 수색을 했다. 공연이 끝난 후, 「과잉경호」라는 불만이 터져나오자 朴대통령은 朴鐘圭 경호실장을 불러 야단쳤다고 한다.
이날은 마침 다수의 경호원들이 교체된 날이어서 경호원들끼리의 손발이 잘 맞지 않았던 것도 허술한 경호의 한 원인이었다. 때문에 저명인사와 외국인들은 비표 없이 구두로 자신의 신분만 말하고도 극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극장 로비에 들어선 요시이는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경호요원들이 실탄을 장전하는 등 본격적인 경호에 돌입했다. 요시이는 경호원들에게 다가가 일본말로 『일본대사관 일행과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일행이 식당(극장 안의 객석을 가리킴) 안에 들어갔느냐』고 물었다. 일본어 해독 능력이 약한 경호원들은 『대통령께서 곧 입장하시니 다른 로비로 가라』며 그를 2층 로비로 안내했다. 그러나 요시이는 안내한 경호원을 따라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요시이가 먼저 말을 건 것을 로비를 떠나라고 할까봐 미리 선수를 친 것이었다.
경호원은 마침 1층 로비에 있던 중부경찰서 정보과장 崔宗煥 경정(당시 37세)에게 그를 인계했다. 요시이를 인계받은 崔경정은 요시이를 일본대사관 직원으로 완전 오인하고 악수까지 나누었다.
극장 로비에서의 저격은 포기
10시3분쯤 朴正熙 대통령과 陸英修 여사 일행이 국립극장에 도착, 박수를 받으며 입구 로비를 지나갔다. 요시이는 朴대통령 일행에 2~3m 거리까지 접근했다. 한 경호원이 앞으로 나오는 요시이를 제지했다.
(범행 후 조사과정에서 文世光으로 밝혀진 요시이는 『이때 朴대통령을 저격하려고 했으나 朴대통령이 박수치는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기에 포기했다』고 말했다.
文을 수사했던 전직 중앙정보부 요원은 『文은 어린아이들이 다칠까봐 사격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요시이는 즉시 객석으로 들어가는 좌측문을 향했다. 경비경찰이 『비표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며 제지했다. 요시이는 손짓으로 崔경정을 가리키며 일본말로 『저 사람이 허락했다』고 말했다. 崔경정은 경비경찰에게 일본인의 입장을 허가하라고 지시했다. 요시이는 맨 뒷열인 B열 2백14번 좌석에 착석하였다. B열과 C열 사이의 통로에서 안쪽으로 세 좌석 들어간 자리였다. 대통령이 연설한 연단과는 약 30m쯤 떨어진 곳이었다.
이날의 경호상태가 얼마나 엉성했던가는 광복절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국립극장에 갔던 한국일보 사회부 金基炅 기자가 1974년 8월16일자 한국일보에 쓴 기사에 잘 나와 있다. 金기자는 이 기사에서 식장이 완전 정리된 것은 9시55분께였다고 적고 있다.
10시6분쯤 대통령 내외의 입장을 알리는 장내 방송이 있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손을 흔들며, 陸英修 여사는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나와 무대 중앙의 좌석에 앉았다. 좌우로는 安椿生 광복회장, 丁一權 국회의장, 閔復基 대법원장, 梁鐸植 서울시장이 착석했다. 뒤쪽에는 金正濂 비서실장, 曺相鎬 의전수석, 朴鐘圭 경호실장이 자리잡았다. 朴鐘圭 경호실장은 무엇인가를 감싼 흰 종이뭉치를 들고 있는 점이 특이했다. 무대 바로 아래쪽에는 서울시향이 위치해 무대와 객석을 자연스럽게 분리시키고 있었다.
10시7분 국민의례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무대 뒤쪽에 걸린 대형 태극기를 향했다. 무대 뒤쪽에 걸린 대형 태극기를 향했다. 무대 위의 요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돌아서야 했다. 朴鐘圭 경호실장도 등을 돌려 태극기를 행했다. 한 가운데 선 朴대통령의 등이 무방비라고 느껴질 만큼 유난히 넓어보였다.
국민의례는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순으로 10시9분45초까지 2분45초간 계속되었다(기자는 KBS 방송자료 센터 金龍石 부주간의 협조로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을 생중계한 KBS의 비디오 테이프를 시청할 수 있었다. 기념식장의 상황묘사와 시간은 이 테이프를 보고 정리한 것이다).
朴대통령의 기념사가 시작된 것은 정확히 10시10분20초였다. 가슴 높이까지 오는 연단 앞에 선 57세(당시)의 朴대통령은 카랑카랑하고 무미건조한 특유의 목소리로 기념사를 읽기 시작했다. 朴대통령의 모습을 찍기위해 3, 4명의 사진기자가 무대 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퇴장한 한국의 사진기자들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선열들의 업적을 거론하는 것으로 시작된 연설은 6·25전쟁을 비롯해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북한 공산집단의 책동을 경계하며 평화적으로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기념사를 읽는 동안 朴대통령은 원고만 바라볼 뿐 객석쪽으로는 눈길 한번 보내지 않는 깐깐한 모습이었다.
연설이 시작된 8, 9분쯤 되었을 때 객석에 있던 사진기자들이 경호원의 안내를 받으며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오전 11시부터 朴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청량리 지하철역에서 거행하기로 한 역사적인 지하철 1호선 개통식 취재 준비를 위해서였다. 밖으로 나가지 않은 유일한 한국 신문의 사진기자는 조선일보 任熙淳 기자(현 문화일보 부국장 겸 사진부장) 한 명뿐이었다.
任기자는 1층 맨 뒤쪽 가운데에서 기념식을 합동으로 생중계하는 텔레비전의 카메라맨과 함께 있었다. 그외 미국 방송사인 CBS의 카메라맨과 UPI통신의 기자 등 외국 언론의 기자들과 한국 언론의 취재기자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음은 任熙淳씨의 말이다.
