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편향 교과서] 이승만의 抗日은 '비판·축소', 金日成의 抗日은 '긍정·집중' 소개

보천보 전투는 당시 국내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고, 이 작전을 성공시킨 김일성의 이름도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두산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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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고교생들이 역사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8종의 검인정 교과서 가운데 교학사와 지학사 교과서를 제외한 6종의 교과서는 建國 대통령 이승만의 항일운동을 축소 혹은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특히 비상교육, 두산동아, 리베르스쿨, 지학사가 발간한 4종의 교과서는 이승만의 항일운동을 축소·비판하면서 김일성의 항일운동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기술했다.

이들 교과서의 특징은 김일성이 활동했다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소개하면서 ‘김일성’이란 이름을 소개하지 않고 있다. 두산동아의 경우 한술 더 떠서 보천보 전투를 소개하며 <이 작전을 성공시킨 김일성의 이름도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기술했다.

비상교육, 리베르스쿨, 지학사가 발간한 교과서가 동북항일연군의 항일운동을 매우 긍정적으로 기술하면서 김일성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즉,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은 뒤, 이를 다룬 보충교재, 혹은 수업 중 교사들의 발언 등을 통해 김일성의 항일투사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외에도 이들 교과서는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을 기술하면서 이들이 물자 보급을 위해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을 구별하지 않고 강탈행위를 했던 점, 몸값 목적의 유괴 등 폭력적 약탈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점 등을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북한은 김일성·최현·김책·최용건 등 북한 정권의 핵심 세력이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정치·군사간부로 활동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의 이러한 주장 및 문헌을 일본에서는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등 親北성향 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 저작 활동을 했다.

하루키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은 북한에 있으며,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해온 인물이다. 국내에 소개된 하루키의 저서로는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1992년), ‘역사로서의 사회주의’(1994년), ‘한국 전쟁’(1999년), ‘북조선-유격대 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2002년),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2004년) 등 다수가 있다.

<주> 아래는 위에서 언급된 4종 교과서(항일운동 부분)의 이승만과 동북항일연군(김일성 소속)관련 기술이다.

■ [비상교육]: 1920년대 초부터 만주 지방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어 상당수의 우리 동포들이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1933년 항일 세력의 규합과 노동자의 주도권 강화를 강조하면서 유격대를 통합하여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편성하였다. 이는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로 모든 반일 세력을 받아들인다는 원칙에 따라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었다...동북항일연군은 만주 지방에 소부대를 파견하여 유격활동을 계속하였다. 일부 한인 유격대는 광복 이후 소련군을 따라 국내에 들어와 북한 정권을 세우는 핵심이 되었다. (315~316 페이지) 

□ -회의(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 많은 민족운동가가 임시 정부에서 이탈하여, 임시정부는 조직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침체 상태에 빠졌다. 1925년에 임시 의정원에서는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292페이지)

-유학 또는 정치적 망명을 한 이승만, 안창호 등의 지식인들이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 이승만은 한인 교회와 학교, 일반 단체를 매개로 외교 활동을 하였다” (319페이지)

■ [두산동아]: 동북항일연군의 지휘관에는 한인들이 많이 있었다. 한인 간부들은 이념을 초월한 민족적 단결을 이루기 위하여 조국 광복회를 결성하였다. 조국 광복회는 국내의 민족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함경도 일대에도 조직을 확대하고, 보천보 전투 등 국내 진공 작전을 여러 차례 단행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공세가 강화되자 이들은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기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소련군의 일원으로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다.(246 페이지)

[그날의 역사] 보천보를 습격하다

1937년 6월 동북항일연군 내의 한인 부대원들은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보천보 지역을 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 소방서 등 일제의 행정 관청을 공격하였으며, 추격하던 일본군을 기습 피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보천보 전투는 당시 국내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고, 이 작전을 성공시킨 김일성의 이름도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247페이지) 

□ (사진설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환영회): 사진은 1920년 12월 상하이에서 열린 초대 대통령 이승만 환영회 장면이다. 그러나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편지를 보낸 청원서 내용 가운데 국제연맹 위임 통치를 제안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립운동가들은 분노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활동에 비판적이었던 신채호, 박용만 등 독립전쟁론자들은 이승만을 불신임하고 국민대표 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결국 국민대표 회의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1925년 박은식을 대통령에 선출하는 등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 [리베르스쿨]: 동북 인민 혁명군은 모든 반일 세력을 받아들인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하였다. 많은 한인들이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중국 공산당과 함께 만주에서 격렬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의 공세가 강화되자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겨 소련군의 일원으로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304페이지)

□ -임시정부 내에서는 이동휘 계열의 무장 투쟁론, 이승만 계열의 외교 독립론, 안창호 계열의 실력 양성론 등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싸고 갈등이 불거졌다. 그런 가운데 이동휘가 국무총리에서 사임하고, 이승만이 윌슨에게 위임 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을 들어 임시정부의 해산을 주장하였다...1924년 임시정부는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대신하여 대통령 대리에 이동녕을 추대하였다. (287~288페이지)

-1930년대에 미주지역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었다. 1933년 이승만은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하여 열강 대표들에게 한국의 독립 문제를 환기시켰다. (308페이지)

■ [미래엔]: 만주 곳곳에 수많은 항일 유격대가 조직되자, 중국 공산당은 이를 규합하여 동북 인민 혁명군(뒤에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을 편성하였다. 이를 중심으로 한중 두 민족이 연대하여 항일 유격 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편, 동북항일연군 내의 한일 항일 유격대는 국내에 진출을 적극 도모하면서 함경도 일대의 공산주의 세력과 천도교도 등 민족주의 세력까지 통합하여 조국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국내 조국 광복회 세력의 지원 아래 항일 유격대의 일부가 함경도 갑산의 보천보로 들어와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을 파괴하였다. 이 사건은 국내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만주에서 독립 군이 모두 사라졌다는 일제의 선전이 거짓이며, 항일 투쟁이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293페이지)

□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도 구미위원부 등을 이끌면서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벌였다. (290페이지)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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