『사진기자들이 나간 것은 사진을 찍어야 할 별다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석간신문의 경우는 마감시간이 가까웠기 때문에 나간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은 지하철 1호선의 개통식이 있을 예정이었기에 미리 준비하려고 나간 것이었습니다. 지하철 개통식은 당시 거의 모든 국민들의 관심 사항이었으니까요.
조선일보는 조간이라 마감시간에 여유가 있었고 또 지하철 개통식에는 다른 기자가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판문점을 출입했기 때문에 남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날 혹시 朴대통령의 대북성명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연설문을 끝까지 들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10시25분24초, 朴대통령은 『조국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룩되어야 합니다. 그 원칙은…』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딱총을 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B열 맨 뒤편 2백14번 좌석에 앉아 있던 요시이가 왼쪽 허리춤에 감춘 권총을 뽑다가 방아쇠를 잘못 건드려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시키는 소리였다. 朴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는 마이크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인 듯 텔리비전에서 나오는 총소리는 그리 크리 않았다. 고함도 비명도 전혀 울리지 않았다.
돌연한 銃聲
10시25분30초, 朴대통령은 첫번째 평화통일 원칙을 말하고 있었다. 또 한 방의 총성이 울렸다. 먼저보다는 훨씬 큰 소리였다. 31초, 32초 숨돌릴 틈도 없이 연달아 총소리가 울렸다. B열과 C열 사이 통로로 뛰어나온 요시이가 잇달아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비명과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朴대통령은 반사적으로 연단 아래로 몸을 숙였다. 중심을 잃었기 때문에 연단 오른쪽 아래로 朴대통열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주: 연단 오른쪽이란 표현은 텔리비전 화면을 보는 입장에서의 오른쪽이다).
사건 후 실시된 현장검증에서 범인은 연단으로부터 20.9m 떨어진 지점에서 두번째 탄환을 발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탄환은 朴대통령이 연설하던 방탄 연단 왼쪽 3분의 2 높이 지점을 맞추었다. 세번째 탄환은 불발되어 약실 안에 남아 있었다. 네번째 총알은 연단으로부터 14.2m, 陸여사와는 대략 18.2m 떨어진 곳에서 발사되었다. 이 탄환은 陸여사의 오른쪽 머리를 정확히 관통해 약 9시간 뒤 절명케 했다. 다섯번째 탄환은 관객의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발사되었다. 연단으로부터 8.3m 떨어진 곳에서 발사된 이 총알은 무대 뒤 대형 태극기의 좌측 중앙을 맞춘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섯번째 실탄을 발사한 요시이는 서울시향과 객석을 가르는 칸막이 위에 왼손을 올리고 그 위에 권총을 쥔 오른손을 올린 정확한 권총 사격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이때는 다섯 발의 실탄이 모두 격발된 상태라 더 이상 발사될 총알이 없는 상황이었다.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덮친 것은 이 순간이었다. 요시이는 권총을 서울시향쪽으로 떨어뜨리고 제압되었다. 이 바람에 서울시향 바이올린 연주자 金형묵씨가 얼굴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다.
朴鐘圭 실장은 응사하지 않았다
식장은 텔레비전 중계 때문에 무대위로만 조명이 쏟아졌고 객석은 어두운 상황이었다. 두번째 총성이 울리는 순간 朴鐘圭 경호실장은 이상한 움직임(요시이가 뛰어나오는 모습)을 발견한 듯 고개를 빼며 종이뭉치를 들고 있어섰다. 세번째 총성이 울릴 때는 무대 맨 앞으로 나와 종이와 권총집을 떨어뜨렸다. 네번째 총성이 울릴 때는 오른손에 권총을 거머 쥐고 총소리가 나는 곳을 겨냥했다.
이때 朴실장의 위치는 요시이가 총을 쏜 곳과 陸英修 여사를 잇는 선(線)에서 약간 왼쪽으로 비낀 곳이었다. 네번째 총성과 동시에 여러 사람이 몰려 들어 요시이를 제압하자 朴실장은 겨누었던 총을 쏘지 않고 거두어들였다.
(文世光 사건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은 朴실장이 응사하였다고 보도했으나 기자가 본 TV화면에선 응사하지 않았다. 文이 세 발의 총알〈처음 오발 제외〉을 쏘는데는 불과 2초밖에 걸리지 않았고 이 순간 朴실장이 총을 들고 뛰어나왔기 때문에 생긴 오해로 보인다)
단상 위에 참석한 요인들은 두번째와 세번째 총성이 울릴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쓰러지듯 몸을 낮추었다. 개중에는 자신이 앉았던 의자 뒤로 재빨리 숨는 사람도 있었다. 陸英修 여사의 동작이 가장 늦었다. 세번째 총성이 울리는 순간 오른쪽으로 몸을 낮추기 위해 고개를 숙인 듯하던 陸여사는 뒤쪽으로 빠르게 고개를 제꼈다. 그리고는 서서히 왼쪽으로 머리를 떨어뜨렸다(주: 여기서의 왼쪽 오른쪽은 텔리비전 화면을 바라보는 입장에서의 왼쪽 오른쪽이다).
그것이 당시 49세였던 陸여사의 마지막 움직임이었다(잠시 후 KBS 화면은 카메라맨이 당황했기 때문인 듯 객석의 한쪽 벽면만을 비춘다). 이 무렵 국립극장 밖의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陸여사가 피격된 것과 거의 같은 시간에 비가 쏟아진 것이었다. 이 비는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진 陸여사가 서거할 때까지 u계속 내렸다.
10시25분45초, 또 한 방의 총소리가 울리자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무대 위로 올라간 한 경호원이 뒤늦게 객석을 향해 쏜 총알이 합창단원으로 앉아 있던 D열 86번의 張峯華양(당시 18세. 성동여실고 2학년)을 맞춰 절명케 하는 순간이었다(주: 이 부분은 텔레비전 화면이 한쪽 벽면만을 비춘 상황이라 누가 쏘았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朴鐘圭 실장이 아닌 다른 경호원이 쏘았다는 것은 당시 정보부가 정리한 자료에서 뽑아낸 것이다. 이 사건을 조사했던 중앙정보부는 어느 경호원이 총을 쏘았는지, 왜 뒤늦게 발포했는지에 대해서 조사하지 않았다).
범인이 달려 나간 B열과 C열 사이 통로엔 불순분자의 출현을 막기위해 경찰관 등 12명의 경호담당자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네 발의 총성이 울릴 때까지 아무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특히 요시이가 앉았던 곳에서 한자리 건너인 B열 2백16번 좌석엔 중부경찰서 연회파출소 소속의 金光鉉 순경이 앉아 있었으나 총을 뽑아 들고 나가는 요시이를 제지하지 못했다.
張峯華양을 쏘는 총소리 직후 벽면을 비추던 방송은 『지지』 하는 소리와 함께 중단된다. 이 시간 동안 경호원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 권총을 뽑아들고 대통령을 경호한다. 객석의 하객들은 의자 밑으로 숨느라고 아우성을 친다. 이때 독립유공자석에 앉아 있던 卓금선 여인이 『국모님이…』라고 소리치며 무대 위로 달려올라가 陸英修 여사를 안아 일으킨다. 陸여사는 卓여인과 경호원들에 의해 들려 나가고 張峯華양과 저격범 요시이도 밖으로 들려나간다.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잠시 후 연단 밖으로 朴대통령이 몸을 드러내자 장내에서는 우렁찬 함성과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방송은 朴대통령이 연설을 재개하기 위해 모습을 나타내는 장면에서 다시 이어진다(이때까지 현장에 있었던 任기자와 외신기자들은 채 1분도 안되는 시간동안 바쁘게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들은 세계적인 특종이 되었다).
10시26분20초, 朴正熙 대통령은 예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여러분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라고 운을 떼었다. 당황했거나 놀랐거나 겁먹은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10여초간 아무 말 없이 연설문을 바라보던 朴대통령은 중단했던 기념사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 『다시 한번 우리가 원하는 평화통일의 기본원칙을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그 원칙의 첫번째는…』라면서 연설하기 시작했다.
연설을 재개한 지 4분40초쯤 지난 10시30분부터 朴대통령은 조금씩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연설문만 향하던 눈길을 거두어 객석을 이따끔 쳐다보았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기도 했다. 꼿꼿하던 몸을 조금씩 움직이는 횟수가 많아졌고 말을 빨리 하는 부분도 있었다. 읽은 곳을 다시 읽어 가볍게 더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도 두 군데나 있었다. 그러나 연설문을 건너 뛰어서 읽거나 떨리는 목소리를 내는 실수는 전혀 하지 않았다.
10시35분35초, 연설문을 다 읽은 朴대통령은 『감사합니다』라면서 연단뒤로 한발 물러나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자신의 의자로 되돌아간 朴대통령은 밑에 떨어진 陸여사의 핸드백과 고무신을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 梁鐸植 서울시장이 재빨리 몸을 숙여 고무신과 핸드백을 먼저 주워 경호원들에게 건네 주었다. 의자에 앉은 朴대통령은 曺相鎬 의전수석을 불러 뭔가를 지시했다.
10시34분20초, 장내 아나운서의 말에 따라 성동여자실업고학생들이 일어나 광복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동요된 표정 없이 노래를 불렀다. 광복절 기념 행사가 끝난 것은 10시34분20초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朴대통령은 3부요인 등과 악수를 나누고 무대 뒤로 퇴장했다. 과장된 제스처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朴대통령이 퇴장하자 절대금연인 객석 여기저기에서 뽀얀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장내 아나운서는 『지금 퇴장할 수 없으니 잠시 자리에서 기다려 달라』는 안내 방송을 했다. 청중들은 10시50분부터 한 사람씩 몸검색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黃壽東씨는 12시가 되어 하객들이 다 흩어져도 요시이가 돌아오지 않자 차를 몰고 호텔로 돌아왔다.
밝혀진 文世光의 신원사항
범인은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에 의해 을지로6가에 있는 메디칼 센터로 옮겨졌다. 범인의 왼쪽 허벅지에는 지름 4cm, 깊이 10cm의 관통상이 나 있었고 상처부위는 2도의 화상을 입고 있었다. 병원측은 총알이 들어간 곳에 네 바늘, 총알이 빠져나온 곳에 두 바늘을 꿰메는 간단한 수술을 했다. 오후 2시40분쯤 범인은 앰뷸런스편으로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옮겨졌다.
먼저 몸수색을 하자 오사카 주재 한국총영사관의 관광비자가 찍힌 일본 여권이 나왔다. 여권에 쓰인 이름은 요시이 유키오. 여권에 붙어 있는 사진과 범인의 얼굴 모습은 똑같았다. 일본주재 공관을 통해 조회하자 요시이 유키오 명의의 여권을 만들때 제출된 사진과 여권에 붙어 있는 사진이 똑같은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실제 요시이 유키오 사진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범인은 진짜 요시이 유키오의 인적사항에다 그의 사진을 첨부해서 제출하는 방법으로 여권을 발급받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어를 구사하는 수사관이 심문을 하자 범인은 인적사항을 밝혔다. 재일교포이며 본명은 文世光, 일본 이름은 난조 세쿠오(南條世光). 1951년 12월26일생으로 나이는 22세(당시). 본적은 경상남도 진양군 대평면 산촌리 775번지, 출생지는 일본 오사카(大阪)부 히카시 스미요시(東住吉)구 쿠와쓰(桑津)정 3-24, 주소는 일본 오사카부 이쿠노(生野)구 나카가와니시(中川西) 2-9-4.
아버지 文炳台(1927년생으로 1969년 병사)와 어머니 陸末蘭(당시 47세) 사이의 3남1녀중 3남. 큰형 文根洙(당시 27세)는 민단계인 오사카 금강학원 교사이고 작은형 文世寶(당시 24세)는 오사카의 대동물산(大同物産)의 외무사원. 여동생인 文房榮(당시 15세)은 히카시 스미요시(東任吉) 중학교 3학년. 민단 오사카 본부의 사무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부인 姜成淑(당시 24세) 과의 사이에 한 살난 아들 文天新이 있다.
文世光의 이력사항도 밝혀졌다. 오사카의 쿠와쓰(桑津)국민학교와 히카시 스미요시(東任吉)중학교를 졸업하고, 세이기(成器)상고 2년 중퇴. 이후 재일거류민단 오사카 이쿠노 북(北)지부의 단비(團費) 모금원, 화성화학 플라스틱공장 공원, 오사카항의 부두노동자, 마루니(丸二)항운 일당 노무자를 하였고 휴지(休紙) 수집상, 소화기 판매원, 빌딩 유리 청소부 등의 잡일을 하다 1974년 7월20일부터는 무직. 입국 당시엔 과격한 행동으로 인해 거류민단에서 제적된 재일한국청년동맹(약칭: 한청)에 소속되어 있었다.
文世光이 사용한 권총은 미제 스미스 앤드 웨슨사의 치프 스페셜 38구경(총번 402508)이었다. 이 총에는 불발 상태의 총알이 한 발 들어 있었다. 文은 이 권총을 일제 산요 라디오 속을 뜯어내고 그 속에 숨겨 들여왔다고 말했다.
速射 위해 방아쇠 안전장치 제거
文世光의 권총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방아쇠 안전장치가 마모되어 있는 점이었다(주: 권총이든 소총이든 방아쇠를 당기면 격발되기 직전에 방아쇠가 뭔가에 걸리는 듯한 저항감이 느껴진다. 이는 방아쇠가 너무 예민하게 움직이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 때문으로 사격자는 이 저항치 이상의 힘을 손가락에 넣어야 격발이 일어난다. 이러한 장치를 갖추지 않을 경우 방아쇠는 사소한 충격에도 격발을 일으켜 자칫 총 소지자와 주위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사망케 할 가능성이 있다. 방아쇠 안전장치가 없는 총을 사용하는 사람은 대개 速射대회에 참가하는 사격선수들이다).
文世光은 권총을 빨리 쏠 수 있도록 이 장치를 갈아버렸다고 진술했다. 文이 국립극장에서 권총을 뽑다가 오발사고를 일으켜 자신의 허벅지를 관통시킨 것은 이 장치가 마모되었기 때문이었다. 文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을 때 무의식적으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고 그 손가락의 힘 때문에 격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朴대통령이 피격당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수도 있다.
(소설 「자칼의 날」에는 자칼이 사제총 제조 전문가인 구상스에게 『방아쇠의 안전장치는 필요없다. 총은 분해해서 원통형 용기에 감출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는 대목이 있다. 文이 권총을 라디오 속에 숨겨서 들어오고 방아쇠의 안전장치를 갈아버린 것이 이 대목과 유사하다)
한국 언론을 비롯한 외국의 주요 언론들은 사건 직후부터 범인의 신원 사항을 알아내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취재대상은 주로 국립극장에 있었던 목격자(기자 포함)와 수사관들이었다. 각 언론들이 입수한 첫 정보는 「저격범은 30대의 일본인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NHK방송은 15일 낮 여러가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朴대통령 저격과 陸여사 피격 사실을 첫 보도 하였다. 이 방송 직후 화면에 나온 야마무로 히데오(山室英男) 해설위원은 『이 사건은 조작 같다』는 발언을 했다. 야마무로 해설위원은 『범인은 북한의 무장간첩이거나, 민청학련 계열의 극렬분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1939년 나치스가 독일 의사당에 불을 지른 뒤 국회를 해산하고 정권을 탈취한 예가 있듯이 이번 사건도 한국의 현 정권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했다(중앙일보 74년 8월17일자 보도).
주일 한국대사관은 NHK와 야마무로 해설위원에게 항의했다. NHK측은 즉각 정정방송을 냈다. 그러나 야마무로 해설위원의 발언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된 한일 양국민의 수는 이 사건의 수사가 진행될수록 더욱 늘어나게 된다. 심지어는 陸여사가 文世光이 아닌 경호원의 총에 의해 숨졌다는 설마저도 나오게 된다.
이날 저녁 7시께 陸여사는 서울대 병원에서 운명하셨다. 하루종일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이 무렵 그치고 서울의 서쪽 하늘에 새빨간 노을이 들었다.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려는 듯한 진한 핏빛이었다.
『나는 자칼이다』
金淇春 검사(전 법무장관)는 당시 중앙정보부에 파견나가 정보부장 보좌관을 맡고 있었다. 文世光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8월 초순 金淇春 검사는 가족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으로 여름휴가를 갔었다. 휴가지에서 金검사는 막 한국어 번역판이 나온 「자칼의 날」을 재미있게 읽었다 한다. 그가 휴가에서 돌아온 지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文世光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申稙秀 정보부장은 이 사건의 지휘를 金淇春 검사에게 맡겼다. 임무를 받은 金검사는 고민에 빠졌었다고 한다. 청와대측에서는 하루빨리 범행동기와 배후세력을 알고 싶어할 텐데 과연 그 요구에 맞출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8월16일 金淇春 검사는 일어를 구사하는 정보부 수사관과 함께 文世光을 첫 대면했다. 金검사는 수사 제1성이 범인을 다루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만큼 오랫동안 생각한 질문을 던졌다.
―소설 「자칼의 날」을 읽었느냐.
『읽었다. 센세이(先生)도 읽었느냐』
―네가 바로 자칼이 아니냐.
『그렇다. 나는 자칼이다』
예상했던 대로 文世光은 「자칼의 날0125을 읽었고 또 소설 이야기에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실마리가 잡히자 대화는 차츰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사상이 무엇이냐.
『나는 공산주의를 신봉한다. 나는 공산혁명을 이룩하려는 한 수단으로 여기에 왔다』
―요시이 유키오는 누구인가.
『여자 친구인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의 남편이다』
―요시이 유키오 명의의 여권은 어떻게 마련했나.
『요시이 미키코가 남편 요시이 유키오의 호적등본 등 인적사항 서류를 제공해 주어 만들 수 있었다』
―권총은 어디에서 났는가.
『오사카 고쯔(高津)파출소에서 훔쳤다』
―누구의 지시로 훔쳤는가.
『조총련 오사카 서(西)지부 정치부장 金浩龍의 지시를 받았다』
―金浩龍으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았는가.
『1973년 11월11일 홍콩 여행중 권총을 구입하라는 명령과 함께 金으로부터 50만엔을 받았다. 1974년 2월 초순의 어느날 밤 10시쯤에 「朴正熙의 암살은 8·15 기념식 행사때 하기로 한다. 이를 위한 사전준비로 현재 관여하고 있는 金大中 구출위원회 등의 모든 조직활동에서 손을 떼라. 또 도쿄 아타치(足立)에 있는 아카후도(赤不動) 병원에 가와우에(川上勇治)란 이름으로 입원해라. 입원비는 조총련이 담당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74년 2월12일부터 3월11일까지 이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공산주의 사상학습을 하였다. 이 기간 金浩龍으로부터 모두 58만엔을 받았다』
―만경봉호에 탄 적이 있느냐.
『있다. 74년 5월3일 밤10시쯤 김용호의 지시로 약 한시간 가량 승선하였다』
―만경봉호에서 누구를 만났느냐.
『배 식당에서 47세 가량의 북한 사람을 만났다』
金검사는 문세광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文이 머물렀다는 만경봉호 내부와 고쯔 파출소의 내부 모습을 그리게 했다. 文은 의외로 그림솜씨가 있었다. 文은 별 저항 없이 만경봉호 내부 모습과 그곳에서 만난 북한 사람의 모습, 그리고 고쯔 파출소의 내부를 그렸다.
미키코의 正體
범행 배후 세력을 밝히면서도 文은 당당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국가 원수를 저격한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도 전혀 죽음을 예상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文은 이따금 『밖은 괜찮으냐』란 질문을 했다. 그때까지도 文은 범행을 하고 나면 혁명이 일어나고 혁명세력이 자기를 구하러 올 것이라는 소영웅주의적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金검사가 文으로부터 받아낸 진술은 곧 신문 방송을 통해 알려졌다. 기자들의 관심은 요시이 유키오와 요시이 미키코 부부, 그리고 金浩龍으로 쏠렸다.
8월16일 오후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은 요시이 미키코(당시 24세)를 여권법 및 출입국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하였다. 또 요시이 미키코가 1973년 11월 초 같은 방법으로 남편 명의의 여권을 文世光에게 만들어 주었으며 그해 11월19일 이 여권을 사용한 文世光과 함께 2박3일간 홍콩 여행을 한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조선일보 도쿄 특파원이었던 許文道씨는 요시이 미키코의 신원사항에 관한 상세한 기사를 보내왔다. 내용은 이러했다.
「1950년 오사카부 이즈미오쯔(泉大津)시 이케무라(池浦) 433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양친과 오빠(당시 34세) 언니(당시 33세)가 있으며 세이후(誠風)중학과 세이카(精華)여고를 나왔다. 여고 재학중 사회과학 연구회에 들어가 조선문제와 부락(일본의 천민 집단 거주지) 해방운동 등에 관심을 갖고 2학년 때는 클럽의 부장을 맡았다. 그녀의 집 책꽂이에는 김일성 저작집 여섯 권과 일조(日朝)회화 등의 책이 꽂혀 있었다. 文世光과는 고교 시절 클럽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고교 졸업 후 로스다이어 회사에 8개월간 근무했으며 이후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그녀의 남편 요시이 유키오(당시 23)는 泉州지방 노동조합 연합회의 서기이다. 요시이 유키오와는 1971년 1월에 결혼, 아들 燎(당시 두 살)를 두었다. 16일 남편인 요시이 유키오에게 부인과 文世光의 홍콩 여행 사실을 알았느냐라고 질문하자 요시이 유키오는 『복잡한 심정이다. 걱정이다. 내 심경을 생각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日本 경찰의 非협조적인 태도
8월18일 오후 의문의 인물 金浩龍은 조총련 오사카 이쿠노(生野)구 서(西)지부 사무실에 나타나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다음 날짜 조선일보에 보도된 金의 발언 요지는 이러했다.
『文世光과는 72년 9, 10월경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배포하던 중 그의 집 앞에서 처음 만났다. 지금까지 文을 만난 것은 모두 세 번이며 74년 7월에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文에게 암살지령이나 거사자금을 전달한 사실은 없다. 요시이 부부와는 면식조차 없다. 일본 경찰이 이 사건과 관련, 직접 찾아오거난 출두요청을 해오더라도 (나는) 응하지 않겠다』
文世光 사건의 배후를 밝히기 위해서는 한일 수사당국간의 공조체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한일간에는 수사공조에 관한 협약이 없었으나(이 협약은 지금까지도 체결되지 않았다) 사건이 사건인 만큼 일본 수사당국과의 협조가 잘 되리라 기대했다. 초기엔 일본 경찰도 범인이 일본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으로 한국의 대통령을 저격한 것 때문에 나름대로 수사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한국의 수사기관이 文世光의 배후세력으로 조총련을 지목하자 일본 수사당국은 비협조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이 비협조적으로 나오게 된 데는 金大中씨를 납치한 것으로 알려진 중앙정보부가 文世光 사건을 맡은 것이 한 원인이었다.
중앙정보부는 1973년 8월8일 도쿄 치요다(千代田)구 소재 그랜드 팔레스 호텔 2210호에 묵고 있던 金大中씨를 연행하였다. 이는 일본 국내법을 무시한 불법행위였다. 8월11일 서울 동교동 자택에 도착한 金大中씨는 납치범으로부터 수장(水葬)위협을 받았다고 밝혀 한일 양국, 특히 일본의 조야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다음은 文世光 사건을 수사했던 전직 정보부원의 말이다.
『金大中 납치사건 당시 일본 수사당국에서 金大中씨 사건 관련 조사협조 의뢰를 보내오면 우리는 「잘 알수 없음」이라는 회답을 보내곤 했습니다. 국권이 침해당했다고 시끄러웠던 일본으로서는 앙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앙갚음을 文世光 사건 때 우리가 그대로 돌려 받은 셈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도가 점점 심해져 「文이 미키코를 만났다는 다방이 오사카 ○○지역에 있다는데 시실인가」라고 물어도 「네 시간 동안 찾아보았지만 잘 모르겠다」는 회신이 왔습니다. 우리가 직접 확인해 보니 찾기 쉬운 곳에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수사는 文의 진술에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수사당국은 자칫 일본 조야로부터 金大中 사건 때의 앙갚음으로 『엉터리 수사를 한다』는 오명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당. 사실 확인에 전력을 기울였다.
속보경쟁이 붙은 한국 언론도 당시로서는 대규모의 취재진을 일본에 보내 사실 확인에 들어갔다. 한국의 수사기관과 언론기관이 주목한 것은 저격범이 되기까지의 文의 성장과정이었다.
이쿠노구의 열악한 환경
당시의 오사카 이쿠노區는 在日교포들이 많이 몰려 사는 곳으로 도시빈민층의 집단 거주지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文世光은 일찌감치 민족차별 문제에 눈을 떴을 것이다. 文이 고등학교에 다녔을 때는 일본의 학생운동이 치열하던 때였다. 文은 가장 과격했던 분트계(系) 활동을 하였다. 분트계는 자기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의 입학식, 종업식, 졸업식에 쳐들어가 「외인부대」로 불리기도 했다.
文世光과 미키코의 애정
난조 세쿠오(南條世光의 일본 이름)는 고교 시절 사회과학연구회의 멤버였다. 그가 고바야시 미키코(小林美喜子·요시이 미키코의 처녀 때 이름. 요시이 유키오와 결혼 한 후 요시이 미키코가 되었다)를 만난 것은 이 서클에서였다.
여고 재학 시절의 미키코도 文世光 못지 않은 운동권이었다. 74년 8월28일자 조선일보에는 미키코의 담임 선생이었던 하야자키(早崎久子)씨의 이야기가 실렸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학생이 적은 여자고등학교에서 (미키코는) 희귀한 존재였다. 리더십도 있고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데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성적은 중간쯤이고 수업중에 선생이 말하는 것이 제 생각에 맞지 않으면 「선생님 그것은 좀 이상합니다」고대어들곤 했다. 졸업식에서는 전원 기립의 호령이 걸렸는데도 그녀만이 서지 않고 버티고 앉아 있던 것이 인상적이다』
세이기 상고 3학년 1학기부터 文은 미키코의 교실을 자주 방문했다. 조총련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함께 참여했다(文이 자퇴원은 낸 것은 3학년 1학기를 마치고서였다).
고교 시절 文은 혁명을 꿈꾸면서 한편으로 미키코와 동지적인 연인관계를 가졌던 것 같다. 1974년 9월13일자 신아일보는 미키코가 일본의 한 신문 사회부 기자에게 『文은 내 첫사랑이었다』고 털어놓았다고 보도했다. 미키코가 말한 바를 옮기면 이렇다.
『여고 시절에 같은 반 친구들은 文과 내가 꼭 결혼할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文과 나 사이는 그런 정도였으니까요. 내게는 그가 첫사랑이지요. 상대가 한국 사람이니까 집에서 반대하더냐구요. 우리 집 정도가 그런 것을 따질 만한 게 뭐 되나요. 실은 그 반대랍니다. 내가 결혼할 것을 바라면 文은 결혼은 한국 여성과 하겠다고 단호히 말했어요. 자기 집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고요. 따지고 보면 내가 文에게 거꾸로 차인 셈이지요』
고교를 중퇴한 文은 68년 민단 이쿠노지부에 가입해 한청 활동에 참여했다. 이 시기의 文은 민족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이때의 文은 말수가 적었고 순수한 면도 있었으며 무정부주의적인 성격도 있었다고 한다. 시일이 지나면서 한청에서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1971년 도쿄 민단에 주도권 분란이 일어나자 文은 비주류파에 가담해 행동을 했다. 71년 8월 민단 도쿄본부 습격사건 때는 선봉으로 참여해 오른팔에 부상을 입었다. 文이 좌파적 민족주의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으로 보인다.
金浩龍과의 만남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해 9월3일 조총련계의 조청(朝靑)과 민단계의 한청(韓靑)은 오사카의 페스티벌 홀에서 「7·4공동성명을 지지하는 재일동포 오사카 청년학생 공동대회」를 가졌다. 韓靑소속이던 文은 조총련 오사카 서(西)지부 정치부장 金浩龍을 만났다.
文世光 사건에 관한 검찰 공소장과 법원(1심) 판결문은 文과 金浩龍과의 관계를 소상히 적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옮기면 이렇다.
「첫 만남 이틀 후인 72년 9월5일 밤 10시쯤 金浩龍은 文世光의 집을 방문, '같은 민족끼리 정치이념을 초월하여 자주 만나자』는 제의를 하였다. 이후 매월 한두 차례씩 만날 때마다 金은 『북조선은 金日成 주석의 주체사상 아래 모든 인민이 단결하여 잘 사는 사회를 이룩하고 있다』 『반면 남조선의 경제는 일본 자본에 수탈당하고 있으므로 민생고가 날로 심해가고 있다』는 교양을 받았다」
1973년 8월 金大中씨 납치사건이 일어나자 9월 초 일본에서는 「金大中 구출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 위원회에 가입한 文은 오사카 주재 한국 총영사관을 검거하고 영사관직원을 인질로 삼아 金大中씨와 교환할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文은 反韓운동가로 나선 것이었다.
정보부의 조사과정에서 文은 73년 10월 하순 자신의 집을 찾은 金浩龍과 이런 약속을 했다고 진술했다.
「朴대통령 저격장소는 삼일절 기념식장으로 한다. 무기는 권총으로 하되 출저를 숨기기 위하여 제3국에서 購得하기로 한다. 무기 구입 자금은 金浩龍이 조달하고 무기 구입은 혁명정신에 입각하여 文世光이 직접 한다」
이 무렵의 文과 그의 첫 사랑 미키코는 각자의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文은 한국 여성 姜成淑과 결혼하였고 미키코는 요시이 유키오와 결혼하였다. 文과 미키코는 연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1973년 10월 하순 어느날 정오 오사카 天王寺驛 근처 에코호텔 지하 다방에서 文과 미키코가 만났다. 文은 『한국의 공산혁명을 성공시키려면 朴대통령을 제거해야 한다』며 『권총을 구입하기 위해 홍콩에 가야겠는데 나는 韓靑과 金大中 구출위원회 활동 등으로 인해 한국대사관에서 여권을 발급받기가 어렵다. 당신 남편 이름으로 일본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고 한다(주: 한국 국적의 재일교포는 일본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재외국민용 여권을 발급 받는다).
미키코는 文의 부탁을 들어 주겠다고 대답하고 『부부로 가장하여 함께 홍콩에 가자』는 文의 제의에도 동의하였다 한다.
유서를 써놓고 홍콩 여행
11월11일 밤 8시쯤 金浩龍은 文을 찾아와 여비 등의 명목으로 50만엔(1만엔권 50장)을 주었다. 다음날인 12일 文은 한큐여행사를 찾아가 요시이 유키오의 서류에 자신의 사진을 첨부해 제출하며 여권 작성을 의뢰하였다. 11월17일 文은 요시이 유키오 명의의 단수여권(여권번호 PE790912)을 발급받았다.
11월19일 오전 10시 부부로 위장한 文과 미키코는 오사카 공항을 출발하여 홍콩에 도착했다. 이들은 홍콩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날부터 두 사람은 홍콩과 구룡반도 일대의 고물 시장, 장물 시장,총포점 등을 돌아다니며 권총 구입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文이 朴正熙 대통령에 대해 강한 적의를 품었던 것은 홍콩 여행 직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여행을 떠나기 전날인 11월18일부로 남긴 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일본 오사카 경찰 발표).
「올해(73년)는 朴정권이 金大中씨 사건으로 붕괴의 시기에 있어 11월의 유엔 총회가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일인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한국혁명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 나는 죽음이냐, 승리냐의 구호 밑에서 혁명전쟁의 여행을 출발한다」
일본 경찰에 따르면 文은 홍콩을 거쳐 한국에 들어갈 예정으로, 서울의 한 호텔을 예약해 놓고 홍콩으로 떠났었다고 한다. 文이 서울행을 포기한 것은 홍콩에서 무기 구입에 실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文을 조사했던 전직 정보부 요원은 『우리도 文과 미키코가 불륜의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文은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고 주장했다. 미키코와는 혁명적 동지 관계이기 때문에 육체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 文의 진술이었다』고 말했다.
11월 하순 文은 자기 집을 찾아온 金浩龍을 만났다. 文은 홍콩여행에서 권총 구입에는 실패하였으나, 해외여행의 경험을 체득하였고, 불법여권 사용에 성공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한다. 金은 『앞으로 계속 노력하라』고 격려했다.
1974년 정초가 되자 金浩龍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韓德銖 조총련 중앙본부 의장이 혁명과업 수행을 위하여 가일층 노력하라는 당부와 함께 정초 선물을 보내왔다』며 인삼주 한병과 과실주 한병을 내놓았다.
74년 2월초 金이 또 文의 집을 찾아왔다. 金은 『朴正熙 암살은 8.15기념식행사 때로 하라. 앞으로 이 계획에 전념하기 위해 韓靑과 金大中 구출대책위원회 등의 모든 조직활동에서 손을 떼라』는 지시를 내렸다. 金은 또 『도쿄 아타지(足立) 소재 아카후도(赤不動) 병원에 십이지장궤양을 구실로 1개월간 입원하라. 입원방법은 병원장을 찾아가 가와가미 유지(川上勇治)라고 말하면 된다. 병원 비용은 우리가 댄다』고 말했다.
입원한 文은 오전 7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공산주의 사상학습을 하였다. 이때 文이 읽은 학습자료는 「金日成의 주체사상」 「시아누크 환영대회에서의 金日成 연설문」등의 팜플렛과 「혁명은 여하히 주장되는가(트로츠키저)」 「공산주의와 테러리즘(트로츠키)」 「혁명속의 혁명(드브레이)」등의 서적이었다.
3월11일까지 입원해 있는 동안 文은 金浩龍으로부터 입원비로 16만엔, 생활비로 85만엔, 잡비로 5만엔을 받았다.
5월3일 저녁 8시쯤 金浩龍은 文에게 『4일 밤에 오사카항에 정박중인 만경봉호에 승선하라』는 지령을 하였다. 4일 밤 9시경 文은 金浩龍이 보낸 사람(성명 미상)의 안내로 15명의 조총련계 교포와 함께 만경봉호에 승선하였다.
한 시간 가량 船內에서 대기한 文은 밤 10시쯤 선박 안 식당에서 47세 가량으로 보이는 북한인을 만났다. 文은 북한인으로부터 『그 동안의 영웅적 사업은 이미 보고를 받아서 잘 알고 있다. 혁명정신과 투쟁경력에 치하를 보낸다. 현시점에서 남조선의 공산혁명을 완수하기 위하여는 朴正熙를 암살하는 길밖에 없으니 이 과업을 끈기 있게 수행해 주기 바란다』는 지시를 받았다.
요시이 유키오는 北韓행 계획 만류
6월 말 文은 요시이 유키오의 집부근 다방에서 요시이 부부를 만났다. 먼저 요시이 유키오가 『내가 북조선에 가게 되었는데 여권 신청을 하면 당신이 홍콩 여행할 때 내 명의를 사용한 사실이 드러난다. 걱정이다』는 말을 했다.
文은 『나는 이번 8·15에 朴正熙를 암살해야 한다. 당신의 북조선 방문을 다음 기회로 연기하고 이번에도 당신 명의의 여권으로 남한에 갈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유키오는 文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7월초 文은 범행에 사용할 총을 오사카 南경찰서 고츠(高津)파출소에서 훔치기로 했다. 그는 여섯 차례나 승용차를 몰고가 파출소 뒤쪽 주차장에 세워놓고 정찰하였다.
7월18일 새벽 4시30분 순찰을 돌고 온 히라시마(平島), 하타(畑) 두 경관이 파출소에서 잠에 들었다. 文은 뒷문을 파이프 렌치로 따고 들어가 이들이 풀어놓은 스미스 앤드 웨슨 권총과 실탄 다섯 발, 뉴남부식 권총과 실탄 다섯 발을 훔쳤다.
文은 이때 같이 훔친 수갑이 달린 권총집을 나라(奈良)현의 야마토천(大和川)에 버렸다고 진술하였다. 일본 경찰은 文의 진술을 토대로 야마토川 부근을 수색해 이 권총 케이스를 찾아냈다.
미키코로부터 남편 요시이 유키오의 서류를 받은 文은 7월20일 한큐여행사를 찾아가 여권 발급과 서울까지의 왕복항공권 그리고 조선호텔 예약을 의뢰하였다. 24일 文은 여권과 항공표를 발급받고 30일에는 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에서 관광 목적의 사증을 발급받았다(주: 당시 일본은 일반인들에게 단수여권을 발급하였다. 文이 홍콩여행 때 사용한 여권을 다시 사용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文은 7월24일 저녁 金浩龍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고 전화했다. 다음날 文의 집앞에서 金은 80만엔을 주면서 '빛이 내리듯, 밤하늘에서 이슬이 내리듯 방아쇠를 당겨라. 가급적이면 安重根 의사의 경우처럼 1m 이내의 거리로 접근하여 사격하라'고 말했다.
8월5일 文은 산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구입, 내부를 뜯어내고 스미스 앤드 웨슨 권총을 감추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文은 8월6일 오전 11시30분 오사카발 서울행 대한항공기에 탑승, 오후 1시 김포공항에 내렸다. 文이 이날 갖고 들어온 가방은 13㎏짜리 하나였다. 권총이 든 라디오를 이 가방에 넣어서 세관을 통과한 것이었다.
여자와 동침하기도
소설 「자칼의 날」에서 프랑스에 잠입한 암살전문가 자칼은 돈 많은 영국 신사를 가장, 범행 날짜까지 여러 곳을 떠돌며 값비싼 여행을 즐긴다. 조선호텔에 여장을 푼 文의 행적도 이와 비슷했다.
8월7일 저녁 그는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 지하실에 있는 맥주집 뉴브루셀에 들어갔다. 지배인 吳모씨는 10번 아가씨 金모양을 文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자칼의 날」에서 자칼은 「사슴산장」이라는 한적한 호텔에서 프랑스 남작부인을 유혹, 뜨거운 밤을 즐긴다.
8월10일 오후 4시쯤 文은 차를 대절해서 청평의 나이아가라 호텔로 갔다. 저녁 9시쯤 이 호텔 나이트 클럽에 나온 文은 웨이트리스 李모양과 양주를 마신 후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文은 택시를 타고 서울의 조선호텔로 되돌아왔다. 이런 식으로 文은 14일까지 여유있는 시간을 보냈다.
文의 어머니 陸末蘭은 8월15일 범행 후 구속된 아들을 한 차례 찾아왔으나 면회가 허가되지는 않았다. 이때 文은 그의 어머니와 陸英修 여사가 同姓同本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다. 文이 진정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린 것은 이때였다고 한다.
『나는 바보였다』
文은 재판에서 내란목적 살인죄, 국가보안법 위반, 총포 화약류 단속법 위반 등 여섯 개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23회 생일을 엿새 앞둔 1974년 12월20일 오전 7시3분 서울구치소 4사 상동(上棟) 감방에서 잠에서 막 깨어난 文은 교도관들에 의해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趙台衡 대검 공판부장 검사, 朴道亨 서울 구치소장, 金致淵 목사 등이 입회한 가운데 신분확인과 1심 2심 3심의 판결문 낭독이 있었다. 최후진술 차례가 되어 朴교도소장이 『할 말이 없는가』라고 물었다.
통역을 통해 말을 알아들은 文은 고개를 떨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최후진술을 했다.
『나는 바보였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朴대통령에게 진정으로 죄송하다는…』
일본 사직당국의 태도는 한국과 달랐다. 文世光 사건의 공범들에 대해서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만 것이다. 金浩龍과 요시이 유키오는 혐의가 없다며 기소조차 하지 않았고 요시이 미키코만 출입국 관리령 위반 방조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미키코는 하루만에 오사카 지방법원의 보석 결정을 받았고 법정에서는 집행유예 3월이라는 아주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
전직 중앙정보부 수사관은 文의 성격을 『쉽게 흥분하고 남에게 주목받고 싶어하는 소영웅주의적 기질』 이라고 평가했다.
陸英修 저격 사건의 진실(3)
-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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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6-02, 0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